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배우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물론 이것은 가능한 백만스물한 가지 이분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직접 눈을 맞추고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내심 그려온 모습보다 체구가 커서 놀라는 배우와 상상보다 작아서 당황하는 배우. 여의도 증권가의 마천루 앞에 선 배우 이순재(70)는 너무 작아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막연히 가늠하는 배우의 체구는 ‘품’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내가 품에 안을 수 있을 듯한 배우는 작게, 내 품에 넘칠 듯한 배우는 크게 느끼는 게 아닐까? TV 속 이순재는 항상 커 보였다. 밥상 앞에 웅크려 앉아 있을 때조차. 그리고 약간 두려웠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그가 김혜자에게 고함치기 시작하면 나는 TV를 보다가도 내 방으로 숨어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싶었더랬다.
휘황한 도시 밤거리에서 그의 사진을 찍는 안을 지지한 데에는, 사적인 기억 한 조각이 관련돼 있다. 고교 시절 어느 저녁, 퇴근한 아빠는 “약속이 있다”면서 조용히 나가셨다. 잠시 뒤 엄마와 나는 모처럼 둘이서 저녁을 사먹기로 하고, 집 근처 번화가로 나섰다. 그리고 그 거리 중간에서 아빠의 옆모습과 마주쳤다. 아빠는 어디로 갈지 막막한 표정으로 네온사인 사이에 가만히 서 계셨다. 나는 아빠를 생전 처음 보는 남자처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그런 거리와 각도에서 아빠를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묻고 답하지 않고 셋이서 백숙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칙하게도 나는 아마 이순재 선생을 그 기억 속의 프레임 안에 간절히 넣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작다고 느낀 것은 나뿐이었고 그것도 찰나였다. 길가의 시민들이 친근히 건네는 인사에 화답하고 자리를 옮겨 말문을 연 이순재 선생은 금세 다시 태산만해졌다. 묘한 연둣빛이 감도는 다갈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버릴 듯 광채를 냈지만, 겁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50년의 연기생활을 포함한 거대한 과거와 더 큰 미래였으므로.
-언제 들어도 내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저음이 인상적입니다. 남자들은 물론 누구나 변성기를 겪지만 그런 음성은 언제부터 갖게 되셨나요?
=젊었을 때부터 이랬어. 멜로드라마 할 때는 일종의 핸디캡이라고 했지. 미성이라면 최무룡씨가 대표적인데. 옛날에는 다 더빙을 했지만 우리 같은 목소리는 특색이 있으니 성우들이 기피했어. TV로 동시녹음 훈련도 돼 있는 터니, 일이 겹치거나 시한부 작품(수입 쿼터를 위한 편수채우기 영화)이 아니면 80%는 내가 직접 했어.
-<모두들, 괜찮아요?>(제작 마술피리)로 <물망초>(1987)에 특별출연 이후 18년 만에 영화로 돌아오셨습니다. 제작자는 원조 역(영화감독 지망 백수인 사위와 생계를 도맡은 딸네 집에 함께 사는 치매 노인)을 수락하실지 걱정했다는데 세부 조건을 의논하기도 전에 흔쾌히 승낙하셨다고요. 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했나요? 아니면 원조 캐릭터에 대한 욕심도 작용했나요?
=영화하고 싶다는 게 컸죠. 허준 역을 한 1976년작 <집념>이, 심혈 기울인 주연급 영화로서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이후 영화계는 열악해지고 상대적으로 TV가 바빠져서 영화와 멀어졌어요. 우리 영화가 침체기를 지나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임권택을 필두로 의지있는 작가들이 부흥을 이끌었지만, 한국영화가 아무래도 젊은이들 위주로 하니 나이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여가 미미했어요. 물론 카메오로 출연하라는 조건이면 다시 생각했겠지만, 제대로 된 기회가 오면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프로포즈를 받은 거지.
