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17일, 영국 맨체스터. 프리 트레이드 홀은 록을 공연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이 무대는 매우 고색창연했으며, 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공연하는 곳이었다. 영국을 순회공연 중이었던 밥 딜런은 그날 일부와 이부로 나누어서 공연하였다. 일부에는 밥 딜런 혼자 무대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무대에서 그의 잘 알려진 일곱곡을 불렀다. 하지만 그 곡들은 (정규 앨범에 실린 적이 없는 싱글 <네 번째 즈음>(Fourth time around)을 제외하고) 모두 그의 (다섯 번째 음반인) <그 모든 걸 집에 데려다주세요>(Bringing it all back home)과 (여섯 번째 음반인) <다시 찾아본 고속도로 61번가>(Highway 61 revisited)에 있는 노래들이었다. 일부는 <여보게, 탬버린 치는 이여>(Mr. Tambourine man)로 끝났다. 그런 다음 이부에서 밥 딜런은 로비 로버트슨(기타), 릭 댕코(베이스), 가스 허드슨(오르간), 리처드 마뉴엘(피아노), 미키 존스(드럼)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객석은 술렁거렸다. 요란스러운 밴드 연주와 함께 첫곡은 <내게 말해줘요>(Tell me, Momma)로 시작되었다. 일부 관객은 퇴장하였고, 일부는 야유의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나간 관객은 밥 딜런을 사기꾼이라고 불렀고, 일부는 (경멸스러운 의미에서) 불쌍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밥 딜런과 그의 밴드는 연주를 계속했다. 화가 난 밥 딜런은 여섯 번째 곡인 <홀쭉이의 발라드>(Ballad of a thin man)를 연주할 때 피아노를 부술 듯이 내려치면서 연주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일어나 전기기타를 들었다. 그때 객석에서 누군가가 밥 딜런을 향해 외쳤다.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 밥 딜런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난 당신(의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런 다음 그날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이다.
전쟁이 되어버린 공연
이 라이브 공연은 록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연이 되었다. 지미 핸드릭스가 전기기타를 불태워버린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공연보다도,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UC버클리 공연에서 갑자기 바지를 벗고 노래 부르면서 자위행위를 한 공연보다도, 제리 가르시아가 1969년 2월27일 필모어 이스트에서 마약을 빨면서 23분15초 동안 <다크 스타>(Dark Star)를 연주한 것보다도, (그룹 후의) 피트 타운센드가 <나의 세대>( My Generation)를 부르다가 기타를 앰프에 때려 부순 것보다, (이 목록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로큰롤의 역사는 결국 라이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더 유명한 라이브가 되었다. 이 공연을 (아마도 대중음악비평의 로저 에버트라고 할 만한) 데이브 마시는 “이건 공연이 아니었다. 이건 전쟁이다”라고 그냥 외마디 비명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 이 공연을 소개할 때마다 모두들 이 말을 인용하였다. 이 라이브 공연은 오랫동안 해적음반으로만 (일종의 전설처럼) 돌아다녔으며, 1998년에야 비로소 일련의 밥 딜런 비공식 녹음과 라이브를 모으는 프로젝트인 ‘(공식) 해적음반’ 시리즈 중 네 번째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그 음반의 속지를 쓴 토니 글러버는 이 라이브 공연이 1913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극 <봄의 축제>, 1922년 이사도라 던컨이 보스턴에서 공연 중 유방을 드러내놓고 가진 무대, 1935년 앙토냉 아르토가 파리의 무대에 올린 잔혹극 <첸치 일가>에도 비견할 만한 20세기의 ‘라이브’ 사건이라고 그의 글을 시작하였다. 나는 이 말이 조금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라이브 공연의 녹음은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공연은 오랫동안 런던 로열 앨버트 홀 라이브로 잘못 알려졌었다. 그러나 런던 공연은 맨체스터로부터 열흘 뒤에 있었다) 대부분의 라이브는 박수와 열기, 흥분과 기쁨에 넘치지만 이 라이브는 저주와 증오, 경멸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나는 이 공연의 녹음이 남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록 필름이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 그러므로 이 공연이 담겨 있는 다큐멘터리를, 그것도 마틴 스코시즈가 만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밥 딜런의 아주 오랜 팬이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밥 딜런을 처음 들었고, 그 즉시 그의 팬클럽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말하자면 나는 밥 딜런이 비틀스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취향의 문제이다) 나는 밥 딜런을 김민기, 양병집, 한대수, 양희은보다 