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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기행: 인도 [3] - 영화촬영현장
글·사진 오정연 2005-08-30

예술영화 촬영현장을 찾아서

대부분의 발리우드영화는 <마리골드>처럼, 음악과 춤을 벗삼아 만들어질 것이다. 인도인들은 적어도 인도영화에서 춤과 노래는 기본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다. 대부분 예술영화로 통하는 그런 영화들은 극장에서 대규모로 개봉되기도 힘들고, 외국의 영화제를 제외하면 찾는 사람도 적다. 무엇보다 제작비를 조달해 영화를 찍는 것이 쉽지 않다. <바다로 가는 먼 길>로 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던 자누 바루아 감독이 뭄바이에서 <나는 간디를 죽이지 않았다>를 찍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루아 감독은 분리주의자들과 정부의 내전으로 가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아삼주 출신으로, 여태껏 아삼을 제외한 인도 내 어떤 극장에서도 자신의 영화를 상영해본 적이 없다.

바루아 감독의 신작 이야기를 취재진에게 전한 것은 배우 아누팜 케르(<슈팅 라이크 베컴> <신부와 편견> <딜왈레…> 등)였다. 인터뷰 도중, “소규모 예술영화에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좋은 영화가 돈이 없어서 제작이 어렵다기에, 제작자로 나선 영화에 출연 중”이라고 말했던 것. 알츠하이머 때문에 자신이 간디를 죽였다고 믿는 전직 교수(아누팜 케르)와, 그런 아버지의 죄책감을 씻어주기 위해 거짓 재판까지 열어주는 딸(우르밀라 만통드커)의 관계를 그린 이 영화는 춤과 노래는 없지만, 가족을 다룬 전형적인 발리우드영화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 케르는 물론이고, 50여편의 발리우드영화에 출연했던 톱스타 우르밀라 만통드커 등 화려한 캐스팅을 보더라도, 이 영화는 예술영화와 대중영화의 경계에 서 있다.

국내 독립영화 현장과 비슷

붐오퍼레이터 딜립 타우레

남녀배우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아누팜 케르

실제로 보니 다소 엄격해 보인다는 말에, 인자한 웃음과 따뜻한 포옹을 함께 선사한 케르는, 갑작스런 촬영현장 방문 요청도 기꺼이 허락했다. 허름한 초등학교 건물 안에 자리잡은 <나는 간디…>의 촬영현장. 가짜 재판신을 촬영 중인 그곳은 필름시티의 으리으리한 스튜디오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익숙한 기자재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스탭들은 갑자기 찾아온 이방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우리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필름시티의 스탭들과는 사뭇 다르다. 실제 카메라가 들어선 촬영장소는 공간이 너무 협소해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스름이 깔린 건물 밖을 맴돌며 기웃거린다. 비교적 한가해 보이는 조명부 스탭에게 조명기를 가리키며 한국에서도 이런 걸로 영화를 찍는다고 말을 걸자, 다른 동료까지 끌어들여서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로부터 이틀 뒤. 뭄바이의 공원에서 촬영 중인 <나는 간디…>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마침 점심시간인지, 함께 출연하는 파르빈 다바스(<몬순 웨딩>)와 커피를 마시던 케르가 디저트를 권한다. 스탭들 역시 부서별로 흩어져 식사를 배급받는다. 발리우드 스탭조합이 규정한 점심시간은 정확히 1시간. 촬영은 오후 2시에 재개된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임권택 감독의 안부를 묻는 자누 바루아 감독은 현장에서 매우 조용하다. 그 흔한 메가폰도 없고, 언뜻 보면 나서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제작자 케르가 감독처럼 보인다. 얼마 뒤, 아버지와 산책 나온 딸이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짜 재판을 도와줄 젊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위한 세팅을 마쳤다. 원경에 비둘기들을 모아놓고, 젊은 남자는 잔뜩 감정을 잡고, 만통드커는 바루아 감독과 뭔가를 의논한다. 한 테이크가 끝난 뒤. 두명의 배우와 배우 겸 제작자, 그리고 감독은 나란히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감독은 OK. 만통드커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추가 테이크를 요구하지만, 제작자인 케르는 이를 막는다.

