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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변하는 남자, 진화를 꿈꾸는 배우, <왕의 남자>의 감우성
사진 이혜정김현정 2005-12-06

2년 전에 만났던 감우성은 마르고 검은 얼굴에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다. 얼마 뒤에 미루어지기는 했지만 전쟁호러 <알포인트>의 촬영을 준비해두었던 탓이었고, 먼저 도착해 있던 그를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도 약속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지하 바에 도착한 감우성은 웨이브진 머리카락의 그늘 아래에서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솟아오른,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기가 어려운 배우의 모습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남자다움이란 군인에 더 가까울 텐데도 지금 이 순간 감우성은 이전보다 남자다웠다. 얼마 전까지 권세가 두렵다 하여 몸을 꺾지는 못했던 사내를 연기했던 탓일까.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드라마가 지워준 이미지의 굴레를 수정하기 시작한 그는 몇년 사이 마치 성장기의 소년처럼 몇번이고 달라져왔던 것이다. 어두운 실내, 셔터 소리가 울릴 정도의 정적. 빼곡하게 러플이 달린 셔츠와 동그라미가 이어진 스카프를 이상해하면서도 기나긴 촬영에 열심히 응해주었던 그가 전날 밤의 숙취를 채 털지 못한 상태였다는 걸 안 건,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천하게 태어난 광대 장생은 놀이판에서만은 왕이 부럽지 않은 사내다. 천하가 왕을 비웃기에 자신 또한 왕을 비웃어 장안의 엽전을 긁어모으는 그는 고운 외모 탓에 이 양반 저 양반에게로 팔려다니는 친구 광대 공길의 옷깃을 붙들며 부끄러움 없이 일갈한다. “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팔아?” 감우성은 <왕의 남자> 초반부의 그 한마디를 읽고선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중신과 후궁을 희롱하며,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연산군의 광기에 휩쓸려가는 광대 장생과 공길. 시나리오를 읽었더니, 거기엔 나오지 않는 그들 질기고도 두터운 인연의 지난날들이 보이더라며,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싶었다고. 개봉을 앞둔 배우에게 들으면 이 땅에 좋지 않은 시나리오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우성은 자신이 찍은 영화이더라도 빈말로 칭찬할 줄 모르고, 감독과 동료들에게도 공치사는 내주지 않는다. 형틀에 묶인 채 바른말을 내뱉는 장생처럼.

연극 <이>를 각색한 <왕의 남자>는 연산군 시대에 궁중광대가 있었다는 짧은 사록에 착안한 영화다. 넉살좋게 잘 노는 광대 장생과 가녀리지만 꿋꿋한 그의 친구 공길, 공길에게 빠지고만 임금 연산.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은 오래전에 장혁을 장생으로 캐스팅했었고 병역기피자 수사 파동에 장혁이 입대하면서 새로운 배우를 찾게 되었다. 이미 언론에도 보도됐던 사실이기에 감우성은 자신이 대체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고, 게다가 사극이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그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영화는 내 뜻대로만 되는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니까, 총체적인 의미로, 많이 편해졌다. 전에는 부담과 강박이 컸고 예민했다. 그런데 연기가 욕심을 낸다고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운이 따라야 하고. 그리고 선택하기 전에는 고민고민하다가도 과감하게 결정해버리는 면도 있다. 땜빵인 것 같았지만, 그런 자존심으로 거절하기엔 너무 좋은 대본이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게 운명 아니겠는가.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일이 생기면 훨씬 기쁜 법이다.” 그렇게 감우성은 검게 탄 얼굴로 놀이판을 따라 떠도는 천민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조선 최초의 궁중광대란 연기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한 가닥 밧줄 위에서 뛰어놀아야 하고, 세상을 웃기고 울리는 소리를 토해야 하며, 바람개비처럼 몸을 놀리며 재주를 넘어야 한다.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선입견에 더해 얼굴과 몸이 두루 섬세한 감우성이 어찌 그런 난제를 감당했을까 싶었다.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고 실제는… (웃음)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르다. 나는 감성이 좀더 발달한 것 같고, 몸쓰는 일에도 능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는 거칠게 놀았다. 옥상 난간을 걷거나 건물 사이를 뛰어다녔고, 창문을 붙잡고 다른 창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팔이 부러진 적도 있다.” 몸이 약해 집 부근 쿵후 도장에 다녔던 그는 일취월장해서 사범과 대련까지 하다가 무릎을 다쳐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날렵했던 태가 위태로운 줄을 밟고 연산을 조롱하는 장생의 호방한 자태에서, 어렴풋이 묻어나나보다.

그러나 생전처음 전통 유희와 가락을 익히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만만하게 보았던 꽹과리도 판을 리드하는 악기이기에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불볕더위에 겹겹이 한복을 두르고 신명을 연기했던 기억 또한 고생이었다. 왜 고생을 자처했는지, 바보처럼 묻기 전에, 감우성은 먼저 답을 주었다. “나는 언제나 변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진화다. 생태계에 맞게끔 진화하고 싶다. 오늘도 자나보다, 내일은 일어나면 일하러 가겠구나, 그런 것에 대한 물음표를 달고 살아가는데 그런 의외성이 없다면 인생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감우성은 도전한다는 의미가 더욱 큰, 사내의 물건을 잘못 타고났는지 계집 같기만한 공길을 탐내기도 했었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뜬눈을 감고 지팡이를 허우적대며 맹인을 연기하는 장생은 현대로 치자면 배우이기도 하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옥을 지키는 병사에게, 이제야 진짜로 놀아볼 수 있는 데라며 광대의 한을 읊는. 감우성은 장생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광대가 무엇을 알겠는가. 장생은 먹고살아야 하는데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있을 수 없는 경험을 하기는 해도, 단순무식하게 살고 있는 인물일 뿐이다. 이게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과 후에는 생각이 많아도 영화를 찍는 순간만은 그 생각들을 접고 그저 일을 한다고 했다. 장생 또한 반군이 궁궐문을 부수고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들어와도, 다시 태어나면 광대가 되겠다는, 서글프고도 기세등등한 고함을 내지른다. 천한 광대가 어찌하여 희락원이라는 거처를 얻고 뛰어노는 마당을 잃었는지 접어둔다.

마음맞는 이들과의 즐거웠던 촬영을 마친 그는 이제 또 한번 의외의 선택으로 접어들었다. <하루> <고스트 맘마>의 한지승 감독이 연출하는 드라마 <연애시대>. 드라마와 멜로와 일본 원작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과감하게도 “에이, 한번 해봅시다”라고 결정해버려, 이혼한 부부의 멜로를 하게 되었다. “운명이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아르미안의 네딸들>의 경구처럼 감우성은 그 다음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무언가 변해가는 진화의 과정을 겪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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