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감독 윤종빈의 대학 졸업작품이자 첫 장편영화인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다. 군대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영화의 소재가 될 때 그것이 대중 장르영화로 구현될 가능성은 아주 적다. 물론 한국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라면 이 말은 틀린 표현이다. <어 퓨 굿 맨>처럼 잘 다듬어진 법정드라마의 한 꼬투리로 발전할 수도 있고, <풀 메탈 자켓>처럼 전쟁영화라는 큰 장르 안에서 지옥의 한 단면을 그려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군대라는 곳이 쉽게 현실로 인지되지 않을 만큼 장르적 재현 가능성의 영토로 남아 있거나, 소수의 특별한 경험으로 치부될 만큼 독특한 자리라고 여겨질 때 가능하다. 여기 한국에서의 의미 부여는 다르다. 그리고 윤종빈이 이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그 의미 부여는 군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한국영화들과도 다르다(이해를 돕기 위해 단적으로 쓰자면, 김기덕의 <해안선>).
즉,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는 가장 일반화되어 있는 경험과 이야기의 소재로서 여기 존재한다. 일반화된 것이니 특별할 것 없다고 치부되어 사회적 묵인에 이른, 혹은 의도적으로 가벼운 잡담이 되어버린 그 기억의 결기를 윤종빈은 있는 그대로의 가능성 자체로 되살려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회가 강권하는 망각의 종용을 떨치고, 개개인의 불온한 죄의식으로 남아 있는 마음의 채무를 부득불 셈하고자 한다.
승영(서장원)은 신병이다. 이제 막 이병을 달고 소속 부대에 배치받는다. 태정(하정우)은 고참이다. 병장을 달고 부대를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무반의 대소사를 벗어던질 만큼 군대의 생리를 벗어나 있지는 못하다. 승영은 태정의 소대에 배치되고, 그 둘은 공교롭게도 중학교 동창이다. 이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영화는 고참이 되어 휴가를 나온 승영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승영은 이미 제대한 태정에게 전화를 걸어 할 이야기가 있으니 꼭 한번 만나자고 청한다. 그리고 둘의 껄끄러운 만남이 성사된다. 여전히 군 복무 시절 무용담에 젖어 떠드는 태정과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계속 망설이는 승영. 그 사이에 그 둘의 군 시절이 또다시 플래시백으로 교차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두 시점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그렇다면 승영이 태정에게 하고 싶다던 말은 무엇일까? 승영이 고참에게 대들고, 그 일로 태정이 승영의 따귀를 때린 일이 기억 속에서 불려나온다. 태정은 그 일을 미안해한다. 그러나 승영은 그보다 다른 말을 덧붙여 하고 싶어한다. 승영의 후임병으로 들어온 지훈(윤종빈)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승영은 멍청하다고 구박받는 지훈의 처지를 감싸준다. 그러나 승영 역시 계급이 올라갈수록, 군대의 생리에 저항감을 잃는다. 친했던 승영과 지훈의 관계도 상명하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승영은 지금 태정에게 그 지훈에 대한 후일담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빌려 먼저 소개된 <용서받지 못한 자>는 평단과 영화제 관객의 공통된 호평을 이끌었다. 그 반응에 찬성할 만한 근거가 이 영화에는 충분히 있다. 우선 수준 미달의 충무로 코미디영화들보다 더 정확하게 웃음의 포인트를 끌어낼 줄 안다. 그런데 그 웃음은 다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군대에 관한 어떤 ‘전형성’을 최대한 살려내는 연출력에서 온다. 무명의 배우들에게서 뽑아낸 연기력도 그 결과 중 하나다(물론 그중에는 누구보다 더 능청스런 연기를 보여주는 감독 자신의 연기력이 가장 빛을 발한다. 감독 윤종빈은 지훈으로 출연한다). 거기에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진행되도록 세워진 구조는 의미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적절한 역할을 한다. 현재를 과거의 장악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는 의미적 구조, 한 인물을 양분하여 이중의 서사를 펼쳐내면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기능적 구조, 둘 모두를 능숙하게 수렴한다. 이를 통해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도약하면서 영화는 최종 목적지에 가닿는다. 이미 쉽게 예견할 수도 있는, 혹은 다소 과잉의 장치로 마련된 그 결론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잘 조립되어 있는 덕분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장점이 많은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장점만을 들어 상찬 일색으로 일관하는 것이 재능있는 신인감독을 진심으로 반기는 태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이를테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의도는 절실하지만, 방법은 위험천만한 영화다. 만약 어떤 깨뜨리기 힘든 견고한 전형의 집단이 있다고 치자. 그것을 내파해버리고자 할 때 어떤 방법이 필요해질 것인가? 이 영화에서 견고한 전형성이란 군대의 생리 자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전형성이 강제한 죄와 그로 인해 피어난 죄의식을 절실하게 발설하고, 숙고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대상의 실체에 접근할 것인가? 여기서 감독이 택한 방법은 묘사력을 동원하여 집단의 전형적 에피소드를 끌어모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웃음도 생겨난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영화 스스로가 추구한 가치를 다시 일반적인 전형의 시각으로 소환시킬 우려가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보고 관객이 승영과 태정보다 웃기는 병장 마수동을 더 각인하게 된다면, 그러고 끝난다면, 혹은 지훈의 슬픔보다 지훈의 외양과 어줍은 말투만 각인하게 된다면, 그러고 끝난다면, 영화는 과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의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대중성과 작가성을 동시에 쥐고 있는 데뷔작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건 영화적 섬광을 위해 더 골몰히 파고들지 않았다는 질타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 아쉬움에 대한 피력만큼 지금 이 영화에 꼭 필요한 응원의 말은 없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