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출발점은 개인에게 있어야 한다
이처럼 마스무라의 영화들에서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눌린 삶의 부조리함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사회 문제를 다루는 (리얼리즘) 영화감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이란 환경이 낳은 비극적 운명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체념의 상태로 더욱 몰고 갈 뿐이라며 그런 유의 영화들을 거부했다. 그것들의 기저에 놓인 믿음과 달리 마스무라는 환경이 아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출발점 역시 개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시스템에 대한 마스무라의 반발은 아마도 짓밟힌 개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0년대 초반에 그는 로마의 영화실험센터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체험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는 (아름답고 강한) ‘인간의 발견’을 꼽는다. “박물관에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힘을 체현한 회화와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에는 당당한 시선, 확신에 찬 걸음걸이, 생기있는 행동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유럽에서 ‘인간’은 살아 있었다.” 그때 본 바로 그 ‘인간’을 일본영화라는 틀 안에서 살려내겠다는 것이 영화감독 마스무라가 자신에게 부여했던 가장 중요한 소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집단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일본영화와 일본사회에 대해 벌이는 마스무라의 (영화적) 반역의 몸짓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일본인 내부의 욕망을 밖으로 분출시키다
마스무라는 비록 일본인들이 억제와 체념과 순응의 정서 안에 갇혀 있지만 그들의 내부 깊숙한 곳에는 분출을 기다리는 어떤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에너지를 기꺼이 밖으로 꺼내서는 욕망에 귀기울이고 삶의 의지를 따르는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들을 영화 속에 그려냈다. “마스무라의 영화란 어떤 지랄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자유와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이런 태도를 가짐으로써 생기는 결과에 대한 것”이라고 마크 페런슨이란 평자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마스무라는 종종 영화 속 ‘개인’들을 정상성을 넘어서는 영역에까지 데려갔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개성과 의지)이 사회와 빚는 마찰을 좀더 날카로운 것으로 만들어냈다. 자신을 괴롭히는 나이 많은 남편을 죽이고는 사회의 비난 어린 시선을 견뎌가며 젊은 남자와의 사랑을 꽃피우려는 <아내는 고백한다>의 아야코는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창의적으로 선정적이면서 난폭하게 아름다운 영화 <눈 먼 짐승>(1969)에 이르면 어둠 속에 쌓인 ‘촉각의 세계’에서 감각의 쾌락을 탐닉하다가 결국에는 사지절단을 통해 궁극의 엑스터시에 도달하는 여인도 볼 수 있다(마스무라의 영화들은 이처럼 종종 극으로 치닫는 욕망을 육체의 훼손과 관련지어 표현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마련해준다. <문신>(1966)이나 <세이사쿠의 아내>는 그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영화들이다).
이처럼 마스무라의 영화들에는 시스템에의 편입을 거부하면서까지 욕망을 향해 과감하게 돌진하는 인물들이 나오곤 하는데 그들은 대개 여성인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감히 ‘마스무라의 뮤즈’라 부를 수 있는 와카오 아야코가 주로 연기하는) 정열과 의지와 본능의 보유자들인 마스무라의 여인들은 확실히 이마무라 쇼헤이의 여인들과 유사한 데가 있다. 그럼에도 미묘한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무엇보다 어떻게든 산다는 것에 가치를 두는 여인들(이마무라)과 욕망을 위해서는 삶을 포기할 수도 있는 존재들(마스무라) 사이의 구분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소노코의 얼굴을 포착하는 <만지>의 마지막 장면은 그걸 예증해준다. 여자 연인 그리고 자신의 남편과 함께 3인의 동반자살을 감행했다가 홀로 살아남은 그녀의 얼굴에는 욕망을 철저히 따르지 못한, 혹은 운명에 의해 그러기를 부정당한 자의 안타까운 회한이 새겨져 있다. 마스무라의 여인들은 정염의 추구가 공허한 삶의 영위보다 우위에 있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미처 발굴되지 못한 음울한 시네아스트
발언들과 영화들을 통해 드러나는 마스무라는 분명히 개인과 자유라는 가치를 (그것도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주창한 인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어울리는 입지 위에 서 있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오시마를 비롯한 누벨바그 세대는 물론이고 스승인 이치가와마저 스튜디오를 등지던 때에, 그는 다이에이가 도산한 71년까지 1년에 서너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스튜디오의 감독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마스무라는 ‘작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초기 영화들에 그토록 열광했던 오시마조차도 일찍이 관심을 거둬버린(미시마 유키오가 주연한 야쿠자 영화 <바람의 사내>(1960)가 그 시발점이었다) 이 영화감독이 일본에서 폭넓은 관심의 영역 안으로 진입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마스무라가 세상을 뜬 지도 15년이나 지난 다음에야 방대한 회고전이 열렸고 그걸 계기로 그는 아오야마 신지 같은 젊은 세대로부터 “전후 일본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으로 간주되기에 이른 것이다. 마스무라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마스무라의 영화가 오늘날의 시점에서 봐도 여전히 위반적(transgressive)이라며 더 많은 발굴의 여지가 있는 시네아스트라고 썼다. 우리에겐 완전히 어둠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그의 영화가 이제 우리에 의해서도 ‘발견’될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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