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단한 기대를 품고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떼시스>를 보지는 않았습니다. 신인감독의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아무런 선입견이나 기대없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말입니다. 영화는 좋았습니다. 영화제가 끝난 뒤 다시 영화관을 찾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영화의 질이나 소재, 주제를 떠나 뭔가 계속 제 머리를 귀찮게 구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메나바르의 처녀작인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무언가가 아주 낯이 익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니 미칠 일이지요. 아메나바르의 스타일과는 상관없었습니다. 소재와도 별 상관이 없는 게 분명했고요. 웰러의 <무언의 목격자>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면 벌써 기억을 해냈지요.
해답은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에서 영화 자료를 뒤지다가 나왔습니다. 신인배우의 처녀작이어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던 배우들과 스탭들의 리스트를 읽다가 아는 이름을 발견한 것이지요. ‘아나 토렌트-앙헬라’ 아시겠어요? 영화 역사상 가장 마술적인 아역 배우가 성인이 돼 제 앞을 지나갔는데 영화를 두번이나 봤으면서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던 거예요. 바보, 바보, 바보, 바보. 여기서 제 기억은 빙빙 돌아 빅토르 에리케의 <벌집의 정령>이라는 영화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그 날로 돌아갑니다. 레너드 말틴의 가이드를 뒤적이다가 그 영화의 자료와 마주쳤던 거죠.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간단한 기본 개념, 즉 한 작은 소녀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찾아 스페인 내전 이후의 카스틸리아의 평야를 누빈다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저를 매혹시키기엔 충분했습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작은 소녀를 연기한 아나 토렌트라는 작은 배우의 팬이 되었고요.
이제 왜 <떼시스>를 보면서 그렇게 낯익은 느낌을 받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신인감독인 아메나바르는 결코 이런 연속적인 느낌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역 배우 출신 중견 배우인 아나 토렌트에는 그런 연속적인 흐름이 있었지요. 다섯살 때 <벌집의 정령>에 출연했을 때부터 아나 토렌트는 늘 죽음을 끌고 다녔습니다. 아나 토렌트의 대표작들은 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벌집의 정령>에서 아나 토렌트는 경찰한테 살해당한 도망자와 수많은 죽음의 상징들을 거쳐, 공동묘지 시체들을 조립해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났습니다. 카를로스 사우라의 <갈가마귀 기르기>(이 영화는 1월 말에 EBS에서 방영될 예정입니다)에서 아나 토렌트는 죽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령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단죄하고 그들의 죄를 거두었습니다. 아나의 캐릭터 역시 과거의 이미지였으니 결국 그 아이 자신도 유령이었던 셈이고요. 토렌트의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었던 하이메 드 아르미냔의 <둥지>에서도 토렌트는 죽은 주인공 알레한드로의 묘지 위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지휘하는 전형적인 토렌트식 이미지를 선보였습니다.<떼시스>이전에 국내에 소개된 유일한 토렌트 영화인 <블러드 & 샌드>는 투우 영화였고요.
그랬으니 <떼시스>에서 아나 토렌트가 연기한 앙헬라의 모습이 그렇게 낯익었던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 죽어가는 대상들이 서서히 스페인 내전의 유령들로부터 현대 매스미디어의 희생자들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까만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 죽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토렌트의 모습은 여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