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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형사 Duelist>

성장영화의 구조를 택한 <형사 Duelist>의 서사와 그 한계

※스포일러 있습니다.

하나의 텍스트에 이르는 길은 수없이 많지만 이명세의 <형사 Duelist>를 집중 조망하는 대부분의 글들은 한쪽의 길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느낌이다. 작품에 도달하는 모든 길이 동일한 생산력을 갖는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야기가 아닌 순수한 화면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천명된 이후에 화면이 아닌 서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일견 무모한 도전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들의 결합이 아닌 한, 그 움직임을 이끌어나가는 지도로서 서사는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그 안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것이 얼마나 느슨하게 짜여 있는가에 상관없이, 각각의 영상들이 의미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즉 각각의 숏과 신들이 왜 독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 안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정합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두명의 아버지 - 안 포교와 병판

이명세의 <형사…>에는 현란한 카메라워크와 리듬감 있는 편집만큼이나 매력적인 인물구도가 존재한다.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개성적인 캐릭터의 디테일 전달보다는 급격하게 흘러가는 화면이라는 하류(河流)의 흐름을 잡아주는 정도의 기능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남순과 ‘슬픈눈’의 ‘적과의 동침’과도 같은 애증관계가 이 영화의 감정적 리듬의 긴장과 이완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애틋한 사랑에 좀더 확연하게 명암을 부여하는 것은 둘을 둘러싼, 대조적인 색채를 지닌 배후 인물들이다.

이 작품에는 두명의 아버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남순과 짝패를 이루는 안 포교이고 다른 하나는 ‘슬픈눈’의 배후에 있는 병조판서이다. 남순이나 ‘슬픈눈’의 혈연적 부친이 아닌 사회적, 정신적 측면에서 아버지의 위상을 차지하는 안 포교와 병판은 상이한 세계관을 대변한다. 남순의 말대로 ‘그 나이가 되도록 현장에서 뛰고 있는’ 안 포교는 성공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며 물 흐르는 대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민생 치안을 유지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뿐 어떤 이에게도 명령을 내리는 법이 없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병판은 국가를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이 나라는 병들었으나 양반들은 병의 원인을 보지 않고 현상만 보기 때문에 나라는 죽어가고 있다. 그의 국가-신체의 비유는 일견 그를 우국지사로 오해하게 하지만 병든 나라를 구할 인물은 자신밖에 없다고 믿는 그의 신념 속에는 독재자의 야욕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는 위폐를 유통시켜 나라의 경제를 완전히 마비시키고, 그 혼란을 이용해 자신이 나라의 통치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

두 아버지는 자신의 더 큰 아버지, 국가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갖지만 그들의 신념을 행하는 방식에서는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안 포교와 병판이 아버지가 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권력으로 남을 압제하기보다는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국가의 테두리를 지키려는 안 포교가 남순과 관계맺는 방식은 횡적이지만, 뛰어난 개인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병판과 ‘슬픈눈’의 관계는 종적이다. 이들의 관계는 화면 속에서도 확인되는데 안 포교가 남순과 함께 있을 때 화면 속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뒤나 옆에 위치한다. 남순이 ‘슬픈눈’을 쫓을 때 안 포교는 그녀를 호위하고, 그녀가 ‘슬픈눈’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한숨 지을 때 그녀 주변을 배회하며 안절부절못한다. 반면에 병판은 언제나 ‘슬픈눈’의 전면에 위치하며 화면 가득 보여지는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풍모가 가득하다. ‘슬픈눈’이 병판의 생일날 검무를 추는 장면에서 병판은 ‘나를 믿지 못한다면 칼로 쳐도 좋다’라고 말해 ‘슬픈눈’은 그를 겨눴던 검의 방향을 바꾸어 그를 위한 춤사위를 선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슬픈눈’이 그의 신념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에 복종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들이 주고받는 눈빛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녀 검객 남순의 입사체험

이렇게 남순과 ‘슬픈눈’의 대조적인 아버지들과 그들과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그들의 성장방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형사…>는 이 의사 부녀/부자 관계의 조력과 소녀 검객 남순과 ‘슬픈눈’간의 첫사랑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성장영화의 구조를 획득하게 된다.