케르와의 친분으로 생전처음 노래와 춤이 필요없는 영화에 출연 중인 만통드커는 “이 영화 속의 내 모습은 좀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이전 영화에서는 인형 같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맨얼굴로 등장해야 하는 이런 영화는, 여배우로선 도전이지만 기회가 주어져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화려한 필름시티와 비교할 때 <나는 간디…> 현장은 확실히 화장기 없는 얼굴에 가깝다. 광고일을 하다가 영화계에 뛰어들었다는 27살짜리 스크립터는 “언젠가 감독이 되고 싶다”며 수줍게 웃는다. 디지털테이프가 아닌 릴테이프에 배우의 음성을 녹음하는 49살의 붐오퍼레이터는 “배우의 연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위치가 좋아서” 30년간 붐마이크만 들었다. 필름시티에선 발에 채일 정도로 흔했던 스모그 기계가 없어, 여기선 숯처럼 생긴 뭔가를 태워 연기를 만들어낸다.

<나는 간디를 죽이지 않았다> 자누 바루아 감독 인터뷰

“춤과 노래가 전부는 아니다”

-간디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점점 비폭력의 정신을 잊어가고 있다. 인도인들은 지금도 간디에 대해서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의 이상을 믿고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오면,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간디는 더이상 없는 것 같다.

-발리우드의 유명배우들과 함께 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일정 정도 항복의 의미로 봐도 좋은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 처음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는 시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제작에는 점점 돈이 많이 들고, 그 돈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게 됐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왜 춤과 노래가 나오지 않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기해하며 좋은 연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작자 역시, 춤과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비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데 전념하고 싶다.

-당신의 영화는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지만, 정작 인도 사람들은 당신을 모른다.

=인도인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슬프긴 하다. 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 내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기억을 들려달라.

=1996년에 내 영화 <바다로 가는 먼 길>이 부산에서 상영됐는데, 정말 대단했다. 서울에서부터 영화표를 사서 부산에 온 여고생도 있었다. 그중 한명은 내 영화가 샤루칸이 나오는 영화로 알고 왔다는데, 춤과 노래가 없어서 매우 놀랐다고 하면서도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발리우드의 변화를 찾아서

거린다 차다와 같은 NRI(Non Resident Indian: 해외거주 인도인) 감독과 작업경험을 가진 아누팜 케르는, 예전의 소박한 발리우드가 그립다고 말한다. “인도의 영화산업은 점점 조직적이고, 전문적이 되어간다. 시간과 필름을 낭비하는 NRI 감독의 현장과 비슷해진다. 하지만 인도는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만드는 나라였다. 현장은 잘 조직되거나 전문적이진 않아도 가족 같았다.” 변한 것은 현장만이 아니다. 뭄바이 곳곳에 위치한 대형극장들은 멀티플렉스가 되기 위한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이제 중산층 이상의 관객은 소란스러운 대극장보다는 깨끗하고 정숙한 멀티플렉스를 선호한다. 멀티플렉스의 관객은 더이상 노래와 춤을 따라하지 않는다.

블럭버스터, 멀티플렉스 인기

초유의 히트작 <딜왈레…> 등 숱한 로맨틱코미디를 만들어왔던 발리우드의 대부, 야쉬 초프라는 최근의 젊은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경도되어, 발리우드만의 이야기를 잃어가는 것을 한탄한다. 그는 홍콩 시절 오우삼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메후나>, 할리우드의 공포물을 적절히 뒤바꾼 <까알>처럼, 부실하고 산만한 이야기의 최근 영화들이 반갑지 않다. 전통적인 발리우드 가족영화를 현대적으로 바꾼 젊은 흥행사, 카란 조하르에 대해서도 미묘한 입장을 취한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의 내용에 따라 성공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제작비 규모가 영화의 가치를 판단한다. 그러나 영화는 제작비가 아니라, 관객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 카란 조하르는 인도의 영화를 산업으로 발전시켰고, 블록버스터를 만들었지만, 나는 그저 그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이 제대로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기만을 바랄 뿐이다.”

발리우드의 대부 야쉬 초프라

젊고 촉망받는 흥행사 카란 조하르

26살에 만든 데뷔작 <쿠치 쿠치 호타하이>와 3년 뒤 완성한 <까삐꾸시 까삐깜>으로 본토는 물론이고 미국과 영국의 NRI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30대 초반의 카란 조하르 감독. 그러나 제작자로 참여한 <까알>을 포함하여 그의 손을 거친 영화 속 인물들은, 현대적인 외양을 지녔으되, 실상 누구보다 전통적인 사고를 가졌다. 다시금 옛 가치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대,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힌 NRI에게 그의 영화가 마침 잘 맞아떨어졌다는 인도 평론가들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제작자가 아닌 감독으로서는 절대 춤과 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하르에 비하면, 산제이 릴라 반살리는 좀더 실험적으로 보인다. 그는 엄청난 물량을 투여하여 만든 고전 <데브다스>로 역시나 엄청난 흥행을 달성한 직후, 발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춤과 노래없는 블록버스터로 일컬어지는 <블랙>을 만들었다. “주류 안의 영화들과 경쟁하면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래만 있는 영화나 안무만 있는 영화”를 생각했다는 반살리 감독은 청각과 시각, 언어까지 상실한 주인공과 스승의 헌신적인 관계를 그린 영화 <블랙>에서, 새로운 안무로서 수화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역시 인도영화 속 춤과 노래를, 계승해야 할 자랑거리로 여기는 건 마찬가지다.

