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급행열차처럼 질주하는 변화의 도시지만 그 방향이 언제나 앞을 향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격변을 겪었던 홍콩은 아시아의 맹주와도 같았던 영화의 힘을 잃었고, 왕가위와 주성치 같은 드문 예를 제외하면, 더이상 외국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영화의 10년을 돌아보는 다섯 번째 여행지로 홍콩을 택한 건 경이적인 무협과 액션의 내공을 쌓아온 힘이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방의 진주라 불렸던 이 도시에서, 과거에 그랬듯 앞으로도 새로운 영화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인들을 만났다. 이 글은 인디컴시네마가 기획하는 12부작 다큐멘터리 <아시아영화기행>의 홍콩편 촬영팀과의 동행기다. <씨네21>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후원하고 CJ미디어가 공동제공하는 <아시아영화기행>은 부산영화제 기간 동안 12편의 각 작품을 1편으로 모아 편집한 버전을 상영하고, 10월3일부터 12일까지는 SBS에서 연속 방영할 예정이다.
홍콩은 숨이 막히는 도시다. 우물 정자 모양의 좁고 가파른 아파트는 성냥개비로 쌓아올린 탑처럼 불안하여, 톡 건드리면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질 듯하고, 건물 사이 비루한 여백마저 20평 아파트가 부럽지 않은 커다란 간판들이 채우고 있다. 폐소공포증의 도시, 외로운 섬. <무간도>의 배우 증지위는 “홍콩은 너무나도 작아서 렌즈 하나로 날아가는 비행기와 공항, 바다를 모두 담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것이 홍콩을 한순간에 보여주는 풍경이라 했다. 그 작은 섬의 영화가 한때는 아시아를 지배했노라 말한다면 지금 십대들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에게 그곳으로의 영화기행은 향수와 회한이 섞인 시간여행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난잡한 간판 사이를 뛰어노는 성룡을 보고, 더위 먹은 빨래가 축 늘어진 빈민가 아파트에서 가난한 영웅들을 찾고, 비좁은 탁자들 사이 <가을날의 동화>의 초라한 연인들을 기억하는. 그와 동시에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길목부터 반색을 하는 <이니셜 D>와 <칠검>의 대형 광고판은 현재와 미래의 홍콩영화와 마주하도록 성급하게 몰아세우기도 했다. 반짝이는 새 시대의 영화, 황금기의 영화를 대륙에서 숙성시킨 고집, 시간차가 무색한 혼돈. 시대가 뒤엉킨 홍콩은 다시 한번, 숨이 막혔다.
홍콩영화의 흐름을 만드는 감독, <무간도>의 유위강
베이직 픽처스가 첫 번째 방문지인 건 당연했다. <무간도> 시리즈의 유위강 감독이 이끄는 베이직 픽처스는 물류창고가 가득한 거리 모퉁이에 도라에몽과 드래곤볼 피겨, 오래된 소품들이 알뜰하게 놓인 사무실을 차려놓고 있었다. 관리인 노인에게 유위강 감독의 사무실이 몇층인지 묻자, 친절한 노인은 그의 단골식당이 어디인지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점심을 먹으라고, 도저히 됐다고는 말하지 못할 웃는 낯으로 일러주었다. 게다가 그날 한국영화 <데이지> 촬영지인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유위강이 매우 늦게 도착한 탓에, 일곱 가지 성조를 가졌다는 다이내믹한 광둥어로 떠나갈 듯한 그 식당에 들를 수밖에 없었다. 돈을 내면 반찬 두 가지를 고르고 밥과 함께 서둘러 먹는, 노동자들의 식당. 그 틈에서 “내 건 좀 이상한데, 네 건 괜찮냐” 정도의 숨죽인 대화만 주고받다가 만난 유위강은 그런 식당에선 기름방울처럼 떠 있을 것 같은 차분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촬영감독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유위강은 홍콩영화가 침체에 빠진 1990년대에 정이건의 <고혹자> 시리즈를 터뜨리면서 홀로 영광을 맞이한 감독이었다. 그 시리즈를 마무리한 1998년, 유위강은 특수효과를 거하게 사용한 무협영화 <풍운>으로 기묘하지만 성공적이었던 변종 장르를 내놓았고, 정서가 액션을 대체한 <무간도> 시리즈로 다시 한번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물길을 텄다. 그는 영리하고 재빠르다. 그래야만 한다. “홍콩은 매우 빠른 도시다. 오늘 돌아왔지만 내일 다시 외국으로 출장을 가는 나처럼. 그런 면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홍콩영화는 무협과 로맨스, 액션을 막론하고 박자가 빠른 편이다. 본 기억도 없는데 끝나버렸다고 할까. 홍콩영화는 속도가 매우 빠른 컴퓨터 같다.” 그것은 한 사람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조그만 장르가 피어났다가 시들어버리는, 한순간의 흥망성쇠가 군데군데 도사린, 유위강의 경력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유위강은 바쁘게 도약했지만 그 지점에서 속도를 늦추는 타이밍에도 능숙한 인물이다. <무간도>는 홍콩영화의 습관이 되어버린 공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다.
