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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박하사탕> 특집 취재차 방한한 오구리 고헤이 감독
사진 이혜정김의찬(영화평론가) 2000-01-11

“나도 이따금 첫사랑을 꿈에서 본다”

일본을 대표하는 ‘휴머니스트’ 오구리 고헤이 감독(56)이 한국을 찾았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 아니다. 영화를 취재하러 왔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취재하기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오구리 고헤이 감독은 리포터 자격으로 일행에 합류했다. NHK는 매년 5편의 아시아권 영화를 선정해 제작을 지원하고 있는데 <박하사탕>은 작년에 낙점받은 영화 중 한편이다. 평소 오구리 고헤이 감독은 어드바이스 자격으로 NHK의 제작 지원작 선정 작업에 참여해왔으며 이번에 <박하사탕>이 한국에서 개봉하자 감독과의 대담을 겸해 한국을 방문한 것.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잠자는 남자>를 출품하는 등 오구리 감독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쌓아왔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 감독의 데뷔작 <진흙강>(81)은 재일한국인 가족의 빈곤하고 누추한 삶을 포착한 영화였으며 재일한국인 작가 이회성 원작의 <가야코를 위하여>(84)는 일본 국적의 여성과 한국 남성 사이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야기다. <잠자는 남자>(96)에선 ‘국민배우’ 안성기씨가 출연해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오구리 감독의 한국에 얽힌 인연은 개인사까지 포괄한다. 아버지는 일제 식민시대에 한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했으며(직업이 경찰이었던 탓인지 감독은 아버지에 관한 질문에는 끝내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감독의 아내는 재일교포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구리 감독이 한국인 못지 않은, 한국영화팬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방문 기간 동안 임권택, 이창동, 박광수, 이광모 감독 등과 만나 교류를 가졌음을 밝힌 그는 “이창동씨, 박광수씨”라고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국내 영화 연출자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좀 피곤해보인다.

=일정이 좀 빠듯했다. <박하사탕>이 개봉중인 극장을 찾아갔었고 신년회를 겸해서 한국 감독들과 자리를 가졌다. 임권택, 이광모, 이창동 감독이 합석했고 배우 안성기씨도 왔었다. 그리고 NHK 방송을 위해 이창동 감독과 대담을 했고 영화 <이재수의 난>도 봤다. 영화가 끝난 뒤 박광수 감독과 술을 마셨는데 늦게까지 자리가 이어졌다(웃음). 그리고 내 영화들을 특별상영하길 원하는 극장이 있어서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했다.

-<이재수의 난>은 어떻게 보았는가.

=좋았다. 자막없이 감독의 설명을 미리 듣고 봤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영화였다. 부분적으로 성공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민란이라는 소재를 관념이나 표면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까지 깊숙이 그려낸 영화였다. 새로운 시도와 영화적 힘도 느껴졌고. 아마도 박 감독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개인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적도 없고, 친구도 없는 시대극 말이다. 움직임과 액션은 영화에서 참 다루기 힘든 부분인데 재미있게 담아낸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박하사탕>도 보았다고 들었다. 개인적 소감을 듣고 싶다.

=이창동 감독 영화는 전에 <초록물고기>도 봤었다. 두 영화 모두 감탄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야기 전개가 탁월한 영화들이다. 난 이따금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가 스토리라는 것에 지나치게 지배당하고 있지 않은가 자문하는 경우가 있다. 이 감독은 영화에 왜 스토리라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박하사탕>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은 주인공 김영호가 군산에서 한 여성과 잠자리에 누워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자신들의 사랑에 관해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는가. 거짓이란 것, 즉 픽션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왜 필요불가결한 것인지 절절하게 말하는 대목인 것 같다.

-시대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가. 80년대 한국 사회가 배경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가능했다. 이창동 감독은 당시 한국 사회를 객관적으로, 그러니까 마치 남의 일처럼 표현하지 않았다. 감독 자신의 감정을 당시 시대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참 훌륭한 자세다. 사회의 모순을 감독 자신의 모순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하사탕>에선 총을 든 군인과 총구를 마주한 인물이 똑같은 인간으로 나타난다. 감독이 영화 속 인물을 제3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이창동 감독과 대담에서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었나.

-(잠시 생각하다가) 이 감독이 이런 이야길 했다. ‘촛불은 그냥 놔두면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바람불면 꺼져버린다. 영화는 그 불꽃을 손으로 가리고 보호해서 오랫동안 남아있게 하는 행위다’라고. 좋은 이야기였다.

