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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기행: 이란 [3] - 검열·제작현장

검열의 벽과 제작 현황

파흐란 메흐란파르

<사랑의 전설>

파흐란 메흐란파르와 바흐람 베이자이를 만난다는 것은 이란 내 소수민족의 문제와 검열의 문제를 만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쿠르드족 출신의 감독 메흐란파르는 <종이 비행기> <생명의 나무> <사랑의 전설>로 유명하다. 만난 감독들 중 가장 선한 인상을 보여준 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쿠르드족, 혹은 이웃하고 있는 탈레쉬족에 이르기까지 소수 민족의 언어와 풍습과 전통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시학과 다큐멘터리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스스로는 “드라마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다. 서로를 키워주는 것이다. 키워주는 것은 사랑의 징표이다. 키워주지 않는 것은 증오의 증표이다.” 외우는 시 한편을 들려달라고 하니, 서슴없이 즉석에서 몰러너(외국에는 ‘루미’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고 한다)의 시를 한수 들려줄 만큼 낭만파다. 그러나 상당한 유명세를 갖고 있는 해외의 상황과 달리 메흐란파르 영화의 국내 상영은 힘들기만 하다. 그의 영화들은 쿠르드족 지역에 짧게 상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식으로 상영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메흐란파르는 같이 일하던 제작자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졌다고 긴 한숨을 쉰다.

바흐람 베이자이의 집에는 책들이 가득하다. <바슈> <여행자> 등 영화 대표작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문학 및 연극에 대한 저술서를 냈고, 연극연출도 여러 편 한 그는 혁명 전 영화세대로서 연극적인 영화 또는 실험적인 영화들을 만든다. <여행자>는 그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하면 언니는 동생의 결혼식에 간다. 그러나 차를 타기 직전 뒤돌아 카메라를 향해 쳐다보며 “우리는 지금 동생 결혼식에 갑니다. 하지만 곧 죽게 될 겁니다”라고 말해 관객을 따돌린다. 결국 죽은 언니는 끝내 동생의 결혼식에 거울을 들고 유령이 되어 찾아온다. 그는 이 영화의 주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실패에 겁을 내지 않는 자들은 죽음 앞에도 절망하지 않는다. 난 암울한 현실에 혼자 대항하여 현실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흐람 베이자이

<여행자>의 이 주제는 영화 검열을 대하는 베이자이의 강철 같은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작품들이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던 베이자이, 그가 들려주는 검열과의 싸움 하나. “<여행자> 상영 당시 처음에는 37장면을 삭제하라고 통보받았고, 나는 하지 못하겠다고 알렸다. 그뒤 그 영화는 상영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다시 9장면을 줄이면 된다는 말에도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자신들의 비용을 거두기 위해 상영 직전 삭제했고, 결국 이 영화는 아무런 선전도 없이 아주 나쁜 조건으로 상영되고 말았다.” 베이자이는 “이번주 토요일에도 왜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 승인을 아직까지 안 해주는지 협회에 따지러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에게 검열과의 싸움은 진행 중이다.

이란영화의 문제점이 바로 이 열악한 상영과 삼엄한 검열의 조건이다. 그만큼 표현의 제약이 많다는 얘기다. 가령, 대략 4∼5단계 정도의 사전 검열이 있는데, 그걸 모두 통과한다고 해도, 3등급으로 분류받아 개봉 허가를 받는다. 꽉 죄는 여성의 옷, 여성 신체의 일부 노출, 여성과 남성의 육체적인 접촉이나 애정행각, 군인이나, 경찰, 가족에 대한 조롱, 수염 기른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캐릭터, 외국 음악사용 등이 금지 사항들이다. 베이자이의 한탄.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남녀를 서로 떨어뜨리기 위해 뭔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불필요한 시간을 소요해야만 한다. <여행자>에서 나는 같은 장소에 있는 커플을 따로 떨어뜨리기 위해 남편은 쇼핑을 하고, 아내는 다른 곳에 머물거나, 여자는 창가에, 남자는 창 밑에 있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고 한탄한다. 사전 검열의 조항들을 지키지 않을 경우 상영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켰다고 해도 겨우 통과한 영화는 질과 상관없이 나쁜 조건을 부여받는다. 가령 3등급 중 1등급을 받아야만 텔레비전에서 광고도 하고 좋은 시기에 좋은 극장에서 상영을 할 수 있다. 만약 3등급을 받으면 텔레비전 광고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시기에 극장에 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형식이 발전했다는 일부 내부의 논리가 있지만 그건 위험한 발상이다. 이란영화의 미래를 진지하게 말하는 자리는 여기여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현실을 먹고 자란다

