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본때를 보여주마. 그게 바로 나다. 여기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니까.” 묵시록적인 도시의 이미지들에 섞여 들려오는 폴 제프리(존 딜)의 무시무시한 다짐의 목소리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비롯하여 각종 기기들을 장착한 개조 차량을 몰고 거리를 쏘다니며 목표물을 찾고, 터번을 쓴 아랍인만 보면 테러리스트 용의자로 취급하며, 그들이라면 세탁물 세제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의심하며 뒤를 쫓는 전직 특수부대원 출신이자 과거의 망령으로 얼룩진 과대 피해망상의 애국주의자다. 그의 전화벨 소리조차 미국의 국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시 내 집, 내 조국으로 인도해주셔서…. 오래 떨어져 있어서 낯설지만, 돌아와서 기쁩니다.” 폴 제프리가 미국의 안존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혹은 그렇거나 말거나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그때, 멀리 이스라엘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들어오는 소녀 라나 스웬슨(미첼 윌리엄스)의 기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오랫동안 고국을 밟지 못하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부모를 따라 외국 생활을 해온 이 소녀는 고국에 발을 딛는다는 것이 꿈같고, 엄마의 편지에 답장이 없는 삼촌을 만나 죽어가는 엄마의 마지막 편지를 꼭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가 찾는 유일한 혈육, 삼촌이 바로 폴 제프리다.
우연찮게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이 아랍인 핫산이 살해당하는 사건인데, 폴은 그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하여 쫓고 있었고 이제 막 선교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라나는 핫산에게 점심을 배식한 것을 계기로 그와의 일면식을 나눈 뒤였다. 서로 전화로만 목소리를 확인했던 라나와 폴은 핫산의 살해현장에서 드디어 만나고, 서로 다른 목적이지만 같은 여행길을 떠난다. 폴은 핫산의 죽음이 테러 집단의 배후와 관계가 있다며 그 근거지를 소탕하겠다고 나선 것이고, 라나는 그런 폴을 보위하기 위해서, 한편으론 핫산의 시신을 친척에게 인도해주기 위해 같이 나선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닌 폴과 라나의 여행으로 영화는 흘러간다. 그러나 빈민의 LA 한 귀퉁이에서 출발하여 핫산의 이복형제가 살고 있는 사막의 도시 트로나에 잠시 머무른 뒤 다시 영화가 끝나는 뉴욕에 도착할 즈음이 되면 두 사람은 놀랍게도 같은 태도로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폴은 라나의 편에 서게 된다.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어디론가’ 찾아오거나, 사람이 되었든 사물이 되었든 마음이 되었든 ‘무언가를’ 찾아나서거나 하는 것은 빔 벤더스가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문제제기하고 또 해법을 구하는 과정의 반복 양상이다. 그를 ‘길의 왕’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은 그 잠정적인 여정을 통해 혜안에 닿을 수 있다는 빔 벤더스의 무구한 믿음 때문이다. 또는 달리 생각하려고 해도 결국은 그 형태에서 다시 출발하곤 하는 그의 천성적 역마살 때문이다. <랜드 오브 플렌티>는 그 여정의 반복이다. 흔히 빔 벤더스의 주인공들이 길 위에 있을 때 그들은 결점을 찾아 보완해나가는 것이고, 미진한 정체성의 일부를 찾아 취합하는 것이고, 특수한 고행의 순간을 거쳐 일반의 평화에 다다르는 것이고, 불안을 탈피하려하지만 다른 더 큰 불안을 만나 오히려 힘을 얻는 것이고, 어쨌든 좀더 옳은 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 <랜드 오브 플렌티>에서 그 주인공들이 순례하는 그 땅은 아직 혼돈의 땅일 뿐, 더 옳은 삶의 땅이 아니다. <랜드 오브 플렌티>라는 반어적인 제목이 알려주듯 이 영화의 초반에서 빔 벤더스가 보여주는 미국의 초상은 그래서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풍요의 땅’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제목이 한번 더 반어적인 것은 미국이 지금 풍요롭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소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간단한 바람을 누구나 전달받도록 되어 있다.
빔 벤더스는 9·11 이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해 있는 정신적 공황 상태를, 선과 악의 모순된 정의를, 그 축을 상징하는 듯한 두명의 상반된 두 인물의 동행길에서 포착하고 또 수정해내고자 한다. 두 인물의 공통점이 단지 나라를 사랑하는 미국인이라는 것, 단순해도 그게 결정체다. 결국 핫산이 백인 아이들의 무심하고도 장난스런 총탄에 맞아 죽은 희생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폴은 헛된 애국의 자세에서 벗어나 라나의 보편적인 인간애에 점차 동화되기 시작한다.
빔 벤더스는 명민함을 벗어나 다른 어떤 불가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에는 실패한 작가다. <랜드 오브 플렌티> 역시 3주 동안의 짧은 촬영 기간 탓인지 심심하게 얽힌 구성, 여전히 절실한 쓰임새보다는 심미안이 훨씬 더 도드라지는 음악의 효과없는 용례(빔 벤더스는 종종 자신의 훌륭한 음악적 심미안 탓으로 오히려 영화 전체를 한계 밖으로 뚫고 나가지 못하는 경우들을 만든다), 너무 단순하여 외면당할 수도 있는 메시지 등을 문제 삼아 단조롭고 힘없는 드라마 일반에 그쳤다고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왜 평이한 감상주의적 시선을 동원하여 9·11 이후 실제 발생하고 있는 문제의 초점을 흐리냐고 비판을 가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적 박애주의를 발휘하는 라나가 오히려 미국의 보편적 박애주의의 함정을 고스란히 되풀이하여 웅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 일이다. 외부인인 당신이 주제넘게 미국인인 양, 왜 그 일부가 되어 미국의 희망을 거론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랜드 오브 플렌티>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담으려 한 영화 같지는 않다. 9·11 이후를 다룬 몇몇 수준급의 영화들 중 한편일 뿐이고, 빔 벤더스의 대표작이 되는 것에도 미진하다. 단지 욕심내지 않고 작은 진심으로 만든 소품으로서는 그 몫을 충분히 다한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런 자막이 떴다가 사라진다. “언젠가는 진실이….” 이 말이 출현했다 사라지는 태도, 즉 분명치 않고 어렴풋이 희망하는 그 태도, 그것이 외부자로서 지킬 수 있는 빔 벤더스의 태도였을 것이다. 폴에게 전달된 라나 엄마의 편지에는 라나를 맡아 아빠의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의 내용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 편지의 진짜 역할은 라나가 폴을 맡아 변화시키도록 하는 인과성의 기능 자체다. 빔 벤더스가 영화의 형태로 미국에 보낸 이 편지도 그런 변화를 염원하고 있다. <랜드 오브 플렌티>는 빔 벤더스가 미국에 보내는 손으로 쓴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