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일 부산국제영화제 자막팀 사무실을 찾았을 때,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건 천장에 매달아놓은 종이 한장이었다. “영화제 앞으로 5일.” 영화제 8년차 스탭인 조소라 자막팀장은 두달 전부터 사무실 문을 잠궈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개막 전날인 10월5일 자원봉사자 발대식에 참여한 박성철씨는 8월 마지막주부터 전산팀 자원봉사 조기 근무를 시작한 사람이다. 영화제 사무국은, 1년 내내 돌아간다. 그러므로 영화제가 준비되는 곳곳을 ‘귀찮은 외부인’ 눈초리받으며 고작 닷새 쫓아다니는 일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영화제 바깥에서 개막 축포 소리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흥미로운 예고편이다.
D-5/ 10월1일 토요일
프린트는 산 넘고 물 건너
“영화제 첫 상영인데 <쓰리 타임즈> 프린트가 아직 도착을 안 했어요. 걱정돼 죽겠어요.” 스크리닝 매니저, 줄임말로 SM이라 불리는 문준희씨는 반쯤 울상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20여명의 SM들이 책상 앞에 달라붙어 필름 검색에 몰두하고 있는 영화제 기술팀 사무실 내부를 손으로 한번 휘휘 저어준다. “영화제가 얼마 안 남아서 그날 들어오는 프린트는 그날 다 처리해야 해요. 제가 메가박스 5관 담당인데 거기서 총 27편을 상영하거든요. 근데 아직 반도 안 들어왔어요.” 그는 <오데트>의 필름을 검색 중이다. 이 영화는 프리머스 7관에서도 상영된다. 프리머스 7관 SM인 김준호씨가 말을 덧붙인다. “전 19편 중 이제 2편 끝냈어요.”
적으면 하루에 2편이 들어오기도 한다는 프린트의 검색작업 시간은 매번 다르다. 최신작들은 2∼3시간이면 검색을 마치지만, 고전영화들은 프린트 손상이 심해 릴 한권 검색하는 데만 3시간씩 걸리기도 한다. “프리머스는 고전영화 상영이 많아요. 어제는 12시간 걸려서 영화 한편 끝냈어요.” 얼굴빛이 새하얀 김준호씨의 말이다.
영화제를 5일 남겨두고 필름 검색작업은 현재 72% 정도 진행된 상태. 사무실 입구 게시판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프린트들의 입고 일정이 적혀 있다. <피터팬의 공식> 10월8일 상영, 10월7일 밤 도착. <연애> 10월7일 상영, 10월6일 밤 도착. ‘베니스에서 오는 중’이라고 적힌 <친절한 금자씨>가 다행히도 오늘 입고됐다.
1/ 기술팀에 소속된 스크리닝 매니저 수는 29명. 대부분 영화 관련 학과 전공자들이고, 국내 여러 영화제 스탭으로 참여한 경력을 인정받은 전문검색사가 2명 포함돼 있다.
2/ 기술팀의 VHS는 자막팀으로 옮겨진다. 자막작업은 프린트 입고 전, 각국 영화사가 전달한 VHS와 대본을 기준으로 미리 이뤄진다. 그러나 영화제 상영본과 앞서 전달받은 VHS의 편집본이 다를 수 있으므로 자막팀 스탭들은 기술팀이 전달한 VHS를 보면서 1차 자막작업 내용이 영화와 일치하는지 반드시 확인과정을 거친다.
D-4/ 10월2일 일요일
10년의 기록, 해변에서 만나요
“영화제 공사요? 아뇨, 지금 APEC 공사 중인데.” 해운대 아쿠아리움 앞 해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낯선 공사현장의 인부가 말한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자랑스런 열돌을 맞아 부대행사 및 관련 시설 마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지만, 못질과 페인트칠이 그날의 임무인 인부들에게야 그것이 영화제 관련 일감이든 APEC 관련 일감이든 크게 중요치 않을 것이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햇빛 아래서 튼실한 걸음도 무디게 만드는 모래를 밟으며 일하는 그들은 실은 영화제를 위한 게스트라운지와 홍보부스, 10주년 기념 전시관을 작업 중이다.
캐나다에서 수입된 자재로 만들어졌다는 지름 21m의 스프렁텐트는 야외 게스트라운지용. 15m*80m 넓이의 모래밭을 편평하게 깎아 나무로 덮은 자리 위로는, 홍보부스 및 인디라운지용 천막들이 하나씩 일어서고 있다. 공사 진행이 가장 더딘 쪽은 10주년 기념 전시관이다. 영화제 역대 포스터와 사진들, 10주년 기념 영상물과 역대 특별전 관련 출판물 등이 전시되는 이 시설은 아직까지 컨테이너 16개가 모래밭 위에 덜컥 놓인 꼴이다. 하지만 아름답게만 완성된다면 칸영화제의 리비에라 해변 부럽지 않은 풍광이 될 듯도 하다. 개막 4일 전의 해가 저물어갈 즈음, 이 건물이 사흘 안으로 완성되는 거냐고 물었다. “글쎄요, 우리는 오늘 하루 못질하러 왔어요”라며 영화제 개막일을 모르는 인부는 자리를 뜬다.
1/ 게스트라운지를 감싸게 될 캐나다산 스프링텐트.
2/ 까맣고 마른 몸을 가진 인부들의 모습은 영화제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소란스럽게 영화제가 개막하고 나면 지워질 흔적이라 그런 것도 같다.
D-3/ 10월3일 월요일
완벽한 극장 관리를 위하여
“수표(표 받기)가 늦어져서 정시 입장이 안 될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암전 중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GV가 두 상영관에서 동시에 있을 때 통제는 또 어떻게 합니까?” “관객이 해당 티켓 없이 맘대로 상영관을 옮겨다닐 수 있습니다.” 자막팀 스탭 하나가 무섭게 입을 뗀다. 질문을 받은 해운대 상영관 매니저가 웃고 만다. “취조하는 것 같으세요. 한마디 잘못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부산 시네마테크 상영관 안에서 벌어지는 열띤 질의응답 자리는 원활한 상영관 운영을 위한 예비 모임이다. 스크리닝 매니저와 자막팀 스탭, 상영관 매니저, 그리고 GV 일정관리 담당자 등이 모여 영화상영과 관련해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문제상황을 가정하고 답을 구한다. 극장 내 수표와 검표 위치, 비상시 영어 안내멘트가 가능한 자원봉사자 배치, GV가 없으므로 마이크도 없는 상영관에서 안내멘트는 뭘로 하나 등에 관해 스크리닝 매니저들과 자막팀 스탭들은 그들의 헤드급인 상영관 매니저들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보기에는 안 좋겠지만 확성기를 쓰세요.” 설마 빨간 확성기? 폭소가 번진다. 논의의 자리는 별의별 특수상황에 대한 가정이 다 쏟아지면서 점점 ‘심오’해져갔다.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한 상영관 매니저가 마침내 한숨을 쉰다. “저는 설명만 하고 들어가면 될 줄 알았는데, 질문이 끝이 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