-TV에서는 아들, 손자 세대를 거느리고 사는 가부장으로 많이 나오셨는데, 원조는 딸 내외와 사는 노인입니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왕년의 바람둥이이기도 하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흥행하려면 보완할 게 많은데 어떤 목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가 걱정이 되더라고. 그런데 가만 보니까 회사도 감독도 작품성에 치중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 같아. 원조는 본가에서 쫓겨나 딸 집에 기식하는 상황인데, 치매라는 조건이 있어서 멀쩡하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딸이 딸인 줄도 모르는 지경이니까 현실에 구체적으로 민감할 입장의 인물은 아닌 것 같아요.
60, 70년대엔 하루에 영화 4편, 전쟁이었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랜만에 영화현장에 나오시니 변한 게 많죠?
=제작환경이 많이 달라졌습디다. 우리가 한창 할 때는 다작이었거든. 지금도 조연은 겹치기를 하겠지만. 나도 이제 겹치기 상태로 넘어가고. (살짝 흐뭇한 눈웃음이 돈다. 그는 영화 <파랑주의보> 출연도 결정해둔 터다.) 60, 70년대 바쁠 때에는 열편을 동시에 계약했어요. 심하면 아침에 눈떠서 점심 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까지, 저녁 먹고 통금 때까지, 그리고 통금 이후는 세트에서 하루 네편을 찍었어요. 그러고 돌아다니니 일년에 70∼80편 찍기도 했지. 전쟁이었어.
-그렇다면, 영상자료원에서 선생님의 출연작으로 검색되는 140편도 미비한 목록이겠군요.
=정확히는 몰라요. 어쨌든 당시는 가장 큰 비용이 필름값이니 무조건 많이 찍어서 경상비를 줄이려고 했지. 그런데 지금은 열컷을 종일 찍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 정도 작품은 TV 같으면 이틀이면 다 찍어!” 했지. (웃음) 그런데 이번에 보니 영화를 대단히 정밀하게 찍더구먼. 조명이며 카메라며. 이것이야말로 원래 영화가 추구해야 하는 제 길이 아닌가 싶어.
-동시에 영화 10편에다가 방송, 연극까지 하셨다면 연기 외의 생활이 상상이 안 되네요.
=거의 없죠. 신혼 초에도 한달에 길면 일주일 집에서 잤어요. 아이볼 틈도 없었지. 그래서 지금도 애들한테 영향력이 없어. (웃음) 당시 가장 고생한 배우가 문희, 남정임, 윤정희야. 앞서 활동한 도금봉만 해도 다작 시대가 아니었고, 개런티도 현찰 선불이었거든. 그런데 60년대로 넘어가면서 작품 수는 늘었는데 자본은 영세하고 보따리장수가 많아지니까 받을 돈의 1/4은 떼이고 약속어음이 횡행한 거야.
-그렇게 바쁘셨다면 출연작이 개봉해도 못 보기 일쑤였겠네요. 뵙기 전에 자료원에 가서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 남기남 감독의 <무협검풍> 등을 보았습니다. <모정에 우는 아들>에서는 선생님이 아버지가 아닌 아들을 연기하는 모습 자체가 제겐 무척 생경하더군요.
=영화 연기는 아버지 역 맡기 전에 끝낸 셈이죠. 아버지 역은 TBC 말기와 언론 통폐합으로 여의도로 옮겨오게 된 컬러 TV시대부터 했지. <풍운>의 대원군도 고종의 아버지잖아. 통폐합 이후 노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거야.
TV는 우리 세대가 다 오픈했어
-본격적인 탤런트 생활은 KBS에서 시작하신 거죠?
=TV는 우리 세대가 다 오픈했어요. 1957년에 종로 네거리에서 전파를 쏜 HLKA라고 한국 최초의 TV방송에도 출연했지. RCA 빅터라는 미국 회사와 합작한 건데 한국일보 장기영 선생이 이어받았지. 그러다 1961년 KBS가 문을 열 때 연극 연출가와 연기자가 그리로 다들 옮겨간 거야. 김혜자, 정혜선, 태현실이 KBS 1기생인데 이미 그전에 우리는 일을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우리가 전부 ‘뚜껑’을 열고 다닌 거야.
