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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이란 날개를 단 천사, <친절한 금자씨>
심영섭(평론가) 2005-08-17

박찬욱이 만든 검고도 흰 케이크 <친절한 금자씨>

(※이 글은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삼각 구도를 탈피하여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던 여성의 ‘내면’에 대해 그려보려고 했다는 감독의 변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 복수극이지, 여성에 관한 영화는 아니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야기와 캐릭터의 동력으로 가는 영화도 아니었다. 이야기만을 따지자면 내러티브 구조는 산만해 보였고, 반전도 약한 편이었다. 심지어 집단 복수극은 뜬금없고. 그러나 감독이 원래 의도했던 것이 금자의 주변 인물들을 생장점 삼아 산지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장미 넝쿨 같은 이야기 구조라면 그것을 탓할 수는 없을 터. 그보다는 왜 처음 봤을 때 재미가 없었을까(이 영화는 두 번째 보았을 때 가장 재미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복수의 계획치고는 예외가 너무 없었다. 영화 속의 금자씨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병헌처럼 자살로 끝을 맺지도 않고,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자신의 혀를 자르지도 않으며,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처럼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기가 만든 케이크에 얼굴을 박지 누가 만들어준 두부에 얼굴을 박을 여자가 아니다. 암튼 그녀는 올드 보이의 감금당한 자 오대수보다는 감금한 자, ‘여자 이우진’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그러니까 똑같이 빵을 만들어도 금자는 삼순이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여자인데도 연민이든 응원이든 ‘내가 금자’라는 생각을 하기보다 금자, 그녀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히로인인 이영애는 키치적인 마리아의 아이콘으로 벽에 딱 달라붙은 플라스틱 장미처럼 울고 웃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최선의 연기였지만 최고의 연기라고 할 수는 없는 2% 부족한 그녀의 카리스마 미달에도 금자의 마음에 삽질하기 힘들게 만드는 책임은 있다. 다른 것을 보자.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오리엔탈 특급>을 닮았다는 둥 하는 영화광의 메스도 아니고, 박찬욱 감독의 정신분석은 <올드 보이> 때 이미 했고, 그렇다면 다른 것을 보아야... 뭔가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금자씨의 관능성을 지속시키는 원동력

금자는 과연 누구일까? 영화의 전반부 2/3 이야기는 이금자 그녀는 천사 아니면 마녀라고 밑줄 좍 그어 강조되어 있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질문의 해답을 위해 시간을 넘기는 감독의 편집술이다.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고무줄처럼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탄력적으로 넘나들고, 박찬욱 감독의 가위질은 단지 플래시 백워드가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를 건너뛰는 플래시 포워드로 앞뒤로 컷을 가져다 붙인다. ‘케인은 누군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과거와 현재를 오갔던 <시민케인>의 감독 오선 웰스가 보았다면 아주 좋아했을 이러한 구성은 교도소 문을 나서는 첫 장면부터 시작되어,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며 경악하는 부모의 반응을 보기까지, 일관되게 <친절한 금자씨>를 장악한다. 그리하여 흰 두부에서 이 금자의 체포 당시의 소란스러움은 부활하고, 금자는 유괴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을 보며 이미 경악해 마지 않을 그들의 행동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죄의식의 날개를 타고 인간의 피부 밑 속으로 칼날처럼 파고드는 원죄적 기억. 혹은 이미 미래의 사건을 예견하는 한 여자의 직감이나 신성성. 그러므로 <친절한 금자씨>는 조각나는 시간의 파편 속에 철저하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퍼즐놀이였다. 이 점은 <복수는 나의 것>하고도 다르고, <올드 보이>하고도 다른, 금자씨만의 관능성과 잔혹함의 원천이 된다. 예를 들면 미장원을 하는 김양희가 금자를 끌어안고 "사실은 나 사랑했던 것 아니지?"라고 물어볼 때, 영화는 시치미를 떼고 김양희의 과거사로 눈길을 가게 만들지만 사실 관객이 둘 사이의 동성애를 은밀하고 내밀하게 또 불온하게 상상할수록 더욱 더 관능적으로 그 장면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금자를 집 앞에서 기다리던 전도사가 금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우리 다시 시작해요"라고 말할 때,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겉으로는 보여지지 않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 장면을 금자씨의 가장 섹시한 장면 중 하나로 여긴다고 말했다. 박이정이 백선생의 마빡을 들이받아 그를 녹아웃 시킨 장면 역시 잔혹한 폭력을 직접 시청하는 쾌감은 그녀의 이빨에 묻어 있는 피 속에 뭉개져 있다.

박찬욱 감독은 자꾸자꾸 페이지를 넘기고, 관객은 그 페이지 속의 이야기들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최대한 음험하게 메워 갈 때 금자씨는 더욱 더 잔인해지고 관능적인 포즈를 취한다. 겉으로는 복수에 관한 도덕 교과서처럼 보이지만 속은 행간을 비워둔 채 불량 만화의 형식을 취한 영화. 그러므로 <친절한 금자씨>는 이야기가 부족하다기보다 이야기를 일부러 부족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배우들이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를 걸고, 온갖 방식으로 영화는 관객과의 거리를 넓히려 든다. 이러한 거리 두기 방식이 과연 관객에게 친절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친절한 금자씨에 롱테이크는 없다.

