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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2] - 정지우 감독 인터뷰 ①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5-10-04

<사랑니> 개봉 앞둔 정지우 감독 인터뷰

“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소박한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앞당겨진 <사랑니>의 개봉 일정은 가뜩이나 낯빛이 흰 정지우 감독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언론 시사를 하루 앞둔 9월20일 오후, 숨가쁘게 믹싱을 마치고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막 ‘출소’한 그를 삼청동에서 만났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속 인영이 석이의 자전거를 달리던 길 위쪽, 다시 말해 인영과 정우가 함께 사는 한옥의 아래 골목에 자리한 카페에서. 예의 또렷하고 청량한 정지우 감독의 보이스카우트풍 목소리는, 누적된 피로의 더께에도 짓눌린 기색이 없었다. <씨네21>은 <사랑니>가 감독의 전작 <해피엔드>로부터 성큼 나아간 걸음이며 독창적인 경지를 열었다는 의견을 피력한 허문영 편집위원을 질문자로 초대했다. 우리는 아직 프린트로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정지우 감독과 마주앉았다.

-허문영/<해피엔드>와 <사랑니>는 6년의 거리만큼 영화적 거리도 있다는 생각이다. 뭘 하고 지냈나.

=정지우/6년이라는 길이의 시간은, 시나리오부터 끝까지 자기 손으로 수공업적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프로젝트 하나가 좌절되고 다음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경우 대략 소모할 수밖에 없는 양의 시간이다. 앞서 추진했던 <두 사람이다>는 저금한 셈 치고 있다. <사랑니>에 옮겨 심어진 <두 사람이다>의 원형이나 매혹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같이 작업했던 분들이 무관한 영화인데도 문제의식이 연결된다고 하더라.

-김혜리/영화제작소 청년, 청년필름에서 작업할 때와 홀로 떨어져 나와 영화를 만들 때 차이는 무엇이었나.

=정지우/오랫동안 모든 영화적 사고를 ‘우리’라는 주어로 했다. ‘우리’라는 전제에 수반된 내 느낌과 책임감은 마치 가장의 그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고 그 책임감이 <해피엔드>의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동력이었다. 내적으로 충분히 숙성되지 않고 동기가 유발되지 않는 대목에서도 속도를 올리게 한. 그것이 없어지니 <해피엔드>에서 느낀 영화적 문제와 미숙함을 극복하고 싶은 강한 욕망과 꿈꾸는 영화에 다가서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허문영/첫 장편에서 스스로 느낀 미숙함이라면 어떤 것인가.

=정지우/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료해지지 않은 상태로 장르의 관습에 기대어 영화를 완성했다. 오랜 시간 자문했다면 결코 취하지 않았을 태도들이 거칠게 영화 안에 던져졌다. 그로 인해 관객이 오독을 했고 의도치 않은 엉뚱한 교감도 생겼다. 시작부터 장르에 의지했건 중간이나 끝에서 그랬건 근본 문제는 불명료한 나의 사고에서 비롯됐다.

-허문영/방금 스스로를 수공업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셈인데, 그런 감독에게 이상적인 영화란 어떤 영화일까.

=정지우/전제한 장르가 무엇이건 고유한 모습을 갖춘 영화다. 일단 <사랑니>는 <해피엔드>보다 상황들이 수공업적으로 손맛이 깃들어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에 목표에 좀더 근접했다고 본다.

-허문영/고유한 방식을 말할 때 그 ‘고유함’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나? 인물?

=정지우/이야기다.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다. <사랑니>는 상당히 복잡한데 나의 이야기가 좀더 중심을 잡고 내가 더 훌륭해진다면 조금씩 이야기가 단순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니>보다 먼저 찍었지만 시나리오는 <사랑니>보다 늦게 쓴 단편 <배낭을 멘 소년>(인권위원회 제작)이 앞으로 내 고민을 반영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랑니>처럼 구조로 발언하려는 대신, 이 위태로운 소재에 대한 나의 발언은 이것이다, 라고 자신있게 끝냈다.

-김혜리/<배낭을 멘 소년>은 HD로 찍은 흑백영화다. 당신의 첫 단편 <사로>도 흑백이었다. <사랑니> 역시 설명하긴 힘들지만 흑백으로 찍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흑백에 대한 매혹이 있는지.

=정지우/흑백은 실제와 다르기 때문에 훨씬 이야기와 ‘상황’이 풍부하다. 현실과 갖는 간극에서 뭔가 해볼 여지가 많아진다. <사랑니>도 흑백으로 찍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럼 시장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다. (웃음) <오! 수정>은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였다.