-그때는 전속 개념이 없었군요.
=그건 1964년에 TBC에서 생긴 것인데, 여자 셋 남자 여섯이었지. 남자는 나, 오현경, 이낙훈, 김성옥, 김순철, 김동훈이었고 여자 셋은 지금은 모두 현업에 없어. MBC가 생겼을 때 스카우트될 뻔했는데, 약속한 것을 뭘 뒤집나 싶어서 그대로 있었지.
-그런데 1980년 통폐합으로 의리를 지킨 방송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군요.
=점령이라도 당한 느낌이었어요. TBC에 우리가 가진 애정의 심도는 어느 간부 못지않았어. 이병철 회장이 방송을 무척 좋아했는데 나중에 그 양반이 우리와 헤어지면서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물이 맺혀선 악수를 하며 “나 알간? 나 알간?” 하더군. 자기 모를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연기란 항상 상대와 조화를 이뤄야지
-<막차로 온 손님들>을 보니 젊은 시절 모습은 최무룡 선생님과 비슷한 분위기가 있던데요.
=어쩌면 연기 형식이 비슷할지도 몰라요. 내 판단에 최무룡 선생은 제일 정확한 배우예요. 연기를 대단히 계산적으로 하는 거지. 좋은 선배 중에는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것이 작품성과 조화를 이룰 때는 정말 기막힌 효과가 나지만 연기의 또 다른 측면은 절제예요. 연기란 항상 상대와 조화를 이뤄야지 상대를 무조건 이유없이 압도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연기의 패턴이기도 해요. 그게 곧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의 사실주의적 연기거든. 신극운동 선구자인 유치진, 이해랑 선생이 모두 스타니슬라프스키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연극은 거의 그랬지요.
-선생님의 연기론도 그런 흐름 안에서 형성된 산물이겠군요.
=물론 영화연기 중에는 장 콕토의 <올훼>처럼 난해하고 대사가 상징적인 것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시절의 영화란 근본적으로 사람의 이야기였어. 네오리얼리즘 계열 영화에 많이 감화받았죠. 우리 세대는 영화 볼 때 제일 먼저 감독을 봤어요. 예컨대 가장 쉬운 윌리엄 와일러를 보면 웨스턴 <빅 컨추리>부터 미스터리 <광란의 시간>까지 장르는 달라도 그 작가가 가진 작품세계가 틀림없어. 영국 감독으로는 캐롤 리드에 심취했는데 나를 배우로 만든 게 리드의 <심야의 탈출>이에요. <햄릿>은 스카라에서 <심야의 탈출>은 국도극장에서 동시에 했지. 연기는 일절 생각도 않던 때인데도 저런 예술성이라면 인생 걸어볼 만하다고 느꼈어요. 당시에는 기가 막힌 영화가 많았지.
-옛날 영화가 요즘 영화보다 더 마음에 드시나요?
=그건 다 사람의 이야기예요. 지금은 공상, 과학, 도깨비 같은 이야기라 액션만 있을 뿐이지 연기가 없단 말이야. 옛날 영화는 좋은 교본이었어요. 진짜 명작을 봤다는 자부심에 떨렸지. 뒤비비에, 카르네, 클레르, 데 시카, 비스콘티… (점점 빨라지고 격앙된다)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을 봐요. 대사가 바로 시지. 그런 영화는 한번 봐서는 몰라. 빠지는 수밖에 없어. 그 의미와 영상의 상징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대학 4학년 방학에 돈암동 동도극장이라고 재개봉관이 있었어. 내겐 당시 살던 청파동에서 돈암동 가는 왕복 버스값과 극장값뿐 점심값도 커피값도 없었어요. 아침 9시 반에 표 사서 객석 한가운데 파묻혀 네번을 보고 나오니 깜깜하더라고. 그리고 국도극장에서 다시 보고, 논산 신병훈련소 가서도 그곳 영화관에서 봐서 <심야의 탈출>을 도합 일곱번을 봤어요. 근데 신고 안 하고 보러가는 바람에 탈영했다고 난리가 났었지. (좌중 웃음)
-요즘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 등을 거친 대배우들이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영화에 많이 출연합니다. 이야기가 원형적인 단순한 판타지일수록 배우의 깊이와 중량감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데에 중대한 역을 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한국의 ‘간달프’ 같은 역을 선생님이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나도 신구나 주현처럼 정말 몇 안 되는 개성있고 좋은 배우가 영화에 참여해서 조력하는 모습이 참 바람직하게 보여요. 그런 배우가 있으면 싸구려 연기 쓰는 것과는 영화의 상징성이랄지 품격이 달라지는 거지.
