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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스크린으로 가다
2001-02-08

충무로 작가열전 (2) 김승옥

내가 단성사에서 <겨울여자>를 본 것은 고교진학 이후 처음 맞이한 여름방학 때였다. 물론 고교생 입장불가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볼 놈들은 어떻게든 보게 마련이다. 당시 자유연애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던 <겨울여자>는 내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자 가슴 설레는 개안이었다. 아하, 저렇게 막 주는 여자도 있단 말이지? 나도 빨리 커서 저런 여자들 품에 안겨야지! 덕분에 나는 <겨울여자>를 오래도록 기억한다. 이화 역을 맡은 장미희와 원작소설을 쓴 조해일, 그리고 감독을 한 김호선의 이름까지도. 그러나 이 빼어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바로 일찌감치 한국문학사의 신화가 된 단편소설의 귀재 김승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일이다.

김승옥은 너무 젊은 나이에 신화가 돼버린 인물이다. 나 역시 까까머리 중·고교 시절 연필심에 침을 묻혀 그의 놀라운 단편소설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중이던 1962년 <생명연습>이라는 단편소설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무진기행>(1964)으로 대중적인 명성까지 움켜쥔 다음, <서울 1964년 겨울>(1965)로 약관 24살 나이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모차르트급 작가다. 그는 김현이 말한 대로 최초의 한글세대 혹은 ‘4·19세대’의 대표작가로 ‘감수성의 혁명’이니 ‘전후문학의 기적’이니 ‘단편소설의 전범’이니 하는 찬사들을 수식어처럼 달고다니던 60년대 문단의 황태자였다. 그러나 이 문단의 젊은 황태자는 60년대 말에 이르러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김승옥이 문단을 떠나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바로 충무로였다.

그가 충무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대표작 <무진기행>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본인의 각색을 거쳐 각각 <안개>와 <황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두편 모두에서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고향마을 무진의 음악선생 인숙 역을 맡은 배우는 윤정희였다. 특히 전자인 김수용의 <안개>는 안토니오니풍의 세련된 연출로 당시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김승옥은 아예 내친 김에 김동인의 걸작 <감자>를 직접 각색하여 감독으로도 데뷔하는데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나치게 드러낸 탓인지 흥행에서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김승옥은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시작으로, ‘베스트셀러의 영화화’가 크게 유행했던 70년대 내내 최고의 각색자로 명성을 날린다. 김지연의 <내일은 진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조해일의 <겨울여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방황하는 이혼녀를 다룬 <강변부인>은 자신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로는 파격적인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충녀>와 <야행>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승옥은 70년대 최고의 흥행작가였다. 그런데도 그의 70년대를 들여다보면서 문득 서글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주인석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단을 버리고 영화판으로 옮겨간 이유를 묻자 “먹고살아야 했으니까”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나 과연 그뿐일까? 언젠가 김승옥과 함께 그의 고향인 순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한숨처럼 토해낸 음울한 고백이 있다.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잖아. 더이상 문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의 80년대는 더욱 가슴아프다. 박정희가 죽자 이제 다시 문학을 해야지 하며 막 장편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즈음 광주에서의 대학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것이다. 이후 그가 거의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다가 기독교에 귀의해 열렬한 전도사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우리의 야만적이고 비루한 현대사가 한 천재의 재능을 참담하게 짓밟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이유에서 시나리오를 썼든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런 뜻에서 <김승옥 전집>(전 5권, 문학동네, 1995)에서조차 시나리오가 제외된 것은 심히 유감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