박찬욱의 신약, 금자씨와 12사도

이제 박찬욱 감독에게 계급은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가 아닌 듯 보인다. <복수 삼부작>의 틀 안에 놓고 보자면, 박찬욱 감독은 점점 한 개인의 내밀한 판타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구약적인 응징론에 의거해 계급간의 대결양상을 보였던 과거와 달리, 죄의식의 처벌 장소로 조각난 육체에 집착하거나 감금이나 미로 같은 테마로 스타일을 완결하는 방식도 훨씬 느슨해졌다. 친절한 금자씨는 기실 법이 다스리지 못하는 징벌에 대한 거대한 판타지이고, 감독은 자신의 모든 배우들을 불러모아 전작을 연상시키는 대사들을 툭툭 던지며 복수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려 든다. 그러나 우리의 금자씨는 구약의 유황불 가득한 화염보다는 빛나는 성인의 후광을 두르고 있다. 물론 여전히 박찬욱의 세상은 지옥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짓다만 빌딩, 귀신같이 버티고 서 있는 마약쟁이 의사, 하체를 드러낸 노인, 꼬질꼬질 때낀 소파 속의 꽃들이 가득한 사막으로써의 지옥. <올드 보이>에서 오대수가 어디로 도망쳐도 이우진에게 발각이 나버리는 미로로써의 지옥.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의 방을 도배한 화염 가득한 지옥. 그곳이 영겁의 지옥인 까닭은 박찬욱의 영화세상에서는 누구와도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류는 귀머거리이고, 금자는 입양한 딸과 통역 없이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못한다. 그러므로 박찬욱의 주인공들에게 폭력이란 차라리 종교적 의식에 가까운 자신의 죄를 지우는 유일한 방편인데, 금자씨는 그래도 누군가를 도와주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자선행위 속에서 폭력의 세례를 행한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금자씨와 12사도’라 별명을 붙이고 싶을 만큼, 이전의 구약적 영화들에 비해 신약적으로 보인다. 백선생이라는 악을 처단하기 위해,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충성스럽게 그녀를 도와주는 사도들과 같고, 그녀는 마치 동정녀 마리아처럼 홀로 임신했다. 특히 딸인 제니의 시점으로 낭독하는 3인칭 내레이션은 그녀의 행적을 마치 복음서의 예수의 행적을 나열하듯 낭랑하게 회고한다. 결국 잔혹한 집단 복수극의 끝은 모든 사람들이 케이크를 나누는 최후의 만찬. 그래서 이 영화의 처음은 인간들이 부르는 지상의 찬송가 소리이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천사들이 지나가는 천상의 방울 소리이다. 금자가 얼굴을 박은 두부 모양의 케이크도 하얗고, 눈은 어떤 죽음도 거부한 채 언 땅의 빈 공간을 방황한다.

철학적이고 장르적인 감독 박찬욱

이로써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복수는 나의 것>의 미니멀한 스타일의 냉탕과 <올드 보이>의 열혈 영화 청년의 열탕을 오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의 중도 좌파까지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스타일리스트라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조롱과 야유와 온갖 영화광의 지식과 잔혹 서사를 뒤로하고, 금자씨의 진정한 가치는 속을 채우는 것에 있지 않고, 컷과 컷 사이의 긴장감을 느끼고, 그 보이지 않는 컷 사이의 ‘넘김’을 보는 데 있었다. <JSA>에서 판문점의 지붕이 이영애가 쓴 우산으로 이어질 때의 쾌감. <올드 보이>에서 상록 고등학교 홈페이지 속에 오대수가 탄 차가 들어서면서 현실로 쓰윽 넘어갈 때의 쾌감. 길을 건너던 금자를 한 큐에 줌 아웃으로 뽑아서 사무실의 창문을 통해 의자에 앉혀버리는 편집의 쾌감. 또한 소리와 소리가 겹치고 음향과 대사가 서로를 배반할 때의 쾌감. 실제 유괴 사건의 전모를 근식에게 이야기하는 차가운 금자의 목소리와 실제 백선생과 금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겹쳐지는 현재와 과거의 이율 배반성.

물론 유명세가 오르고 언론이 상찬할수록 박찬욱은 휴머니즘을 조각내고, 모순으로 가득찬 웃음 속에 조롱으로 세상을 응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과연 창녀와 조폭은 한 벤치에 앉을 수 있는가"를 물어오는 영화라면 친절한 금자씨가 그저 "니 새끼가 유괴당했을 때, 너는 용서할 수 있니 그를"이라고 물어오는 단순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말 박찬욱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불교의 경전 뒤에 총의 디자인이 숨겨져 있고, 달콤한 케이크 조각에 한 방울의 피가 숨겨져 있으며 찰칵찰칵하는 총소리와 천사의 방울소리가 겹친다고.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다. 그러한 면에서 박찬욱 감독은 철학적인 감독이지 심리학적인 감독은 아니다. 장르적인 감독이지 윤리적인 감독은 아니다. 아무튼 "세상에 완벽한 감독은 없는 거예요. 사모님." 감독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그가 만든 검고도 흰 케이크를 한입 덥석 베어 문다. 천사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머리로 맛볼 때 맛있다. 참 맛있다. 영화를 빌려 말하자면, 그래서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찬욱씨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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