-당신 영화는 <진흙강>을 비롯해 5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많다. <아름다운 시절> 같은,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도 봤나.

=동경국제영화제 기간에 봤다. 사실 아주 먼 과거보다 가까운 과거를 영화로 만들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역사를 감독이 직접 체험했으므로 더 고단한 작업이 되는 것이다. 감독의 개인적 문법없인 다루기 힘들다. 문법이 없다면 찾아나서야 하는 난관이 있다. 이광모 감독은 그점에서 자신만의 문법으로 시대를 고찰했다.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연출자다, 그는.

-이창동 등 한국 감독과 당신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 연배로 따지면 엇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세대인데.

=있을 것이다. 우린 전후(戰後)영화세대다. 세계전쟁 이후란 의미도 있지만, 영화가 활발한 시기가 지나고 잠잠해진 시기라는 의미도 있다. 말하자면, 시대가 영화에서 작가성을 요구하는 시대에 활동하는 감독들이다. 이제 영화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영화가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를 뒤따를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 일본에서도 ‘좋은’ 영화를 발견하기가 차츰 힘들어진다. 흥행영화는 꾸준히 있지만. 이점에서 이창동이나 박광수 등 한국 감독들은 훌륭하다. 시대와 그 속에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평가할만한 자세다.

-최근 본 다른 한국영화가 있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고…. 기억하긴 싫지만, 아니 보고난 뒤 금방 잊게되는 영화지만 <쉬리>도 봤다. <쉬리>에 대해 불만을 말해도 될까? (좋다고 하자) 한마디로 가치와 의미를 파괴하는 영화다.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상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뭐가 있겠는가. 사상? 오로지 보는 이를 흥분시키는데 집중한 영화 같다. <쉬리>를 보고난 뒤 이런 생각을 했다. 멀리 산이 하나 보인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이는 산을 개발해서 콘도와 골프장을 지을 상상을 할 것이다. 혹은 어떤 이는 산 주위에 아담한 공원과 산책로를 만들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전자가 <쉬리>의 감독이고 후자가 나다(웃음).

-당신 영화엔 유독 이별에 관한 대목이 많다. 이유가 무엇일까.

=글쎄, 특별히 슬픈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감수성의 문제라고 본다. 영상을 예를 들어 설명해볼까. 영화란건 어차피 사물의 일면만 보여주는 매체다. 같은 화면을 보여줘도 어떤 이는 기쁨을, 어떤 이는 슬픔을 느끼기 마련이다. 슬픔이란 화면 밖의 공간이 화면에서 이탈되었음에 관한 감정이다. 내 생각에 클로즈업은 만남의 의미다. 그러니 어떤 물체건, 사람이건 카메라가 가까이 들어가 포착하면 영화 자체의 온도도 올라가기 마련이다. 반대로, 롱쇼트는 이별의 의미다. <아름다운 시절>을 예로 들면, 감독은 영화에서 롱쇼트를 많이 썼다. 만남이 아닌 이별의 의미로 영화를 찍었다는 거다. 실제로 영화가 주인공과 친구의 이별로 결말지어지지 않나. 요즘엔 클로즈업을 지나치리 만큼 자주 사용하는 영화가 많은데, 실제 인생에선 만남보다 이별이 많은 법이지.

-<박하사탕>도 결국 첫사랑과의 이별에 관한 영화 아닌가.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나.

=당신은 그 영화에 대해 어떻게 느꼈나.

-글쎄…. 영화 속 인물이 순수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순수성을 부둥켜안고 좌절하다가 끝내 자살을 택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잠시 생각하다 슬쩍 눈물을 닦으며) 그렇겠지…. 어쩌면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서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은연중에 순수를 간직하고픈 욕구를 느낀다. 첫사랑이라는 건 가장 순수한 기억의 일부겠지. 난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처음 좋아했던 여자를 이따금 꿈에서 본다. 마음이란 건 참 신기하지 않은가. <박하사탕>은 그밖에 시간의 역전이 마치 시간의 옷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구성 같아서 좋았다. 감동적이다.

-느린 작업 속도로 봐서(감독은 대략5-6년에 한번꼴로 영화를 찍는다. 데뷔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발표작은 단4편이다) 다음 영화가 나올 때가 된 것 같다. 계획은 없는지.

=나도 다음 영화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슬슬 만들어야겠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 생각도 있다. 제의를 받은 것도 있지만 실현된 단계는 아니고…. 한일합작도 언젠가 더 활발해질 것이다. 서두를 필요있겠나?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고, 기다리면 되겠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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