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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일기 혹은 이야기1 - 장선우 감독, <박하사탕>을 보고
2000-01-18

이런 속 깊은 경외는 쉽지 않은 거라

<박하사탕> 보고나니까 <거짓말>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이유를 알겠어. 재밌는 발상이야. 영화, 너무 좋더라구. 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앙할 때 거기 위험이 있다, 그래서 늘 반대쪽을 보고 싶어하는 쪽이거든. 일방적인 것은 늘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영화 보면서 계속 슬펐어.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눈을 뗄 수 있는 장면이 한두 군데 보이긴 했지만. 나는 사실 이창동 감독이 문학기를 못 버릴 거야 하는 편견도 좀 있었거든. 두 번째 영화 보면서 이렇게 마음 깊이 경외를 보내는 게 흔치 않은 거라. 정말, 좋았어.

슬펐어, 리얼리스트라면 우리 사회는 슬퍼

<박하사탕>을 이 감독은 모범생의 영화라고 말하는데, 그게 문제는 아냐. 끝까지 고민하자는 거니까. 시간을 거슬러서 가는 정취를 내가 그냥 따라가게 되더라고. 몇몇 표현상의 모범적인 부분들은 있지만, 들이대는 방식이 너무 치열하고 힘드니까 말이야. 그런 정직함이 좋더라고. 모범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그 정서, 세상을 보는 방식, 태도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 같아.

물론 어떤 영화적 방법을 쓰느냐도 문제지. 우리가 어떻게 망가져가고 있고, 어떻게 사느냐를 얘기하는 것. <박하사탕>은 그 얘길 직접적으로 해버리더라고. 우리가 왜 이렇게 망가지고 있나. 우리 사회의 뿌리가 뭔가. 우리 문화의 내용이 뭔가. 그런 것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 너무 잘 나와 있어서 내가 더이상 하고 싶은 얘기가 없을 정도야. 죽음을 던져놓고 시작하는 것부터 사실은 심상치 않았어. <초록물고기>보다 훨씬 느낌이 강렬했어. 충격도 왔고. 슬펐어. 나는 슬프다는 표현이 제일 좋은 것 중의 하나거든.

난 영화가 슬퍼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스님이 “영화는 슬퍼야 돼” 그러시던데, 정말 맞는 말이야. 액션이 되든 판타지가 되든, 심지어 웃기는 장르라도 영화는 슬퍼야 돼. 슬프지 않으면 금방 잊어먹어. 그리고 우리가 리얼리스트라면 우리 사회는 슬프게 보이는 거야. 슬프게 읽어주면 좋은 관객을 만났다고 생각해야 되고. <거짓말>도 슬픈 영화라고 생각하거든. 슬프지 않으면 그런 영화 안 하지. 어지간한 멜로 보면 안 슬퍼. <박하사탕> 진짜 슬펐어. 하지만 마지막에 눈물로 끝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했었어. 이건 뭘까. 첫사랑의 행복함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순수로 돌아가는 느낌 말이야. 그런데 왜 순수를 눈물로 표현한 걸까(이창동 감독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맑은 하늘을 바라볼 때 눈물이 줄줄 흐른 적이 있다. 그런 눈물을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난 불만없어.

광주장면에서 총을 쏘고 난 뒤에 플래시 불빛 아래서 하는 오랜 절규도 부담스러웠거든. 지금까지 모든 걸 간결하게 추려 오다가 거기서는 그렇지 못했어. 그건 이 감독이 광주의 아픔과 거기서 느낀 절망과 콤플렉스, 또 그것에 연연해하는 자기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짐작해. 난 약아가지고, <꽃잎>에서 짐을 내려놓으려고, 그런 부담을 씻어내버리려고, 씻김 형태로 간 거지. 여기서 머물러선 안 된다, 씻자, 광주를. 그게 <꽃잎>이었어.

우리가 얼마나 대책없이 망가졌는지 봐야 돼

난 <박하사탕>을 이렇게 보고 싶어. 우리 사회에선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망가져. 이런 사회, 정말 비참하거든. 나이가 들면 애들한테 ‘따’당해. 세대간의 갈등이 계급갈등보다 더 심각한 사회잖아. 그게 망가지기 때문이란 말이야. <박하사탕>은 그걸 보여준 영화라고 보는 거야. 나이들면 천대받고, 꼰대소리 듣고, 애들은 기성세대에 대해 벽을 쌓는 사회적 망, 사회적 틀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거야. 갈등이 안 나올 수 없어. 그렇게 망가지는 거야. 누구든지 온전하고 아름답게 살려고 해도, 학교, 군대, 회사 조직 이런 거 거치면서 인생 다 망가져. 그걸 난 <박하사탕>에서 여실히 본 거거든. 나는 우리 사회에 이것에 대한 해명없이 우리 사회 희망 없다고 봐. 교육부터 망가지는데, 중학교 초등학교 때부터 애들이 불행해지기 시작하는데, 사회적 조직의 요구 때문에, 권력의 속성이 요구하는 지점에서 계속 불행해진다구. 군대가서 또 불행해지고, 사회의 틀에 들어와서 또 불행해지고, 애들은 나이들면서 금방 어른 닮아가고. <박하사탕>이 그걸 보여준 거야. 광주보다는 우리나라 시스템, 우리 사회 시스템이 그렇다는 걸. 이게 안 깨진다는 거야. 그게 참 멋있었어.

난 그게 깨지고 변할 수 있을진 모르겠어. 이 감독과는 다르게 난 세상 변하길 바라지 말자, 차라리 내가 변하자, 이렇게 말하는 편이야. 순수, 깨달음, 시스템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걸 믿고 희망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알면 이 시스템에 구속 안 되지. 거기서 훨씬 자유로워지지. 그 길을 알면서 잘 안 간단 말야. 깨달음이라는 게 바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거든. 자유로워진다는 것도 그런 의미이고. 거기로 가기 위해선 우리가 얼마나 대책없이 망가졌는지 눈뜨고 봐야 하는 건데, <박하사탕>은 바로 그걸 보여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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