먼저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음반을 듣게 되었을 때 ‘짝퉁’이라고 그냥 결정해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성급한 생각이었다) 나는 밥 딜런의 음반을 모두 갖고 있으며, 지금도 그의 신보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관에서 개봉하지 않고 지난주에 DVD로 출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틴 스코시즈의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 밥 딜런>(No Direction Home, Bob Dylan)(번역을 난감해하는 내게 ‘전영객잔’의 김소영 소저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없음> 정도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동의한다!)은 1966년 5월17일, 이 라이브가 지닌 의미를 모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이다. 만일 이 영화를 밥 딜런의 전기쯤으로 생각하면 크게 낭패할 것이다. 이 영화는 전기인 척하지만, 그런 지루한 목표를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1960년에 첫 앨범 <밥 딜런>(Bob Dylan)을 발표한 이후 아직도 활동 중인 밥 딜런의 기나긴 음악 여정 중 그에 관한 짧은 어린 시절의 소개 이후 거의 모든 내용은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 도착한 1959년 그해 겨울부터 1966년 7월29일까지만 다루고 있다. 밥 딜런이 우드스탁 근처에서 치명적인 모터사이클 사고로 일시적으로 잠적하게 되었던 바로 그날. 마틴 스코시즈는 영화 내내 조금도 친절하지 않으며, 영화는 밥 딜런과 1960년대 미국 쿠바 사태에서 베트남전에 이르는 시대의 그림자와 대중음악의 사조들을 이미 당신이 다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종횡무진으로 오간다. 말하자면 이 다큐멘터리는 거의 결사적인 밥 딜런 팬들, 혹은 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에 관한 연구자들, 음악의 길을 가고자 결심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보아야 할 영화이다. 이 영화는 무려 상영시간이 208분(말 그대로 3시간38분)이며, 만일 보려고 결심했다면 한자리에 앉아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편집은 눈부실 정도이다. 특히 존 F.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총에 맞는 순간을 재구성한 장면에서 밥 딜런의 <소낙비가 내려요>(A hard rain’s gonna fall>가 흐를 때 심금을 울린다.
<카지노> 이후 가장 훌륭한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
물론 마틴 스코시즈는 이 영화를 만들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마틴 스코시즈에게는 이미 이것이 그의 첫 번째 록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는 1969년 8월, 삼일간 열렸던 록페스티벌 <우드스탁>의 편집을 했었고, 그런 다음 더 밴드의 고별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라스트 월츠>를 연출했다(잘 알려진 것처럼 더 밴드는 밥 딜런의 백밴드로 시작하였다). 또한 MTV의 의뢰로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그리고 빔 벤더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이크 피기스, 찰스 버넷, 마크 레빈, 리처드 피어스와 함께 블루스 음악의 뿌리를 찾아가는 연작 <더 블루스>를 기획하고 그중 한편을 연출하였다. 두 번째, 마틴 스코시즈는 고다르와 함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고다르가 <영화사(들>)>에서 텍스트로서의 영화와 이미지로서의 역사 사이의 새로운 콜라주를 통해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기억 장치로 만들었다면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영화로 통과하는 개인적 여행>, 그리고 <나의 여행, 이탈리아영화>에서 역사를 영화라는 만화경 안으로 통과시켜 개인의 삶 안에서 다시 재구성하였다. 말하자면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은 그의 그러한 일련의 작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틴 스코시즈가 가장 잘하는 장르는 인물 전기영화들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권투 선수 제이크 라모타를 다룬 <분노의 주먹>(혹은 <성난 황소>), 마피아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낸 헨리 힐의 야비한 이야기 <좋은 친구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의 젊은 날의 고행과 박해의 수난사를 다룬 <쿤둔>, 라스베이거스의 호화찬란한 카지노를 무대로 한 샘 ‘에이스’ 로드스타인의 교활한 고백담 <카지노>, 영화에 미친 백만장자 하워드 휴스의 흥망성쇠를 담은 <애비에이터>에 이르기까지 마틴 스코시즈는 한 인물을 따라갈 때 언제나 그의 재능을 발휘한다. 마틴 스코시즈가 오슨 웰스의 계보에 선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영화적 재능은 <시민 케인>의 자장권 아래 놓여 있다. (내 생각에)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은 마틴 스코시즈의 <카지노> 이후 가장 좋은 영화이다.
