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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 - 아름답고 다정한 나의 이웃(1)
2001-08-01

김지운칼럼

2년 전 나는 청담동의 한 작은 오피스텔에 살았었다. 사무실도 가까워 자전거로 왕복하고 대개의 약속도 청담동 근처에서 이루워졌고 이만저만 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강남의 몇몇 동네가 그렇듯이 그곳도 소위 말하는 “저, 아침 일찍 들어왔다 오후 늦게 나가요” 하는 20대 초반의 여성분들이 이웃에 많이 살고 있었다. 직업은 다소 다르지만 나 또한 지독한 야행성이라 “저두 오후 늦게 나갔다가 거의 아침에 들어와요” 하면서 사는 편이어서 가끔 귀가하다 입구에서 그녀들과 부딪치기도 한다. 실제로 정말 부딪치기도 한다. 술이 잔뜩 취한 채 그녀들은 벽이며 문이며 사람이며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쳐 헤쳐나가듯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게 신기하기도 했고 즐거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 이웃의 반 이상이 20대 초반의 혼자 사는 여성들이라니 왠지, 딱히 이유가 구체적이진 않지만 한마디로 흐뭇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런 독특한 즐거움이 점점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허구한 날 20대의 꽃다운 숙녀들이 동트기 전 만취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구슬프게 울거나, 휴대폰 붙잡고 같은 말 반복하거나, 입이 벌어질 정도의 쌍소리를 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놓거나 하는 일이 복도에서 또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게 허다해지면 이건 거의 재난 수준이다. 더욱 악몽스러운 건 어젯밤에 보았던 미모의 여성을 다음날 오후에 화장 지운 얼굴로 어슴푸레한 복도에서 부딪치는 건데 몇번이나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화장 지운 얼굴을 대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래서 상대방에게 무안을 주기도 했다. 결국, 난 계약기간인 일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보통의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오고 나니까 여러 가지 생활의 편의를 제공해주는 곳이 근처에 많아서 정말 이사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새기며 뿌듯해했다.

이 아파트는 젊은 부부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만큼 모든 게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으며 처음 며칠은 그 기대감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도 악몽은 현실이 되어 유령처럼 스멀스멀 도처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어느날, 아파트로 이사와도 내 삶의 사이클은 변하지 않아 그날도 늦게 잠을 잤고 필시 오후쯤 일어나야 하는데 이른 아침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지? 하면서 자리에 누운 채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도로 눈을 감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윗집에서 누군가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내 눈은 소리의 방향을 좇고 있었고 소리의 동선을 그어봤더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아마 내 눈에서 줄이 나갔다면 천장에 온통 엉켜 있었을 것이었다. 아마도 꼬마 아이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조금 참아보려고 했지만 어찌나 아이가 기운차게 구석에서 구석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뛰어다니는지 꼬마의 동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나는 내 인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윗집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누구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있다가 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이 열리더니 한 4살 정도의 아이가 나를 치켜올려다보고 있었고 “네가 그렇게 힘차게 뛰어다닌거니?” 하면서 보고 있는데 저쪽 뒤에서 또 한명의 아이가 더 큰 소리를 내며 다다다다 뛰어온다. 오 마이 갓- 쌍둥이였다.

이렇게 해서 내 새로운 악몽은 시작한다.(to be continued)

김지운 / 영화감독·<조용한 가족><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