-1960년 실험극장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극회 중심으로 이낙훈, 여운계, 오현경 선생님 등과 함께 만든 곡절을 들려주세요.
=일단 서울대 연극회는 나랑 친구들이 재건한 거예요. 원래 있던 극회가 적자를 너무 내서 해산당했어. 장부를 보니 하루에 계란을 150개씩 처먹은 걸로 돼 있는 거야. (폭소) 어떤 놈이 떼먹었는지. 그래서 단과대 극회들을 지금 현대극장 대표인 김의경과 의기투합해 통합해서 예산을 넘기면 우리가 부담하겠다고 시작한 것이지.
-예술인들이 모이던 명동의 동방싸롱도 자주 오가셨다면서요.
=한국 현대연극의 중심이었던 극단 신협 멤버들, 영화인들, 문인들의 집합처였지. 대학을 갓 졸업한 우리는 그 근처를 맴돌며 자꾸 선을 뵌 거라.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어 바로 신협 정규 멤버로 스카우트되길 바랐거든. 그런데 이 어른들이 이상하게 젊은 친구들을 수용하질 않으시는 거야. 그래서, 결국 우리끼리 만든 게 실험극장, 민중극장이에요. 오히려 그것이 우리나라 연극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사건이 됐죠. 만약 그분들이 우릴 받아들였으면 그분들 방식을 추종했겠지.
-선생님의 영화, 연극을 접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은 김수현 드라마의 가부장일 것입니다. 선생님 경력에도 큰 영향이 있었는데, 그분 작품의 힘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대발이 아버지라는 특출한 캐릭터는 내게 하나의 전기를 줬다고 해도 될 거예요. 물론 이후 <목욕탕집 남자들> 등 다른 작품도 많은데 그 역할들이 일견 비슷한 것 같지만 다 달라요. 나도 대발이 아버지는 대발이 아버지로 끝냈지 그대로 재연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김수현 작가가 논의되는 것은 그만큼 내포된 어휘, 문학적 수련, 작품의 구도와 구성이 다른 작가와 차이가 나서야. 웬만한 작품은 우리가 대사를 많이 고치거든. 말이 안 되니까. 영화도 연극도 드라마란 언어, 말의 예술이란 말이지. 그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바로 김수현씨예요. 어려운 듯해도 읽어보면 딱딱 들어맞고 단어 하나를 뺄 수가 없어요. 왜? 구문이 무너지니까. 그러니 본인은 자신있게 그걸 연출자나 배우에게 강요한다고. 반면 어떤 작가 대본은 절반을 고쳐도 돼.
김수현 드라마는 토씨 하나 뺄 수 없어
-그렇다면 김수현씨 작품과 같은 드라마를 할 때와 말씀하신 대로 구문이 무너진 작품을 할 때와 임하는 기분이 무척 다르시겠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텔레비전 초창기에는 문인들이 전부 극본을 썼어요. 이를테면 한운사 선생 작품은 고전적이지만 멋이 있고 풍부한 식견이 있어서 대사 하나를 감히 배우가 고칠 수가 없었지. 70년대 후반 절필해버린 김희창 선생도 문학성 높은 작품을 많이 썼어요. 토씨까지 지적하면서 자기 작품 잘못될까봐 녹화현장에 붙어 있었거든.
