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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금자씨, <친절한 금자씨>

금자라는 한 도덕적 천재의 나르시시즘 <친절한 금자씨>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은 영화를 본 뒤 읽어주세요

‘복수 시리즈’를 되짚어보자. ‘복수’는 폭력의 본질이 엿보이는 창이다. 돈이나 권력 같은 외적 이유에 의한 폭력과 달리 내적 동력에 이끌리는 ‘복수’는 ‘폭력의 순수 정념’을 보유한다. 따라서 복수를 다룬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컷>에는 폭력의 내적 본질이 담겨 있다. <복수는…>에서 그들 행동의 정당성은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그들이 ‘당한 바’로부터 나오며, 주체의 의지나 결단도 무의미하다. <복수는…>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연쇄반응을 통해 ‘폭력의 자연사’를 규명하였다. 한편 <올드보이>와 <컷>은 ‘폭력의 발생론’을 다룬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은 근친상간의 죄의식으로 죽은 누나에 대한 죗 값을 오대수에게 물어 근친상간을 행하게 한다. 자기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죄의식을 전가시킨 것이다. <컷>에서 엑스트라는 가족 살해의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죄의식을 피해의식으로 전환하여, 류 감독에게 가족 살해를 강요한다. 두 작품이 밝히는 ‘폭력의 발생론’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믿고 싶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주체의 탄생’이다.

폭력의 자연사와 발생론을 규명한 전작의 문제의식을 갈무리할 <친절한 금자씨>가 과연 폭력에 관한 어떤 견해를 밝힐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그러나 막상 금자씨의 ‘복수’는 ‘폭력의 순수 정념’과 거리가 멀다. 복수가 순연한 자체 동기로 추구되지 않고, ‘속죄와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속죄와 구원’ 역시 복수의 과정에서 내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점부터 전제로 주어지기에, ‘속죄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의미도 모색하지 못한다. 게다가 ‘속죄와 구원’을 ‘여성’이라는 새로운 요소와 설명없이 결합시킴으로써 성정치학적 보수성을 띠게 된다.

어쩌자고 그녀는 이토록 ‘도덕’적인가?

그녀의 ‘악행의 자서전’을 살펴보자. 첫 번째 살인은 덮어쓴 것이다. 그녀는 죄를 적극적으로 덮어쓰는데, 이유는 첫째, 딸에 대한 모성애의 발로였고, 둘째, 범죄를 도운 것에 죄의식을 느껴서이다. 그녀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진정 사죄하고 싶어한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백 선생을 잡아 대령하는 행위는 사죄욕구의 적극적 표현이다. 두 번째 살인은 재소자를 괴롭히는 ‘마녀’를 죽인 것이다.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라 부당한 폭력을 응징키 위한 그녀의 살인은 의거로 환영받고, 그녀는 영웅으로 추앙된다. 세 번째 살인은 유아살해범이자, 지독한 마초이며, 죄를 뉘우치지 않는 백 선생을 다 함께 죽인 것이다. 혼자 죽일 수도 있었지만 여죄를 알아낸 그녀는, ‘친절히’ 다른 유족들에게 알리고 복수를 주선한다. ‘순수 악’을 처형하는 그녀는 확신에 차 있고, 비난받거나 저지당하지 않는다. 흡사 ‘공법(公法)의 집행자’이거나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는 아테네’이다.

정리하자면 그녀의 ‘악행’은 딸을 지키고자 살인죄까지 덮어쓰고도 “엄마없이 자라게 한 것도 내 죄”임을 고백할 만큼 ‘숭고한 모성애’와 일부 가담한 범죄에 대해서도 손가락을 자르고 유지태의 환영을 볼 만큼 ‘결벽적인 죄의식’(모래알이나 바위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과 “실수를 했으면 죄를 뉘우쳐야 하는 거야…”를 읊조리는 ‘지엄한 정의감’의 산물이다. 그녀는 왜 이토록 높은 도덕성을 지니는가?

‘속죄와 구원’이라는 유구한 도덕이 여성에게 별 이유없이(태생적으로?) 결부됨으로써 영화의 성정치학적 의미는 뒤틀린다. 일찍이 <시카고>가 풍자했듯, ‘아름다운 여인에게 깃든 잔혹한 살의’라는 역설은 매혹적이다(영화 속 ‘철없는 감독’도 그 매혹에 빠진다). 그러나 팽팽한 긴장은 그녀가 ‘도덕적 천재’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아름다운 여성은 비록 살인자라 할지라도 과도한 죄의식을 느끼고 몸소 정의를 실현하는 자이다’라는 논리로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착하다’의 통념은 뚱뚱한 ‘마녀’에 의해 재현되는 ‘추녀=악녀’의 등식과 그녀의 대사 “뭐든지 예뻐야 되는 거야”에서 재확인된다. 또한 절대적 악인, 백 선생이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설정은 그녀를 포함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고통과 대비되어, 모(부)성애를 절대적 선으로 간주하는 보수적 사고와 만난다.

결국 여성들간의 연대를 그리며 친여성주의적 분위기를 한껏 낸 영화의 성정치학적 귀착점은 ‘모성애와 미모의 담지자로서의 착한 여성’이다. 전작에서 추구했던 ‘복수’와 ‘폭력’에 관한 치열한 문제의식은 슬그머니 폐기되고, 전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내러티브와 전작을 환기시키는 빈번한 디테일(착한 유괴/나쁜 유괴, 개가 된 최민식 등)과 과도한 카메오의 출연은 시리즈의 완결편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바치는 오마주의 종합선물세트’라는 느낌을 강하게 안긴다. 도덕적 천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금자씨와 감독의 나르시시즘에 꺼억∼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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