이명세는 방학기의 <다모>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차용했지만 실제로는 ‘여형사’라는 모티브에 더 끌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수한 형사영화 속에서 눈요깃감으로 양념처럼 등장했던 여성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그전의 여형사들이 수사의 보조 수단 혹은 악한의 인질이 되어 남성 형사를 애먹이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녀를 단지 보호해야 할 딸내미 혹은 골칫덩어리 신참으로 여기지 않고 현장을 뛰는 자신의 동지로 인식해주는 안 포교의 공이 크다. 안 포교는 그녀의 다소 거칠고 소모적인 수사방식을 보완해주면서 수사정보를 수집하는 데 공동 전선을 펼친다. 그는 남순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해주면서 그녀가 사랑에 눈멀어 대의를 그르치지 않도록 인도해준다.

‘슬픈눈’은 무도에서는 병판과 동등하거나 더 우월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병판은 ‘슬픈눈’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기를 바랄 뿐 ‘슬픈눈’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야욕의 전모를 보여주지도 않고 그 안에서 ‘슬픈눈’이 어떻게 성장해나갈 수 있는지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안 포교의 보살핌과 자유분방한 훈육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남순의 성장과 대조적으로, 슬픈눈은 아비(병판)를 죽이거나 아니면 아비 안에서 자신이 죽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형사…>에서 남순은 아이에서 사랑과 시련을 통과하여 어른이 되어가지만, ‘슬픈눈’은 성장하지 못한 채 영원한 소년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가게 된다.

드라마 <다모>에서 하지원은 이미 조선시대 여형사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한 바 있다. 하지만 ‘다모’는 여형사라는 캐릭터보다는 두 남자의 누이 같은 연인 혹은 연인 같은 누이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그녀는 사건의 발단이지만 언제나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이서진이나 김민준을 축으로 하는 남성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시대 장금이가 보여준 탁월한 문제 해결력과 비교해볼 때 ‘다모’(茶母)는 수사나 업무를 위한 위장전술이라기보다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 같았다. 하지만 이명세는 ‘형사’라는 직함을 영화 전면에 드러면서 특히 남순이라는 여형사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얼개를 짰다. 그리고 남순과 함께 영화 속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슬픈눈’이 그녀의 첫사랑으로 소모되어 사라지면서 입사체험은 온전히 남순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녀가 ‘슬픈눈’과의 사랑에서 시선의 주체라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지만 그녀가 ‘슬픈눈’과 천편일률적인 공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것뿐. 영화 자체가 감정의 디테일을 거부하고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되겠지만, 이 영화 속에서 남순이 ‘슬픈눈’에게 매혹되는 것은 지나치게 시각 중심적이다. ‘슬픈눈’을 탐미적으로 훑어내리는 그녀의 시선은 여성의 외형에만 집착하던 남성적 카메라의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준다. 여성과 남성을 자리만 바꾼다고 남녀평등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이 보여준 그로테스크한 가상극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 아닌가.

남순 - <다모> 캐릭터의 반복

게다가 ‘남순’이라는 캐릭터는 여전히 기존의 ‘다모’가 가졌던 한계를 어느 정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남순이 ‘슬픈눈’이 빼내온 회계장부를 받음으로써 사건의 실마리를 푼다는 안이한 결론은 극의 긴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애써 형상화한 그녀의 형사적 자질을 훼손시킨다. 언술과 배반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포도청장의 손가락을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한쌍의 단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남순에게는 너무 자존심 상하는 결말이다. 사극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장을 내며 조선시대라는 역사성을 애써 지워낸 자리에 여성 인물의 한계를 재생산함으로써 시대성을 복원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공중을 나는 듯 가볍게 담장과 지붕 위를 넘나드는 카메라와 시공간을 초월한 세트와 의상이 미감을 매료시키고 와이프와 디졸브를 이용한 속도감 있는 장면전환은 화면에서 눈뗄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영상의 유려함만이 영화의 본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수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하는 길이 아닐까. 새로운 화면을 이끌어나가는 추동력이 언제나 잘 짜인 드라마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자신이 지닌 혁신적인 스타일을 감당할 수 있는 시선을 겸비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타일리스트 이명세가 봉출과 같은 장터의 이야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무도 원치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가 보여준 한국영화의 영상이 담지할 수 있는 심미적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관객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의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서사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영상미학을 극대화하는 순간이 아니라, 서사와 영상간의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할 때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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