이제 여행의 끝에 왔다. 이란의 공휴일인 금요일에 본 예배장면이 눈에 선하다. 전 국민의 90%가 넘는 무슬림들은 개인예배 외에도 금요일이면 집단예배를 위해 사원을 찾는다. 테헤란 시내 가장 많은 무슬림이 모여 기도를 올린다는 테헤란대학. 엄청나게 많은 인파 중에도 차도르의 물결과 녹색 군인의 물결이 가장 눈부시다. 정문 앞에서 서로 교차하더니 각자 정해진 남녀 입구로 따로 휩쓸려 들어간다. 대학 내부로 들어가면 연이어져 걸려 있는 천조각이 남자와 여자의 기도 장소를 표식으로 가른다. 남자들의 경우 꼭 정해진 장소에서만 기도를 올릴 필요는 없다. 몇몇 사람들은 돔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작은 카펫을 깔고 기도를 올린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화장실에 줄을 서서 예배 전 손발과 얼굴을 닦는 의식 ‘우두’를 행하는 장면은 기도를 올리는 장면만큼이나 성스럽다.

의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군인 한 무리에게 웃음을 보낸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도 웃는다. 그들에게서 둔덕에 앉아 꽃을 따던 <체리 향기>의 그 군인들을 본다. 끝끝내 이곳의 현실은 영화와 구분되지 않으려나보다. 그러나 이제 놀라지는 않는다. 구분되지 않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그들의 생활과 의식과 사고 어딘가에서 풀려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시네마>에서 이란영화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 천일야화의 방법을 사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살롬! 시네마>에서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밀려드는 현실의 사람들을 포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비록 영화작업을 위해 타지키스탄으로 건너가 있는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또 한명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포함하여 다른 이란의 감독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정의 귀중한 결과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소년이 끝내 공책을 전해줬다면, 나는 적어도 이란영화의 한 페이지를 건네받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헤란을 떠나오는 날 일행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나는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연락할 길이 없었다. 공중전화기 앞에 한참을 망연자실 서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무섭고 무뚝뚝하게 생긴 어떤 남자에게 전화카드를 빌려 전화를 한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준다. 손짓 발짓과 미소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니, 이 무뚝뚝하면서도 정 많은 남자를 언젠가 어느 이란영화 한편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란영화의 역사

1969년 <암소>로 해외에서 인정

다리우스 메흐르쥐

이란영화의 태동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주장이 있다. 1900년 왕궁에서 일하던 미르자 에브라힘 칸 아카스 바시가 촬영한 것이 그 시작이라는 설과 1930년에 촬영된 최초의 극영화 오바네스 오가니안스의 <아비와 라비>를 그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다. 이미 1920년경부터 이란에서는 검열의 형태가 존재했다. 혁명 전까지 대체로 대중의 입맛을 맞추던 영화들은 이른바 ‘필름 파르시’(Film Farsi)라 불리던 장르들로서, 인도와 이집트 등지의 상업영화를 모방한 형태의 영화들이었다. 전문적인 상업영화로서의 스타일이 결정된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다. 동시에 1963년에는 시인 포루흐 파로허저드가 생전의 단 한편의 영화, 그러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검은 집>을 남기면서 한획을 그었다.

이란영화가 국내를 벗어나 외부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다. 무엇보다도 이란영화의 예술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건 다리우스 메흐르쥐의 1969년작 <암소>였다. 이때가 혁명 전 이란영화 뉴웨이브가 태어난 시기다. 자신의 암소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소라고 행세하는 어느 농부의 이야기인 <암소>는 정부로부터 상영금지당했지만, 1972년 베를린영화제에 몰래 출품되었고, 자막이 없는 상태로 상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면서 이란영화의 건재함을 과시했다(다리우스 메흐르쥐는 이번 23회 파지르영화제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이란영화는 혁명을 지난 80년대 이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을 중심으로 다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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