-그건 대본을 빨리 넘겼다는 뜻이네요. <허준> <상도>를 쓴 최완규 작가가 대본이 늦는다고 선생님께 꾸중들었다고 하시던데요.
=아무리 대가도 늦게 쓰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야. <허준> 하면서 “이렇게 좋은 작품을 왜 이리 늦게 주냐? 이 좋은 작품을 잘하려면 임마, 배우가 연구할 여유를 줘야 할 게 아니냐? 이게 아무것도 아닌 작품이냐, 어떻게 이렇게 갖다 맡겨버리냐!”고 야단쳤죠. 최완규는 사극 장르를 지켜나갈 작가예요. 근데 그 정도 훌륭한 작품을 밤 2시, 3시에 쪽지대본 받아 읽기는 너무 아깝다고. 옛날에는 TV드라마를 연극하듯 했어요. 우리말 발음부터 놓고 연출가랑 배우가 한 시간을 토론했죠. 이것이 망가진 게, 다작이 되고 CF가 붙으면서예요. 구태여 정제할 필요없다는 타성이 생긴 거예요. 하지만 우리 방송사들과 자매관계인 <NHK>나 <후지TV> 가보면 제작 방법론이 완전히 달라요. 무조건 1년 전에 사전제작해서 시청률이 100이든 10이든 그대로 나가는 거야.
-최완규 작가 말씀을 좀더 드릴게요. 보통 TV드라마는 인물을 주인공의 스승, 원수 이런 식으로 최대한 단순히 정해놓고,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캐릭터를 완성해가는데 선생님만큼 영감을 준 배우가 없었답니다. 선생님의 유의태를 보면서 어떻게 이 인물이 허준의 인성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요.
=(쑥스럽게)아냐, 워낙 잘 썼어요. <집념>과 <동의보감>을 해본 나의 해석은 허준과 유의태는 거의 동일한 인물이라는 거예요. <허준>은 최완규의 창작성이 강한 역작이에요. 기막힌 작가다 싶어서 얼굴 좀 보자고 했더니 산적이 하나 나오더구먼. (폭소)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과 <한> <코리아 판타지>를 쓴 이상현 작가도 글이 훌륭해서 얼굴 좀 보자고 했더니 대추씨만한 사람이 나오고. (폭소)
-<세일즈맨의 죽음>을 1979년에 공연하고 2000년에 다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특별한 애착이 있나요? 듣기로는 더스틴 호프먼이 60대 주인공 윌리 로먼을 40대에 연기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자, 아서 밀러였든가, 역할은 60대지만 40대의 에너지가 없으면 감당 못할 역이라고 했다는데….
=맞아. 밀러가 그랬어. 1979년 실험극장에서 할 때는 당시 막내였던 김갑수가 웨이터 역도 하고 심부름도 겸하며 왔다갔다했지. (웃음) 갑수, 아 참 좋은 배우가 됐어요. 그뒤 방송 때문에 죽 연극을 못하다 <허준> 끝나고 석달 틈이 나기에 연극을 그것도 이왕이면 <세일즈맨…>을 하고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기회가 맞아떨어졌어. 밀러가 49년에 쓴 작품을 2000년에야 그 정서를 알겠더구먼. 공해니 환경문제니. 그래서 자르지 않고 두 시간 반 넘게 풀타임으로 했어요. 중간에 치매 증세로 대사가 딱 막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요.
-기꺼이 대답하실 질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민정당 창당 발기인이었고 1992년 민자당 중랑갑 지역구 의원으로 14대 국회에 등원하셨습니다. 그리고 15대 선거 때는 불출마하셨죠.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와 떠날 때의 심경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1980년 탤런트 협회장을 이낙훈씨가 했는데 비례대표를 배정받았어요. 전두환 정권이었지만 대중예술가들에게 집권여당에서 비례대표를 줬다는 것은 굉장한 사실이었어요. 우리로선 정권의 정체성은 차치하고 고마웠어요.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법률적으로 보완하고 사회인식상 재고해야 할 우리 문제가 너무 많았거든. 이 나라는 늘 문화정책을 말단에 두고 문화를 생활의 액세서리로나 생각하지 문화의 부가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었으니까. 특히 딴따라라 불리는 탤런트들은 방송이라는 절대적 조건 때문에 코가 꿰어 “너희가 국민 정서를 무시하는 거냐?”식의 대답만 듣고 고생이 컸지. 1년에 몇 만원 보수를 올리기 위해 투쟁했다고. 전두환 정권을 접촉해서 허락받고 1980년에 스트라이크를 했어.