“마음의 풍경만으로 밀고 가는 연출”

-허문영/<해피엔드>와 <사랑니>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치정성일까.

=정지우/치정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라는, 그 열일곱 소녀의 말도 안 되지만 그 이상의 표현도 없는 말이 <사랑니>의 모티브인데, 이는 자기 스스로의 마음에 관한 것이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므로 치정이라는 개념이 맞지 않는다. 나 하나의 문제, 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소박한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영화의 복잡한 시간 구조를 밀고 나가게 한 엔진이었다.

-김혜리/<해피엔드>는 관련된 이슈가 둘 있었다. 최보라의 살해를 꿈에서 현실로 바꾼 최종편집에 대한 논란과 그것이 일탈한 여자에 대한 징벌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그래서 치밀한 구조로 승부하는, 그리고 용감하고 긍정적인 서른살 여자가 나오는 영화 <사랑니>는 어찌 보면 그 논란들에 대한 감독의 대꾸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지우/끝내 대꾸를 하고야 말았다는, 그것도 6년이나 걸려서. (웃음) 그랬다면 그 소심함이 진짜 한심할 테니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맥락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 때리는 게 나쁜 짓이잖아. 그게 불륜(不倫)이구”라는 대사는 노골적으로 <해피엔드>와 연관된다. 나는 누가 누구를 좋아해서 상처받는 일보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게 더 싫고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 사람 때리는 일에는 너그러우면서 감정문제에는 왜 이리 말이 많은지 항변을 하고 싶었나보다. 정우와 인영의 관계도 조지 루카스 식으로 말하면 <해피엔드>에서 헤어졌다가 재회한 일범과 보라 관계의 선행 에피소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김혜리/인영처럼 경제적으로 자립해 남자친구와 자유롭게 동거하며 열일곱 소년과 사랑을 나누고 자기의지를 관철시키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여성 캐릭터는 현실보다 반 걸음 앞서 나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선언적 캐릭터가 될 위험성은 걱정하지 않았나.

=정지우/전혀 염려가 없었는데 개봉이 다가오니까 아주 심하게 염려스럽다. (웃음)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의 지방 대 서울관객 비율과 거꾸로 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랑니>는 캐릭터가 현실의 아주 성실한 반영이라면 구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판타지적 색채가 있는 영화다. 그러므로 결과가 지옥불이라도 할 수 없었다. 또한 현실의 성실한 반영보다 이것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임이 직관적으로 분명했다.

-허문영/어쨌든 서른살 여자가 열일곱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 게다가 <해피엔드>와 달리 섹스와 폭력이 센 것도 아니고, 강하게 이끌어가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인물을 짊어지고 마음의 풍경만으로 밀고 가는 영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정지우/처음엔 어렵게 생각지 않았는데 도중에 어쩔 줄 모르는 순간들이 왔다. 그때 김정은이라는 배우가 엄청나게 큰 힘이 됐다. 가만히 버텨주기도 하고 모티브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예컨대 “나 걔랑 자고 싶어” 하는 부분에서도 컷을 안 하고 끝끝내 기다리니 침대에서 헤엄치는 동작이 나왔다. 서른살이 된 이석과 재회하는 장면은 김정은의 반응 숏 하나로만 갔다. 처음에는 얼굴만으로 끝낼 자신이 없었고 더 지저분한 카메라워크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그의 얼굴 하나로 충분했기 때문에 조작적 장면 분할이 불필요해졌다. 김정은의 예전 이미지 때문에 그의 직관과 진심을 관객이 온전히 다 알아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적당히 한 상황이 거의 없었다.

-김혜리/지적한 대로 마음의 풍경만으로 밀고 가는 연출인데, 그와 관련해 내레이션의 유혹은 없었나. <사랑니>와 비슷한 구도의, 어린 딸의 친구를 사랑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인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는 1인칭 내레이션으로 그녀의 마음 상태를 계속 전달한다. 그런데 <사랑니>는 마음속 혼잣말을 딱 한번 보이스 오버 처리했다.

=정지우/보이스 오버가 영화 전체에서 딱 한번이라 남길지 말지 고민도 했다. 처음부터 영화의 구조로 커버하겠다는 연출적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레이션의 유혹은 적었다. 어설퍼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김정은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흔들리긴 했다. 최민식 형도 그렇지만 좋은 목소리를 가진 배우는 내레이션이 깔리는 장면을 자꾸 그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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