발리우드는 인도밖에 못 만든다

보수적이고 비슷비슷한 발리우드영화를 온 마음으로 즐기지도 않지만, 발리우드에 대한 자부심도 극진한 영화평론가 미낙시 셰데는 말한다. “예술영화는 아무 데나 있지만, 발리우드영화는 인도밖에 못 만든다.” 맞는 말이다. 인도인의 생활과 사고, 철학 등을 고스란히 반영한 발리우드의 어떤 형식은, 온전히 그 문화에 젖어들지 않는다면 그저 흉내에 불과하다. 뭄바이에서 인터뷰한 10여명의 인도 영화인들은 한결같이 ‘인도스러움’에 무한한 긍지를 느끼는 이들이다. NRI 감독인 미라 네어의 <살람 봄베이>가 외국인의 관찰자적 시선에 그쳤음을 지적하고, 거란다 차다의 영화가 외국인들에게 전달하는 ‘인도의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문화’를 경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발리우드의 전통을 고수하든, 작은 변화를 꾀하든, 혹은 힘겹게 예술영화를 만들면서 발리우드를 근심하든, 그러한 마음은 한결같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관객이다. 야쉬 초프라는 더이상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관객에게 서운함을 표하고, 카란 조하르는 언제나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영화를 보아주는 관객층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도를 떠나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 말 한마디 없이 환한 눈인사를 주고받은 이들이 떠오른다. 진저리쳐지던 교통체증과 겨우 익숙해질 만했던 마살라 향마저 그립다. 어쨌거나 인도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것들은 인도 아닌 어떤 곳에서도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발리우드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문화를 반영하고, 문화 그 자체가 영화였던 그곳에서, 발리우드영화와 관객을 향한 어떤 가치판단도 무의미하다. 다른 모든 문화와 마찬가지로 발리우드영화 역시, 판단보다는 기꺼이 즐김이 먼저다.

발리우드를 향한 애증의 코멘트들

이것이 발리우드의 매력

-춤과 노래는 발리우드영화를 더욱 매력적이고, 활기차게 만든다. 덕분에 발리우드영화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처럼 순수한 오락이 된다. 그것은 정말 훌륭한 패키지다. _말래카 아로라(<딜세> 댄서)

-발리우드영화는 그 긴 상영시간과 뜬금없는 춤과 노래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이해받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춤과 노래는 발리우드영화와 뗄 수 없는 요소이고, 절대로 포기되어선 안 된다. 중국영화에서 쿵후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_아쉬토쉬 고리와커(<라간> 감독)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주제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 등장시키지만 않는다면, 춤과 노래는 정말 필요하다. _자누 바루아(<나는 간디를 죽이지 않았다> 감독)

-발리우드영화는 일상에 활력소가 된다. 50, 60년대의 할리우드영화와 매우 비슷하다. 오늘날 할리우드영화가 놓치고 있는 어떤 재미를 가지고 있다. _윌라드 캐롤(<마리골드> 감독)

-발리우드영화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분류가 되지 않는 유일한 영화다. 전세계의 어떤 장르의 영화로도 발리우드영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_카란 조하르(<까삐꾸시 까삐깜> 감독· <까알> 제작자)

-세계인들은 발리우드영화가 너무 좋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영화가 우리의 문화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얼마나 이국적이고 환상적인지만 얘기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반응을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_산제이 릴라 반살리(<데브다스> 감독)

-발리우드영화는 너무 쇼에 가까워지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하는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요즘의 영화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_야쉬 초프라(<딜왈레 둘하니아 레 자엥게> 제작자)

-발리우드영화가 점점 서구영화의 코미디, 스릴러 등 모든 장르를 결합하고 있다. 장르뿐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음반 등을 통해 제작비를 회수하는 등 관계된 모든 것을 팔고 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영화로 돈을 벌지만, 다음 세대들은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_수드힐 미슈라(<차멜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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