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라는 말에는 거짓말이 많다. 그것은 기록이라는 허점투성이 기억방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근대까지만 해도 화자는 ‘남성’의 시선이었음에야 ‘최초’ 무언가를 해냈던 여성들에 관한 기록이 튼실할 리 없다. 윤심덕,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등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여성들 외에도 ‘최초’의 여성들은 발굴되고 있다. 곧 개봉할 영화 <청연>이 주목한 비행사 박경원도 그중 하나다. 기실, 누구일지라도 그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불과 20∼30년에 걸친 짧은 삶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편력이다.
펜으로,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전사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1904∼83)
1920년 봄 막 창간을 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서로 좀더 특색있는 신문을 만드느라 혈안이었다. 특히, 만화 <멍텅구리>를 통해서 독자층의 호응을 받은 <조선일보>는 이제 여기자를 채용하는 색다른 아이디어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그때 말로 ‘부인 기자’였는데,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면 출입도 삼가고 부득불 나가야 할 일이면 쓰개치마로 얼굴부터 가리던 당시 ‘부인 상식’으로 미루자면 가당치 않을 듯했다. 한데, 이 자리에 춘원 이광수가 ‘최은희’라는 팔팔한 처자를 추천한다. 그의 아내 허정숙이 들려준 일화가 이 재목에 대한 신뢰의 근거였다.
알아주는 산부인과 개업의 허정숙은, 이철재라는 갑부가 부인의 출산 비용이 비싸다고 버티는데 약이 올라 도리가 없다는 넋두리를 최은희에게 전했다. 재밌다고 웃던 최은희는 그 길로 이철재 집 마루에 자리를 잡고는 담판을 벌여 한푼 빠짐없이 돌려받아왔다.
최은희는 “기회는 나는 새와 같은즉, 주저할 것 없다”는 이광수의 설득으로 일본에서 하던 공부를 접고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먹물화장에 남루한 옷을 입고 행랑어멈으로 변장, 인권없는 설움을 체험하고 그 기사를 3일간 연재하기도 했으며, 1926년 순종의 장례식이 계기가 된 6월 사건에 관한 특종을 따내 ‘신문계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고, 비행사 아닌 사람으로 경성 상공을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남자 동료들과의 술자리가 있을 때면 반드시 자기 몫의 기생 한명을 곁에 두도록 했으면서도 새로운 패션유행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걸쳐보고 둘러보는 화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8년간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 등을 두루 거치고 나서 26살이 되던 해 결혼하면서 기자직을 그만두었다. 이어, 최초의 여성운동조직인 근우회 활동, 서울보건부인회와 대한부인회 등 여성계몽운동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비교적 고른 삶을 영위한다. 말년에는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를 집필하는데 ‘개화여성열전’이라는 부제처럼, 그와 동시대를 겪었고 격렬했으나 침묵의 땅 아래 묻힌 당대 여성 33인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월하의 맹서>에서 태어난 스타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1904∼33)
최초의 배우는 누굴까? 이에 대해서는 궁금해할밖에 도리가 없겠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최초의 ‘여배우’는 꼽을 수 있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나 <패왕별희>에서도 그렇듯 우리나라 역시 초창기 여자 역은 변성기 전 소년이 연기했다. 김소진이라는 여배우가 1917년 처음 여자 단역을 연기할 때만 해도 여자 주연 역은 소년이 연기했으며, 마호정은 악역과 조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까, 이월화에게 붙은 ‘최초 여배우’라는 수식은 이런 말을 사이에 숨기고 있다. ‘최초 (대중에게 깊숙이 각인된) 여배우.’
