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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1960년대를 위하여

최근 CJ-CGV가 발표한 2005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자료를 보니 올해 극장관객수는 1억4천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올 상반기엔 관객수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지표가 나왔으나 하반기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호조를 보이면서 영화시장이 9년 연속 성장을 멈추지 않게 됐다고 이 자료는 덧붙였다. 산업의 흐름에 관심있는 관계자들이라면 이런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성장폭이 줄고 있다는 점을 우려할 수 있겠으나 크게 봐서 한국영화산업은 아직 괜찮아 보인다. 새삼스럽게 한국영화산업이 호황이라는 걸 강조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관심을 끈 것은 최근 30년간 최고라는 올해 극장관객수가 역대 관객수 기록에선 고작 7번째라는 사실이다. 1969, 1968, 1970, 1967, 1966, 1971년 관객수가 1억4천만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얘기다. 요즘 관객 가운데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가 196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때가 지금보다 호황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호 특집기사에서 <씨네21>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는 올해의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1968년작 <휴일>을 들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영화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결과다. 그들은 <휴일>을 볼 수 있음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름이 이만희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잊혀진 전통을 발견한 이 짜릿한 희열이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것일 이유는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서 관객과 옛 한국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혀주길 기대해본다.

<휴일>

관객수 통계와 <휴일>의 예로 확인하듯 1960년대 한국영화의 실체는 아직 드러난 것보다 알려져야 할 것이 더 많다. 군사정권 시절에 생긴 단절이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백이 안타까운 이유는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그들의 전통을 화려한 신화로 포장해 반복 재생산하는 걸 보노라면 한국영화가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기 할리우드를 무대로 삼은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제는 60년대 충무로에 관한 한국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씨네21>이 출판하는 김수용 감독의 회고록 <나의 사랑, 씨네마>을 읽으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문예영화를 연출한 이 노감독의 글은 대단히 영화적이다. 일례로 이만희 감독의 영결식을 묘사한 글을 보자. “나는 어린 유자녀들을 보니 목이 메어 조사를 읽을 수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마이크 앞에서 입을 뗄 때였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우르르 지하 다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20분 후 다시 마이크 앞에 섰지만 어쩐지 슬픔은 가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두루마리 조사를 움켜쥐고 즉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 씨네마>는 사료적 가치 못지않게 드라마로서 흥미진진하다.

1960년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이것은 호황의 절정을 맞은 한국영화가 기꺼이 맡아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여기엔 <씨네21>이 맡아야 할 몫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 씨네마>의 출간처럼). 피터 잭슨이 1933년 원작영화를 보고 감독의 꿈을 키워 지금의 <킹콩>을 만든 것 같은 일이 한국영화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에게 이만희의 <휴일>을 보여달라. 그러면 진짜 멋진 영화를 만들겠다, 고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고 있는 듯도 하다.

PS. 이번주부터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필진에 최보은씨를 대신해 여성학자로 널리 알려진 정희진씨가 합류했다. 남성중심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을 기대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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