마틴 스코시즈는 가끔 (지금의) 밥 딜런을 카메라 앞에 세워서 40년 전의 사건들에 대해 다시 질문한다. 혹은 조앤 바이에즈와 앨런 긴즈버그가 밥 딜런에 대해서 옛 추억을 더듬는다. 그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회고가 아니다. 그들은 종종 엇갈리는 진술을 하고, 마치 시민 케인처럼 밥 딜런은 점점 미스터리해지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오슨 웰스는 결국 썰매에서 장미봉오리를 찾았지만, 우리는 끝내 밥 딜런의 장미봉오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밥 딜런은 천재인가, 아니면 천재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시대에 분노를 느끼고 저항을 한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양심이 살아나 분노를 느꼈던 세대에 교활하게 편승하여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 것인가? 밥 딜런은 무대에서 가끔 등을 돌리고 그 자신의 사색에 빠진 것처럼 마치 관객이 없다는 듯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공연이 끝나고 난 다음 입장객 수를 꼭 묻곤 하였다.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끝난 다음에 밥 딜런은 조앤 바이에즈와 듀엣으로 인권을 위해서 저항 포크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밥 딜런은 곧 그녀를 배신한 다음 버렸다. 그녀는 그걸 지금도 아프게 기억하지만, 밥 딜런은 천연덕스럽게 내 뜻을 조앤 바이에즈가 이해할 거라고 대답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항상 기자들과 말싸움을 벌였다. 그것은 예술적 자존심인가, 아니면 스캔들을 노리는 제스처인가? 영화는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기는 장면. 기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지금 당신처럼 민중을 위해서 정치적인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몇명이나 되나요, 라고 묻는다. 밥 딜런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136명이요, 아니, 142명쯤 될걸요. 바보에게는 바보 같은 대답을.
라이브와 연대기, 두개의 시간을 동시진행
그러나 전기기타를 든 밥 딜런의 공연은 야유와 퇴장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의 예술적 결정은 그를 무대 위의 원숭이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밥 딜런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공연이 끝난 다음 푸념처럼 말한다. “야유가 너무 심해서 음정을 잡을 수가 없었어, 집중을 할 수 없으니까.” 그는 다 그만두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밥 딜런은 1966년 7월29일, 모터사이클 사고로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밥 딜런이 포크 가수로 성공한 다음 로큰롤을 선택하자 지옥으로 떨어진 과정을 따라가던 영화는 정확히 여기서 끝난다. 음반으로만 밥 딜런을 들었던 나는 이렇게까지 그 결정 ‘이후’가 끔찍한 무대의 연속이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마틴 스코시즈는 이 전쟁 같은 공연을 토막낸 다음 두개의 시간을 동시진행시킨다. 하나는 물론 라이브이고, 다른 하나는 밥 딜런이 어린 시절에서 이 공연장에 도착하기까지의 연대기이다. 밥 딜런의 청춘의 결론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저항인 로큰롤이고, 그것이 무자비한 돈과 교활한 인기 순위의 아첨과 변덕스러운 팬들이 넘쳐나는 대중음악 산업에서 그 자신의 선택을 통해 예술가로 버티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지식인들이 예술 대신 문화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가짜 분신으로 대체한 다음 대중에게 굴복하는 우리 시대의 사기라고 말한다. 밥 딜런은 그 자신의 선택을 위해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대중과도, 그를 사랑하는 팬들과도, 그를 존경하는 동료들과도, 심지어 그 자신의 출발과도 결별하였다. 이것은 그 선택의 처참한 기록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밥 딜런이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 우드스탁의 고속도로를 어느 눈 내리는 날 쓸쓸히 달려가면서 끝난다. 마틴 스코시즈는 여기서 자기 방식으로 어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낸다.
후일담. 밥 딜런은 우드스탁에서의 사고 이후 1년 반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그리고 이후 8년 동안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과 마지막까지 함께 공연을 한 더 밴드와 빅 핑크 지하실에서 마치 은둔한 것처럼 홈 레코딩 방식으로 녹음작업을 하였다. 이 녹음은 소문으로만 알려지다가 1975년에 일부 발췌하여 <지하실의 테입들>(Basement Tapes)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1967년 12월27일부터 삼일간 뉴욕의 컬럼비아스튜디오로 말없이 돌아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세명의 아마추어 세션맨들과 함께 그의 여덟 번째 음반 <존 웨즐리 하딩>(John Wesley Harding)을 녹음하였다. 이 음반은 매우 짧지만 아름다운 가사 말로 이루어진 12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 찬 컨트리 앨범은 달리 없을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꿈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한 마틴 루터 킹은 총에 맞아 죽었다. 크리스마스는 막 지났고, 아직 새해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해 마틴 스코시즈는 그의 첫 번째 영화 <빅 쉐이브>와 장편영화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를 만들었다.
한 가지 더. 내가 이 DVD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가사를 단 한번도 번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밥 딜런의 영어 가사를 무슨 재주로 그냥 귀로 들어서 다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