1956년, 앙드레 바쟁은 프랑스 국립고등사범학교의 강연장에서 장 르누아르의 1946년작 <어느 하녀의 일기>를 상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지식인) 관객 가운데 상당수는 르누아르의 그 ‘미국영화’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르누아르의 그 영화가 르네 클레르의 초기 익살극 영화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면서도 템포나 연출력면에서 클레르의 것들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반격에 맞서서 바쟁은 르누아르의 영화가 어떻게 클레르의 것과는 다르며, 좀더 풍요로운지를 열심히 입증해 보였다.
사실 바쟁도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1939) 이후 미국으로 가서 만든 영화들에 처음부터 완전히 마음을 열어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한한 애정과 통찰의 시선을 동반한 ‘르누아르 다시 읽기’를 거듭 행하고 확장하면서 그는 자신의 실책들을 하나씩 깨닫는 동시에 르누아르의 심오한 세계, 그 진가에 조금씩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장 르느와르>는 그처럼 오랜 반성과 성숙의 시간을 거친 비평가가 이제는 마치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를 다하겠다는 듯이 써낸 신실한 비평서이다. 때문에 빈번히 나오는 ‘최고의 영화감독’이란 식의 표현이 이 책에서만은 절대로 민망하게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바쟁은 르누아르의 각 영화를 그것들이 속한 전체 세계와의 관련을 잃지 않은 채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리얼리스트이자 모럴리스트로서 ‘스크린의 진정한 본성’과 함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알고 있었던 한 시네아스트, 그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쓰여진 <장 르느와르>에는 르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정밀한 비평과 르누아르에 대한 깊이있는 작가론이 담긴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시에 영화의 존재에 대한 이론과 영화 자체에 대한 옹호론도 스며들어 있어 두텁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르누아르의 ‘풍요롭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자세하면서도 체계적인 설명을 원한다면 바쟁의 이 책보다는 솔직히 다른 것들, 예컨대 르누아르 영화들 전반을 세심히 다룬 레이먼드 더그냇의 책이나 그것보다 좀더 ‘부피’있게 <게임의 규칙>까지 르누아르의 프랑스 영화들을 다룬 알렉산더 세손스크의 책이 나을 수도 있다. 바쟁의 <장 르느와르>는 정말이지 감동적이게도 죽기 전날까지 글을 썼던(<랑주씨의 범죄>에 대한 글) 저자의 열정의 소산이긴 하되 아쉽게도 죽음의 한계를 넘지 못해 ‘완성’은 되지 못한 책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빛나는 영감과 그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묵직한 감흥이란 측면에서 바쟁의 책을 따라올 것은 단연코 없다. 바쟁의 <장 르느와르>는 분석에의 의지, 시적인 감수성과 세상을 보는 자애로운 시선의 조화로운 어울림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이성과 감성 양자에 유발하는 감동을 경험하게 한다. 물론 그럼으로써 그 글과 그것이 다룬 영화로 돌아가게 만든다. 이건 비평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거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