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10월14일 오전 10시, LA 포시즌스호텔
열명 남짓한 한국인들이 동그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저마다 수첩을 꺼내 이런저런 메모를 하기도 하고, 녹음기 상태를 점검하기도 한다. <마스크 오브 조로>가 세상에 나온 지 7년 만에 만들어진 속편 <레전드 오브 조로>의 주연배우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열린 문틈으로 늘씬한 흑발 미녀가 서성이는 것이 보인다. 조로 부부의 아들로 나온 멕시코 아역배우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뒷모습을 보고, 방 안의 한국인들은 “엄마가 참 미인이네”라고 탄성을 내지르다가, 슬쩍 돌아선 그녀의 프로필을 보고는, 아뿔싸, 그녀가 바로 캐서린 제타 존스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곤 긴장하기 시작한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이 인터뷰를 다른 매체에 다른 용도로 쓰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게 만든,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를 대면할 참이었으니 말이다. 질문 리스트를 앞에 두고 각자 자기 검열을 하는 동안,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S#2. 오전 10시30분, 같은 장소_“7년 만의 재회는 감동이었다”
그 캐서린 제타 존스가 커피잔을 들고 걸어온다. 가슴이 팬 검은 민소매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영화에서보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다. “굿모닝! 그런데 지금이 아침 맞나요?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오는데, 양해해주세요.” 마이크가 놓인 자신의 자리에 앉더니, 테이블에 둘러앉은 기자들을 찬찬히 돌아본다. 마주하기 힘든 강렬한 시선. 그래선지, 질문을 하는 기자들(특히 남자들)은 캐서린 제타 존스를 바라보는 대신 통역자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한다. 손동작을 크게 쓰는 그녀의 공깃돌 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알아본 이들이 적은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기자1: 영화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역할들만 당신에게 오는 것인지, 당신이 그런 역할들만 고집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타 존스: 강하고 당당한 여성을 연기하는 건 언제나 즐겁죠. 그건 내 선택이기도 한데, 역할이 약해 보이면, 강화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요. 엘레나 역할만 해도, 혈통상 조로의 딸이기 때문에 ‘조리나’라고 해야 맞지 않겠어요?
기자2: 당신이 생각하는 엘레나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제타 존스: 엘레나는 호전적이고, 열정적이죠. 전형적인 라티노라고 할까. 유머감각이 뛰어난 점도 마음에 들어요.
기자3: 전편에 비해 액션이 늘어났는데, 액션 연기가 어렵진 않았나요.
제타 존스: 영화 내내 코르셋, 페티코트 두벌, 속치마에 복잡한 드레스를 입고, 무거운 머리 분장까지 한 채로 액션 연기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액션장면보다는 댄스파티 장면, 그리고 발코니 장면을 찍을 때가 재밌었어요.
기자4: 당신은 액션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여배우 중 하나입니다. 평소에 어떤 식으로 단련을 하나요.
제타 존스: 춤연습을 하는 것이 도움이 돼요. <시카고> 같은 뮤지컬뿐 아니라, 액션을 연기하는 경우에도 그래요.
기자2: 7년 만의 속편입니다. 다시 만나 촬영을 하던 날 눈물을 흘렸다던데, 당시의 감회를 들려줄 수 있나요.
제타 존스: <마스크 오브 조로>는 내게 아주 큰 의미입니다. 배우로서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또 지금의 남편(마이클 더글러스)이 이 작품으로 나를 알게 되었고, 결국 그와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잖아요. 경력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워낙 의미있는 작품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정적이 되더라고요. 조로 의상을 입고 나타난 안토니오를 보자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어요.
기자3: 안토니오 반데라스와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요.
제타 존스: 입에 발린 칭찬처럼 들리겠지만 진심이에요. 안토니오는 에너지가 넘치고, 매력있고, 재능있는 배우입니다. 그와 함께 연기하는 건 언제나 즐겁죠. 하지만 우리가 다른 영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우린 이미 ‘미스터 앤드 미세스 조로’로 굳어졌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 다른 역할로 만나긴 힘들 것 같아요. 혹시 연극 무대에 함께 서게 된다면 모르겠지만.
기자4: 남편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함께 작업할 계획이 있나요.
