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운드, 하면 떠오르는 영화 두편이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과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둘 다 영화 사운드를 만드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필사의 추적>에서 존 트래볼타는 소리를 채집하던 중에 살인사건을 목격한다. 아니, 목격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다. 살인현장을 눈으로 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총성을 들었고 그 소리를 녹음했을 뿐이다. 총성만 없었다면 평범한 자동차 추락사고로 보였을 사건은 이제 거대한 미스터리가 된다. 뒤이어 사건 현장을 찍은 연속 사진이 발견되고 존 트래볼타는 자신이 녹음한 소리와 연속 사진을 이어붙인다. 그리하여 사건 현장은 마치 영화로 찍은 것처럼 온전히 살아난다. 이는 영화란 무엇인가, 란 질문에 대한 드 팔마식 답변이다. 영화란 개별 요소들이고 퍼즐조각이다.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아무 일도 아닌 것도 되고, 살인사건이 되기도 한다. 그는 퍼즐조각을 흐트러트린 다음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출 때까지 우리의 궁금증을 붙잡아둔다. 주인공 외에 아무도 듣지 못한 어떤 소리에서 비롯된 영화는 주인공의 악몽이 될 끔찍한 비명소리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영화는 보는 것이자 듣는 것이며 둘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그럴듯한 현실이라는 점을 <필사의 추적>만큼 잘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다.
<필사의 추적>의 사운드가 미궁의 입구라면 <봄날은 간다>의 사운드는 무드를 위한 전주곡이다. 대숲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고요한 산사에 눈 내리는 소리, 노부부가 부르는 노동요 등 영화가 제시하는 소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 누구라도 손을 맞잡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봄날은 간다>의 소리가 연애의 배경음악에 그치는 건 아니다. 영화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좋은 소리를 내는 것들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진 못한다고 말한다. 산사에 눈이 내리는 소리를 여름에 듣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다. 마지막 장면 상우가 듣는 갈대밭 소리는 그가 전에 듣던 소리가 아니다. 누구도 소리를 붙잡을 수 없듯 사랑도 영원할 수 없다. 그저 녹음을 하거나 영화로 재현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사운드는 영화의 주제와 공명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사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지만 일반인의 주목을 받긴 쉽지 않다. 대부분 <스타워즈>의 광선검이 내는 소리나 <쥬라기 공원>의 공룡 울부짖음처럼 획기적인 사운드가 나와야 주목하는 정도다. 한국영화의 상황은 더 나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에도 사운드 작업이라는 외로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기술수준이 낙후됐던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건 기술인력의 잘못이라기보다 영화제작 마인드의 문제라고 봐야 옳다. 벼락치기로 일관하던 후반작업에 공을 들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영화 사운드 분야에서도 중요한 것은 감독의 상상력일 것이다. 이번 특집 기사를 보면 임권택 감독은 <춘향뎐>을 만들 때 자연의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기를 바랐다고 하고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에서 벌 한 마리가 아파하는 소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흔히 영화는 카메라로 찍으면 끝나는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운드 작업에서도 무수한 창작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특집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영화제작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놓치기 쉽지만 창작의 비밀은 언제나 이런 데 숨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