이월화에 대해서는 기사, 가십, 증언, 회고, 평문, 논문 등 수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신문기사조차도 당시 모든 가십의 중심이었던 이 여배우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고 보기 어려운 만큼, 기록의 풍요 속에서 이월화의 실체는 더욱 빈곤할 따름이다. 그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부모, 출생일, 본명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고아였다. ‘이정숙’, ‘홍소희’ 등 그의 본명으로 추측되는 이름만도 여럿이니 말이다.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이자 최초 여배우 이월화를 탄생시킨 영화 <월하의 맹서> 시사회가 서울 경성호텔에서 열렸다. 사뭇 비장함을 풍기는, 혹은 <월하의 공동묘지>의 한 맺힌 공포를 연상케 하는 제목과 달리 영화는 ‘푼돈을 여투어 성실히 살겠다’는 맹서를 담은 계몽영화였다. 비록 극장 개봉도 아니고 지방 공공기관을 돌면서 상영되었지만 이 영화로 이월화는 최초의 스타가 된다. 이어, 동경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해 결성한 토월회의 한 멤버로 무대에 선다. 신극은 신파극이 아닌 리얼리즘극을 지칭하는 것으로 스타 여배우 이월화는 <부활> <사랑과 죽음> <카르멘> 등 초창기 토월회 작품이 성공하도록 하는 주역이 됐으며 <부활>을 통해서는 ‘조선의 카추사’라는 애칭도 얻는다. 만인의 사랑과 젊고 지적인 연극인들의 열정에 둘러싸인 이월화는 토월회의 창립자인 박승희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거절당한다. 이때부터 이월화 인생의 새로운 막, ‘방황’이 시작된다.
1927년 1월4일자 <조선일보>에는 ‘말썽 많든 여배우 이월화-명성 울리던 토월회 여우, 극단 떠나서 기생생활’이란 제목의 기사가 난다. 대중의 시야 밖으로 벗어난 이월화에 대해서는 갖은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둥 음독자살 했다는 둥 댄서가 됐다는 둥 누구 씨와 결혼했다는 둥 연극무대로 컴백했다는 등등. 결국 1933년 7월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이월화의 주검 앞에서야 잠잠해진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조국을 위해 폭탄을 던진 어머니
폭탄 테러리스트 안경신(1894(?)∼?)
1962년 3·1절 기념,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했다. 수여자는 ‘안경신’. 그러나 그 훈장을 받을 사람도, 받아서 전할 사람도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찌 살았고 어찌 죽었는지 묘연한 그는, 영웅담 너머로 홀연히 증발해버린 여걸이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교회 일에 매달려온 평양의 어린 청상과부는 3·1운동을 기점으로 열렬한 독립운동가가 된다. 이때 만난 독립운동가 김행일과 부부의 연을 약속하고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떠나는데, 김행일이 처자식이 있음에도 홀몸이라고 속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안경신은 그를 떠나 만주로 돌아나온다. 이때, 안경신은 이미 김행일의 아이를 배태한 몸이었으나 광복군 총영이 힘쓰고 있던 국내외 일본기관 파괴에 동참한다.
안경신은 문일민, 김영철 등 4명의 일행과 함께 국내로 들어가 행동할 것을 명령받고 폭탄 심지를 몸에 지닌 채 변장,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한다. 일행 중 홀로 여자인데다 임부였지만 그는 이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밤낮을 숨어 산길을 타고, 맹수와 싸우고, 독사를 만나 길을 에워 피하고, 동굴 속에서 밤을 지새면서 평양에 도착했고, 목표인 평양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두개의 폭탄은 모두 불발이었다. 일행 5명은 다시 만나 목선 하나를 사서 타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는 멀미를 견디지 못해 홀로 배에서 내려 은신한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평양, 함흥, 원산 등지를 전전하다 결국 1921년 체포된다. 젖먹이 어린아이와 함께 경찰서의 냉랭한 마룻바닥에서 고문을 당해야 했고 결국 한국 여자로서는 ‘최초’로 사형언도를 받는다.
한 소년의 증언 번복으로 다행히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으며 6∼7년 만에 가석방됐다.
시린 감옥바닥에서 어린 젖먹이가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떼는 것을 보면서 안경신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출옥 뒤 농부와 초야에 묻혀 산다는 소문이 있을 뿐 그의 지인들도 그를 만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