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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매만진 소년의 성장기, <사랑해, 말순씨>
박혜명 2005-11-01

1980년대가 자신의 성장기였던 30대들은 칠흑 같던 그 시기에 대해 저마다 할 말을 가졌다. 누군가 대신해준다고 자신에게까지 씻김굿이 되진 않는다. 자기가 검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 박흥식 감독도 교복을 꺼내들었다. <사랑해, 말순씨>는 79년 박정희 사망에서 80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중1 소년 광호(이재응)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누구나 억압당하고 상처입었던 바로 그 시절의 이야기다.

예민한 성장기 아이는 많은 것을 기억한다. 꼭 광호 또래였던 감독이 90% 이상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만든 이 영화는 시대를 환기시키고 대변하는 은유와 디테일로 가득하다. 어릴 때 불발탄을 갖고 놀다 손가락을 잃은 태호(이한위)는 선생들에게 불량아로 낙인찍혔다. 이웃에 사는 다운증후군 환자 재명(강민휘)이는 동네 골목 어귀에 퍼질러진 똥 같은 존재다. 광호네 집에 셋방사는 은숙(윤진서)은 간호학원을 나왔으므로 죽어도 정식 간호사가 될 수 없는, 불우한 시골 처녀다. 폭압의 시대가 불구로 규정지은 그들은 그 부당한 논리에 의해 광호의 삶에서 하나씩 지워져간다.

광호 주변의 캐릭터들은 끝이 뾰족한 연필로 그린 인물 소묘 같다. 시대의 잔인함과 흉폭함에 대한 은유도 그래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그 시절의 성장’에 관한 디테일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님에도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전체를 이끄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디테일의 힘은 어떤 소실점을 향해 있지 않다. 광호는 초록 유니폼에 촌스런 화장을 하고 화장품 외판을 다니는 억척스러운 엄마(문소리)가 창피하다. <사랑해, 말순씨>는 광호가 그 엄마의 존재를 극복하는 순간에 성장의 대가 또한 마무리짓는다. 이야기의 출구가 다른 곳을 향함으로서 광호의 성장은 태호, 재명, 은숙 등이 대변하는 시대와의 관계 안에서도, 시공을 초월한 모자 관계 안에서도, 온전한 의미를 완성하지 못하고 만다.

<사랑해, 말순씨>는 섬세하게 매만진 소년의 성장기로 짐짓 어떤 체를 하려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내가 겪은 일이라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말한 감독은 기억을 물리적으로만 재현하지 않고 그 시절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진심까지 옮겨 그렸다. 그가 그리는 여성은 여전히 일상과 밀착해 있어 남자감독의 시선답지 않은 이해의 경지가 보이고, 결말의 판타지는 그의 영화와 똑같이 구질한 일상을 사는 대중들에게 참한 희망이 되지만, 거기까지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순간순간 빛날 뿐, 하나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 성장사 안에서 흩어지는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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