베이직 픽처스·베이스 프로덕션 사무실 입구에 서있는 <이니셜 D>의 스탠디
공동감독 맥조휘는 “이전의 홍콩영화는 스토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맞춰 각본을 짰다. 몇분 동안 액션이 있고 그 다음엔 뭐가 나오고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면서. 그러나 <무간도>는 무(無)자를 쓰면서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천천히 느끼면서 전개했고, 인물의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긴장감과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처럼 드라마가 있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맥조휘는 <무간도> 이후 제작자들은 좋은 시나리오와 충분한 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켜본 모두가 깨닫는 건 아니고, 깨달은 모두가 실천하는 건 아니다. <영웅> <와호장룡>의 프로듀서 필립 리와 <무간도>의 배우 증지위를 비롯한 많은 영화인들은 안전하게 투자하여 빠르게 회수하고자 하는 제작풍토 때문에 신인이 태어나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그 자신이 신인이었던 맥조휘는 얼마 전 유위강과 함께 <무간도2>의 젊은 배우 진관희와 여문락이 출연한 <이니셜 D>를 연출했다. 인구가 적어 자국내에선 자본회수가 불가능한 홍콩영화는 태생부터 해외흥행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공들여 차려입은 카레이서들이 도열한 <이니셜 D>의 스탠디(영화 홍보용 입간판)는, 기본을 중시한다는 의미인지, 베이직 픽처스와 베이스 프로덕션 두 회사가 둥지를 튼 창고에서, 위풍당당하게 방문객을 압도하고 있었다.
“홍콩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이 높은 곳”
<올 어바웃 러브> 촬영현장
홍콩의 영화스탭들은 자기 이름이 적힌 컵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수분을 모두 짜내는 듯한 더위 때문이다. 그들은 카메라를 가진 이방인들이 있는데도 윗옷을 벗고, 찬물에 적신 수건을 목에 두르고, 컵에 담긴 차가운 차와 생수를 마셔댔다. 한낮에는 바깥에서 영화찍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30도 중반을 우습게 넘어가는 더위와 80%에 달하는 습기, 수풀이 있어서인지 먼지처럼 공중을 맴도는 날벌레떼. <올 어바웃 러브> 제작진한테는 저예산보다도 무정한 악조건이었다.
애정의 사슬이 복잡다단하게 얽힌 <올 어바웃 러브>는 유덕화가 투자한 영화사 포커스필름이 제작하는 영화. 1인2역을 연기하는 유덕화는 양채니와 아사(가수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쌍동이 자매 트윈스의 언니)의 남편으로 출연하여 버리고 버림받으면서 상처로 흐려진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홍콩 청의전문교육학원 주차장의 한밤 촬영현장을 찾은 며칠 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예쁜 저택에서 카메라 앞에 선 유덕화는, 감독이라고 소개해도 믿을 정도로 매사를 주도하고 있었다. 며칠 전엔 톱스타 아사와 전화받는 모습까지 세심하게 의논했던 감독 대니얼 유도 그날만은 매우 과묵했다. 양채니의 동선까지 직접 잡아주었던 유덕화가 있어서 이 영화가 가능한 탓이었다.
대니얼 유는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고, 그 자신이 포커스필름의 사장이기는 해도, 그처럼 새로운 인물은 자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제작비는 200만달러, 주어진 기간은 한달. <올 어바웃 러브> 제작진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쉬고 날마다 16, 17시간을 일해야 한다. 인건비도 높지 않다.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과 가수 겸업이 흔한 까닭도 개런티가 많지 않은 관행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대니얼 유는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스탭들과 영화를 찍는 건 매우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홍콩영화는 세계 어느 곳보다 효율이 높다”고 자부심과 자괴감이 섞여 있는 듯한 고백을 전했다. “디지털영화를 실험하고 싶어” HD카메라로 찍고 있는 <올 어바웃 러브>는 올해 가을에 홍콩에서 개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