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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뉴웨이브영화제 마스터클래스 [1] - 허우샤오시엔 ①
정리 이종도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5-09-13

8월27일 토요일 오후 3시, 세명의 거장의 작품을 초청한 대만뉴웨이브영화제를 위해, 같은 비행기를 타고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차이밍량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에 도착했다(에드워드 양 감독은 내한하지 않았다). 두 감독을 한자리에 모셔 사진을 촬영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고 두 감독은 바로 필름포럼으로 나왔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감기로 몸이 안 좋았고 파리와 대만을 거쳐 서울로 오는 고단한 일정이었다. 차이밍량 감독은 일정이 없었으나 일부러 사진 촬영을 위해 나와주었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적 풍경이 뒤범벅된 종로를 뒷배경으로, 두 감독이 카메라 앞에 섰다. 차이밍량 감독이 모자를 벗고 찍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자,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익숙하지 않으니 그냥 가자며 웃는다. 그러고보니 두 감독 모두 머리가 아주 짧다.

토요일 오후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표는 일찌감치 동이 났다. 8월29일 월요일 오후 차이밍량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는 기립박수로 끝을 맺었다. 두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를 지상중계한다. 정성일 평론가, 김소영 영상원 교수가 각각 진행을 맡았다.

허우샤오시엔이 말하는 대만의 뉴웨이브영화, 미래의 아시아영화

가장 중요한 건 사실주의이다

나는 국립예술전문대학을 나온 뒤 처음엔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세일즈맨 생활을 하다가 7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할까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2년 전쯤 해서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이 대거 대만으로 돌아왔고 중앙전영공사에서 지원도 해주고 해서 대만영화 뉴웨이브의 발전이 막 시작됐다. 해외에서 온 분들이 내 영화를 보고 이건 마스터 숏이야, 저건 무슨 숏이야, 이렇게 지적하더라. 난 이게 뭐지, 하고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이런 고민을 얘기하니 누군가 심종문 작가의 자전적 책을 추천해줬다. 그 책을 통해 시점에 대해 배웠다. 인물에게 일정 거리를 지키면서 관조하는 태도를 봤다는 얘기다. 그전에는 영화를 찍을 때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은 뒤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관점을 촬영감독에게 ‘좀 멀리, 좀 멀리’ 이렇게 얘기했다. 영화에서 보듯이 오토바이 같은 게 다 멀리 보인다. 물론 멀리 찍는다고 해서 객관적인 건 아니다.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진실하게 그리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고, 영화 표현도 생활에서 온 거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삶을 살고 있는지 그러나 잘 보지 못한다. 영화란 프레임이라는 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산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을 찍은 이후 난 계속 성장해온 것 같다. 그 길이란 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고, 그저 하나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열네살, 카오슝에 살던 때다. 점심을 먹고 나면 걸어서 높은 관리들이 사는 관저로 갔다. 높은 담을 넘어 망고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훔쳤다. 우선 배불리 먹고 나서, 열매를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담 위에서 먹으면서 사람들이 오지는 않는지 뒷길로 누가 다니지는 않는지 신경이 쓰였다. 망고를 먹긴 먹는데, 이제 바람이 불 것이고 매미가 울 것인데 그 소리는 과연 들릴까. 그런 신경을 쓴다는 게 하나의 영화가 아닐까. 영화란 건 하나의 주어진 상황, 분위기, 정서를 확대시키고 응집시키는 것이 아닐까.

젊었을 때는 빠르고 분명하고 직접적인 영화를 찍었는데 나이 먹으며 느리고 천천히, 사물을 더 생각하고 더 거리를 주면서 찍게 된다. 젊을 때는 한꺼번에 찍는 맛이 있었는데 나이 들어서는 생각을 통해서 더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볼 수 있다.

왜 감독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봤다. 나는 사실 고교를 졸업 못했다. 성적도 나쁘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은 불량학생이니 깡패니 하고 표현하겠지. 군대에 있으면서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969년 2월에 제대하고, 7월에 국립예술전문대 시험을 봤다. 학교에 들어가서 감독에 관한 영어 원서를 찾았다. 영어는 중2부터 영어시험을 한번도 통과하지 못한 실력이어서 책 옆에 사전을 갖다놓고 찾아가며 보았다. 서문의 내용은 끝까지 간신히 봤는데, 서문 맨 뒷줄에 써 있기를 ‘이 책을 다 읽어도 너는 감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천재만이 할 수 있으니까’. 그걸 읽고 책장을 덮어버렸다. 그런데 내가 천재란 생각도 안 들지만, 영화를 만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날 갑자기 아,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동년왕사>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도 아팠고 아무도 내게 관여하지 않았다. 책방에서 무협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더이상 볼 게 없어서 옆에 있는 연애소설을 또 다 읽었다. 수많은 연극과 인형극을 다 보고 영화도 엄청나게 봤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담을 넘든 어떻게든 해서든 새로운 게 나오기만 하면 꼭 봤다. 싸움도 많이 했다. 밖에서 온 동네 양아치들과 많이 싸웠다. 도박도 많이 했다.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훔쳤고, 뭐 팔 게 없나 하고 깡통이라도 들고 나갔다. 나는 들판에서 막 자란 야생의 양아치라고 할 수 있다.

