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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누벨바그의 반항아,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 [1]
홍성남(평론가) 2005-11-18

일본 영화계의 대표적인 반항아 오시마 나기사조차 “와, 당신 반항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라고 감탄하게 만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스무라 야스조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일본영화의 전통을 맹렬하게 거부한 일본 누벨바그의 대표적 악동이다. 그의 영화세계는 팽팽한 속도감, 우여곡절 많은 스토리 그리고 개인과 자유를 중시한 점 등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욕망 추구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여, 욕망의 예술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이렇듯 에너지 넘치는 영화들을 무수히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에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11월21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 상영회는 최근에야 일본 영화계의 뒤늦은 주목을 받은 음울한 거장,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호기가 되어줄 것이다.

한창때의 혈기방장한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영화 전체에 대한 증오심을 거론할 때 거기에는 자기 영화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다소 과격한 농담을 섞어 이야기하곤 했다. 그만큼 기존의 화석화된 형식과 아름다움과 정서에 포박되어 있는 일본영화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오시마가 자신과 공유할 수 있는 태도를 본 것은 자기보다 약간 앞선 세대의 한 영화감독에게서였다. 가혹한 소비사회에서 숨찬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그린 마스무라 야스조의 <거인과 완구>(1958)를 보고 나서 오시마는 “일본영화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와 서정성에 등을 돌리는” 감독의 태도를 상찬했다. 사실 오시마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데뷔작에서도 이미 새로운 기운을 감지한 터였다. 막막한 세상 속을 뚫고 달리는 청춘들의 활력에 대한 영화인 <입맞춤>을 본 뒤에 그는 이제 새로운 세대의 물결이 일본영화에서 거역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고 썼던 것이다. 초기의 마스무라 영화들에서, 젊은 날의 오시마는 이른바 ‘일본적인 것’, 예컨대 정제된 미의식이나 묵종의 태도처럼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그것을 거부하고 만들어진 영화, 그래서 새로울 수 있는 영화를 직접 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마스무라는 오시마(와 같은 세대 감독들)에게 중요한 영화적 모델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전통을 거부한 일본 누벨바그의 반항아

<아내는 고백한다>

일본 영화사 내에서의 마스무라라는 존재는 60년대 초에 발흥한 누벨바그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런 한편 그 세대 감독들과 함께 미묘하게 상이한 방식으로 유사한 주제들을 공유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던 영화감독으로 먼저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뒤를 이을 세대와 교감할 수 있는 (부정)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이에이(大暎)에 입사해 영화 경력을 시작한 마스무라는 감독 지위에 오르기 전에 우선 미조구치 겐지와 이치가와 곤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는 미조구치에게서는 꽤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언젠가 이치가와의 연출 방식에 대한 글을 써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지만 이 대가들이 결코 자신의 모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하나의 전통을 형성해온 ‘일본영화’라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거부의 대상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바는, 인간성이니 생의 풍취니 또는 운명론이니 하는 안이한 관념을 기반 삼아 만들어지고 그럼으로써 일본영화와 일본사회의 가능성을 옥죄는 ‘일본영화’의 전통을 아예 파괴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내는 고백한다>(1961)에서 암벽 등반 도중 로프를 잘라 나이 많은 남편을 죽이고야 마는 주인공 아야코에게서 앞세대와 단절을 꾀하는 마스무라가 겹쳐 보이기도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속도감을 중시한 냉소적인 스토리텔러

직접 자신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실제로 마스무라가 혁파해버리려 한 일본영화의 유산으로는 특유의 느린 시간감각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른바 ‘동양적인 시간감’이란 일본영화가 갖고 있던 전근대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그것에 반대해 ‘스피드’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느긋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어떤 정점 이후까지 오래도록 지켜보는 것은 절대로 마스무라의 방식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드라마나 상황이 절정에 올랐을 때나 또는 완전한 종결을 보기 이전에 호흡을 끊어버리는 식으로 숏이나 신들을 구축해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속도감과 활력을 내포한 단위들을 영화의 자재로서 갖게 되었던 것인데, 그것들을 가지고 늘어짐 없이 팽팽한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내는 데에서도 속도감에 대한 그의 강조는 상실되지 않았다. 일종의 휴지부 같은 것 없이 진행로만을 바라보는 듯한 마스무라의 영화들은 그렇지 않아도 대개 90분 내외 정도인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보다 짧은 심리적 시간을 느끼게 하는 밀도있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법정과 그 밖의 공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아야코의 유죄 여부와 그녀의 정열의 근원을 돌진하듯 파고드는 <아내는 고백한다>나 산업 스파이의 세계 안에서 쉴새없이 다양한 이야기의 굴곡을 만들어가며 진행되는 <검정 테스트 카>(1962) 같은 영화들이 그 훌륭한 실례들을 제공해준다.

<검정 테스트카>

이쯤에서 알 수 있듯이, 마스무라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혹은 시인이 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서, 온전히 스토리텔러의 면모를 내세운 영화작가였다. 분명 속도감에 대한 강조는 자신의 인물들을 아취를 가진 평정(平靜)의 삶으로부터 끌고 나와 여기저기 굴곡들이 많은 거친 삶 속에 집어넣으려는 태도와 어울리는 것이었다(여기서 <만지>(1964) 같은 영화에 재료를 제공해준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마스무라의 애착은 아무래도 욕망의 문제에 대한 공통적 관심에서만 유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한때, 시적 영탄이 스며든 소설을 주장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의 논쟁에서 우여곡절이 많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내세웠던 이가 다니자키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 속에서 마스무라는 종종 비판의 눈을 가진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를 노정하곤 했다. 가혹하고 무표정한 ‘시스템’은 그의 영화들 속에서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거인과 완구>나 <검정 테스트 카> 같은 영화들에서 마스무라는 사람들을 초라하고 비열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환멸을 주는 것인가를 거침없이 그려냈다. <검정 테스트 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남녀를 치어버릴 듯 미친 속도로 달리는 스포츠카로 가시화되는 시스템은 그 안에서 생존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끝없이 배신과 협박과 폭력을 강요하는 포악한 것이라고 그 영화들은 말한다. <야쿠자 군대>(1965)나 <나카노 스파이 학교>(1966)처럼 이보다 엔터테인먼트로의 지향이 강한 영화들에서도 이상을 앞세우고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시스템에 대한 마스무라의 냉소적인 시선은 여전히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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