-파업을 전두환 정권에 비공식적인 절차로 허락받았다는 말씀인가요?
=그것이 그쪽에 참여하며 끌어낸 조건이야. 일주일 파업해서 그때 한 20% 올린 것이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우리의 대표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달라질 것 같았고 친한 이낙훈에게, 가서 열심히 하면 도와주겠다 했더니, 돕는 조건의 하나가 입당이래. 정치 생각은 없었지만 핵심에 들어가면 뭔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일단 들어가면 탤런트 나부랭이인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그랬더니 자꾸 자리가 올라가더라고.
-지나치게 제대로 하셨군요. (웃음) 13대 선거에 750표 차이로 낙선하고 14대에 당선됐을 때 당시 방영 중이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이미지가 보수표를 결집했다는 비난도 있었는데요.
=난 이렇게 대꾸했어요. 그 드라마는 내가 입후보할지 정하기 전인 전년도 10월부터 시작했고 뜰 줄도 몰랐고 연기는 내 생업이다. 아내를 패는 짓 따위 하지 않는 <가족>이라는 더 좋은 드라마도 동시에 했는데 그 드라마 얘기는 왜 안 하냐.
-15대 불출마 선언은 대중예술인을 대변한다는 동기가 충분히 충족됐다고 보셨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환멸도 있었습니까?
=4년 동안 상임위 바꾸지 않고 문공위에만 있었어요. 방송국에 일임하는 것으로 돼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에 “동의가 있을 시에는”이라는 문구를 넣었고 사전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환멸도 있었지. 난 정치는 신의와 신조라고 생각해요. 선진국의 정당은 이념과 신념의 집합체야. 그런데 여기는 평생동지라더니 4년 지나니까 다 변하는 거야. JP는 안 된다던 사람이 JP가 당을 나가니 “현실이 그렁께” 하면서 따라나가기에 막 욕해줬지. 내가 울분을 느끼고 엎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이게 보통 헷갈리는 상황이 아닌 거지. (좌중 폭소) 또 내가 이미 60대인데 동료나 후배에게 폐를 안 끼치고 일할 수 있는 저력이 남아 있을 때 본업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이 알기 전에 <조선일보> 기자에게 미리 공언해버리고 그만뒀지.
연기 말고 하고 싶은 건 없어
-후배가 잘 못하거나 더 잘할 수 있는데도 안 하면 봐넘기는 선배가 있고 바로잡는 선배가 있는데 선생님은 후자 스타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생을 해온 입장에서 묵과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거든. 능력있는 젊은 친구들이 표현을 다 못할 때는 지적을 해요. 특히 관심있는 것은 우리나라 언어예요. 문자메시지니 뭐니 우리말이 훼손되고 원형이 다 없어졌어. 대본도 입에 붙지 않은 영어가 왜 그리 많은지. 작가들은 시대 흐름에 맞추어 쓰는 거라는데, 나는 모르겠어. 그렇게 해서 나오는 명작이 있는지. TV드라마로 예술 운운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예술적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어. 같은 장사를 하더라도 예술성과 본질을 갖고 장사하는 것과 철저하게 장삿속으로 가는 것과는 달라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죠?
=<파랑주의보>에서는 차태현의 할아버지로 관 짜는 노인 역인데 원조와는 전혀 다른 재미있는 캐릭터예요. 가을에는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라고 연극을 한편 더 해요. 이호성과 더블캐스트로.
-연기 외에는 해보고 싶으신 일이 없고요?
=다른 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