조조가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고 한 말이 있는데 나는 거꾸로 내가 세상에 지겠다, 세상에 복종하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내와 딸은 집에 있는 돈은 다 밖에 갖다주고, 그게 네가 세상에 복종하는 거냐고 비아냥댔다. 밖의 일만 신경쓴다고 말이다. 대만 뉴웨이브가 나왔을 때 커피분말이 물에 녹듯이 나도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남들과 잘 어울리는 그런 성격이 날 감독이 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란 바로 스탭들과 조화를 이뤄가며 일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딸이 10년 전에 미국 유학 갔을 때 일이다. 아마 랭귀지 스쿨에 다녔을 때일 것이다. 작은 엽서에다가 짧게 써서 내게 보냈다. 그 아이는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림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다 그렸다. 신발, 옷, 필요한 것들을 그려 보냈는데 그런 것을 미국으로 부치라는 얘기였다. 아내는 엽서 그림을 보고 이 옷이 맞나, 저 옷이 맞나 찾아다녔다. 나는 아이 운동화를 찾아 칫솔로 빨았다. 운동화 밑창을 치약으로 하얗게 닦으면서 문득 내가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이게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부모와 딸의 관계가 인물의 행위를 통해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생활이 습관이 된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적으로 항상 관찰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비전문배우들을 많이 썼다. 길을 가다가도 어, 느낌 좋은데 하면 데려왔다. 그래도 연기 경험이 없으니 그런 친구들을 불러 연기를 시키면 처음엔 모두들 긴장한다. 그래서 카메라를 뒤로 멀리 빼서 찍는다. 그러나 연기라기보다는 일상생활을 주문하면 긴장할 게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상은 익숙한 거니까. 엄마가 아침 밥을 하기 전에 일어나고 밥상 앞에 앉는 과정을 평상시 생활하듯 하게 해서 영화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주면 되는 거다. 그래서 밥을 먹는 신이 자연스레 많아졌다. 밥먹는 신을 찍을 때는 배우들이 가장 배고플 때로 잡는다. 소품으로 쓰는 밥도 가장 따뜻하고 맛깔스럽게 한다.

그런 다음엔 배우에게 ‘넌 지금 답답한 마음으로 먹어야 해, 무슨 생각으로 밥을 먹어야 해’라고 요구를 한다. 비전문배우를 쓸 때는 배우가 상황에 빠지도록,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몰두해서 연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비전문배우를 데리고 찍으면서 나의 롱테이크와 스타일이 확립되었다. 그들을 데리고 롱테이크로 찍다보면 그 안에 나름의 시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롱테이크 안에서 인물의 흔적이 따라서 표현되는 것이다. <카페 뤼미에르>를 도쿄에서 찍을 때, 인물의 직업이 무엇인지 배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도쿄 지도를 구해서 이런 직업이 있는 사람은 과연 어디 살까, 지하철을 타면 어디서 타고 내릴까를 고민했다. 이런 걸 분명히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공간에 출현할 때마다 왜 여기 출현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을 왜 여기에 나타나게 해야 하는지 분명해지고. 실내도 마찬가지다. 실내를 무대로 생각해서 찍으면 안 된다. 무대라고 생각해서 연기하면 안 된다. 그럼 부자연스럽고 인물이 흩어지고 집중이 안 된다. 공간에서 인물의 흔적이 드러나면 영화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영화란 뭘까. 대만 뉴웨이브란 뭔가. 가장 중요한 건 사실주의다. 미술처럼 스케치부터 배워야 한다.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한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현실문제였다. 뉴웨이브에서 ‘뉴’란 건 이전의 시점이나 태도와 다르다는 거다. 그래서 실험적 성격이 강하다. 이건 개인적인 영화이고 제작비가 저렴하고 실험정신이 강하다. 관객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찍을 때 관객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걸 찍는다. 주류 상업영화를 보다보면 일정한 시각을 갖고 찍은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많은 이가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데 과연 자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는 대체 뭘까. 사실 이런 건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

아까 말한 책에서 감독은 천재라고 표현되었지만, 여태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쌓여왔던 것들, 그리고 현재도 계속 책을 보고 세상을 관찰한 게 쌓여서 감독을 만드는 게 아닌가. 그러니 천재만이 감독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

<동년왕사>

누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 시골서 자란 아이다. 늘 쭈그리고 앉아서 곤충을 잡아 성냥갑 안에 넣는 게 취미다. 어느 날 조카가 잠자리를 잡아서 물이 가득한 대야에 계속 넣다 뺐다를 반복하더라. 혼잣말로는 계속 잠자리가 알을 낳고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말이지. 그런데 얼마 뒤에 정말 잠자리 알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조카에겐 나름대로 자기만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애가 여덟살 때 오스트리아에서 누군가 와서 대만에서 절대음감이 좋은 아이를 찾아나섰다. 그런데 우리 조카가 뽑혔다. 어려서부터 곤충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곤충의 소리에 더 예민해지고 그게 음감과 청각을 발전시킨 거다.

이 꼬마 애가 어느 순간에 곤충을 그렇게 보게 된 건 무의식적으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치 내가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레 영화에 빠진 것처럼. 무협소설과 희곡과 중국 전통문학과 영화에 빠지다보니 어느 한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를 하게 된 것처럼. 대만 뉴웨이브영화가 발전하게 된 데도 여러 요인이 있다. 대만의 경제가 좋아졌고, 중앙전영공사에서 새로운 사람을 배양했고, 새로운 걸 기획했고, 유학파가 돌아오고 이렇게 모든 게 다 모여서 탄생된 거다.

그러나 대만 뉴웨이브가 상업주류영화는 아니다. 뉴웨이브가 나왔을 때 주류영화는 침체를 겪었다. 결국 대만영화 전체가 나빠졌다. 그걸 대신한 게 홍콩영화다. 동아시아 영화 발전의 계기는 경제 발전이다. 아시아영화는 대만의 상황을 따라가면 안 된다. 경제 발전을 발판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가야지 무너지면 안 된다. 아시아의 특수한 전통을 발판 삼아 서양과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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