제타 존스: 남편이 제작하고 내가 출연하는 식으로, 다른 파트에서 호흡을 맞출 수는 있겠지만 함께 출연하는 건 사절입니다. <장미의 전쟁> 같은 영화를 같이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웃음) 매일 같이 생활하는데 작품에 몰입이 되겠어요? 우리는 공과 사를 완전히 분리하며 살아요. 내 연기를 그가 모니터하는 일도, 내가 그의 연기를 모니터하는 일도 없어요.
기자1: 자선 이벤트의 일환으로 당신과 남편이 참여한 골프 시합이 있었는데….
제타 존스: (눈이 동그래진다) 설마… 한국에서 그걸 봤다는 말은 아니겠죠? 아니라고 말해줘요.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는 시늉을 하다가, 밖에 있던 홍보 담당자를 큰 소리로 부른다. 홍보 담당자는 인터뷰에서 무례한 언사가 오갔는 줄 알고, 사색이 되어 뛰어들어오다가 제타 존스의 웃음어린 얼굴에 안심한다) 한국에서도 그 경기를 봤대. 우린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어. (마음을 추스르고) 남편과는 골프 보다는 낚시를 자주 하는 편이에요. 마음이 약해서 고기를 잡아도 사진만 찍고 놓아주는 식이지만.
기자6: 한국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신가요.
제타 존스: 미안해요. 부끄럽지만, 잘 몰라요. (한층 나긋하게) 그럼 당신은 웨일스 영화에 대해 알고 있나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퇴장한다)
S#3. 11시30분, 같은 장소_“조로는 인간적으로 나와 닮았다”
캐서린 제타 존스가 뜨거운 에너지와 카리스마로 인터뷰 룸을 휩쓸고 지나간 뒤, 멍해진 기자들의 시야로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들어온다. 짧은 머리에 청바지와 흰색 니트를 입은 그는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부담스러울 것 같던 눈빛도 적당히 부드럽고 담백하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인터뷰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고 작정한 것인지, 그는 이방의 기자들을 만난 것이 정말 반갑고 즐겁다는 듯한 표정이다.
기자1: 조로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습니까.
반데라스: 전편에서 검술을 배웠는데, 검술이란 것이 자전거 운전이랑 비슷해서 다시 하면 하게 돼요. 속편의 액션은 전편에 비하면 안무에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또 와이어 액션과 말타는 액션이 많아졌고요. 조로의 애마 토네이도는 영화 속에선 한 마리지만, 실제론 아홉 마리가 동원됐거든요. 그 모두와 호흡을 맞춰야 해서 그게 힘들었습니다.
기자2: 이제까지 조로를 연기한 배우가 여럿이었습니다. 당신이 연기한 조로는 어떻게 달랐다고 생각하나요.
반데라스: 원래 조로는 완벽주의자이고 거만한 편입니다. 나는 조로를 맡으면서, 유머와 인간미를 가미했습니다. 술에 취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자3: 특히 재밌었던 촬영, 힘들었던 장면은 어떤 것인가요.
반데라스: 조로가 아닌, 평범한 남자로 나왔던 부분들이 연기하는 재미는 더 컸어요. 힘들었던 촬영은 오프닝의 다리 위에서 결투하는 장면과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공장 액션신으로 기억합니다. 크게 다친 적은 없었지만, 매일 멍들고 결리고 찢기고 하는 잔부상을 많이 입었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팔꿈치에서 물도 뽑았어요.
기자4: 속편의 조로는 어떤 점이 달라졌다고 느끼나요? 개인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면요.
반데라스: 자신이 조로라는 사실에 너무 도취되었다가 가장으로서 미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중요한 가치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닮고 싶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이고,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나와 닮아 있다고 생각되고요.
기자5: 섹시 아이콘으로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반데라스: (섹시하다는 말에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내가 섹시한가, 어디가 섹시한가를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더이상 섹시하지 않게 되죠. 난 그런 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할리우드에선 평판이나 이미지에 신경쓰다 보면 자의식을 잃게 되거든요. 내가 섹시해 보인다면, 많이 웃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일 겁니다. 캐서린과의 ‘케미스트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아이러니지만, 신경쓰지 않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기자6: 2002년 월드컵 ‘스페인 대 한국’전을 기억하나요.
반데라스: 물론이죠. 승부차기로 이긴 경기 말이죠? (장난어린 웃음) 심판 판정 때문에 우리 골 두개가 인정되지 않았잖아요. 언제고 다시 만나서 승부를 내야 하지 않겠어요?
기자7: 한국영화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나요.
반데라스: 솔직히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최근 십수년 동안 한국영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고,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받아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어느 나라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추천으로 <2046>을 보았고 감명을 받았어요. 아시아영화는 시대와 공간에 대한 성찰과 표현이 깊고 풍부한 것 같아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영화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기자단과 훌쩍 가까워졌는가 싶은 순간, 그가 자리를 뜬다)
S#4. 12시30분, 포시즌스호텔 복도
<마스크 오브 조로>에서 많은 것을 얻고 이루었기 때문일까. 7년 만에 속편으로 다시 뭉친 그들은 ‘미스터 앤드 미세스 조로’로서 마지막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낸다. 역시 프로, 라는 감탄이 터져나오면서도, 번갯불에 콩 굽듯 진행된 만남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복도에서 다시 만난 기자들을 보고, 눈을 맞추며 “빠이~” 하고 인사를 건넨다. 그와 작별하고 잡아탄 엘리베이터에서 친숙한 얼굴이 보인다. 마침 이 호텔에 묵고 있던 이병헌이다. 그를 보고나니, 시차로 멍해진 머릿속에서 공간감도 흩어져버린다. 캐서린 제타 존스와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이병헌이 (우연히도) 함께 있는 여기는 어디인가. 우리는 진정 그들을 만난 것일까.
<레전드 오브 조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안토니오 반데라스, 캐서린 제타존스, 마틴 캠벨 감독(왼쪽부터)
속편을 7년 만에 내놓는 건 드문 사례다. <마스크 오브 조로>가 태어난 1998년만 해도 속편 제작이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리즈 제작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소니픽처스는 조로의 팬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에서 가능성을 보았고, 각본과 캐스팅이 어느 정도 진행된 2∼3년 전쯤부터 본격적인 속편 제작에 관여했다. 전편에서 사랑의 결실을 보았던 두 주인공 알레한드로와 엘레나에게 어떤 갈등과 화해의 스토리를 던져주느냐 하는 것은 제작진의 커다란 고민이기도 했다.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조로라는 사실에 도취돼, 자신의 가족을 돌보지 않게 된다. ‘캘리포니아’라는 더 큰 가족을 우선시하는 그와 엘레나의 갈등을 기본축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프로듀서 로이드 필립스의 설명이다.
미연방 결성 무렵 과도기의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속편의 컨셉은 ‘스페니시 웨스턴’. 시대상을 재현하느라 상당 부분 멕시코에서 촬영됐다.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건축물과 풍경이 남아 있고, 미술 파트의 인력도 현지에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스탭과 배우들을 힘들게 한 것은 이상 기후로 잦게 내리던 폭우. 필립스는 “비가 너무 많이 왔고, 진흙이 떠밀려와서, 무도회 장면과 포도밭 장면은 찍고 중단하고를 반복해야 했다. 그 덕에 스탭 단합 한번 잘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1919년 소설로 처음 등장해, 영화와 TV시리즈로 숱하게 제작된 조로의 이야기를 지금 다시 만들어내는 이유는, 적어도 미국에선 그만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필립스는 조로라는 영웅의 인기 비결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그간 영상물로 많이 제작됐다는 것이 이유다. 많은 미국인들이 TV에서 영화에서 조로를 보며 자라났고 그래서 친근하게 느낀다. 둘째, 로빈 후드와 제임스 본드를 적당히 섞은 듯한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다. 셋째, 조로는 사람을 죽이지 않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다. 넷째, 조로와 엘레나의 관계가 섹시하고 로맨틱하다.” 그는 또 다른 조로 영화의 제작 계획을 전한다. 이번 작품이 흥행하고 두 주연배우가 다시 합류한다면 또 다른 속편을 만들 것이고, 배우들의 회합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1대 조로(앤서니 홉킨스)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가는 ‘프리퀄’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조로가 새로운 프랜차이즈로 떠오를지 여부는, 그러니까 <레전드 오브 조로>의 개봉 성적에 달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