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메이저에 시나리오를 팔겠다고? 차라리 카지노에 가서 룰렛에 돈을 걸어라.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인사말처럼 주고받는 농담이다. 다소 위악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사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이 비좁아 터진 충무로에서도 시나리오 하나 팔아먹기가 하늘의 별따기니까. 그런데 서른살도 되기 전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브라이언 드 팔마 그리고 로버트 저메키스와 커티스 핸슨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연출하도록 만든 작가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억세게 운좋은 녀석 혹은 질투가 날만큼 재능이 넘쳐나는 젊은 작가가 데이비드 코엡이다.
이제와 다시 봐도 그가 24살 때 쓴 데뷔작 <아파트 제로>에서는 재능이 번뜩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예기치 못했던 캐릭터의 변화, 제멋대로 뒤엉켜있는 것 같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맞춰보면 모든 아귀가 빈틈없이 들어맞는 퍼즐 같은 플롯. <배드 인플루언스> 역시 소품이지만 코엡의 장기인 ‘무시무시한 유머’가 십분 발휘되어 적지 않은 컬트팬들을 거느리게 된 영화다. 그가 유니버설과 전속계약을 맺게된 것은 이즈음. 사실 메이저가 작가와 전속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1930년대라면 또 모를까 1990년대에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들은 막 피어나려는 젊은 작가의 재능에 과감한 배팅을 했고, 코엡은 그 배팅이 현명한 투자였음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여지없이 증명했다.
설명을 덧붙이는 것조차 남사스러운 블록버스터들은 제쳐놓고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들만 짚어보자. <페이퍼>는 특종에 목숨을 건 신문사 사회부기자들의 이야기. 실제로 저널리스트인 자신의 형 스티브 코엡과 함께 집필해서인지 갓 잡아올린 생선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쉐도우>는 1930년대에 빅 히트했던 라디오드라마의 각색. 알렉 볼드윈의 뛰어난 연기가 코엡의 작품치고는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는 이 영화를 그런대로 떠받쳐준다. 적자를 면한 정도의 흥행성적을 올렸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썩 괜찮다는 평을 받았던 작품이 <칼리토>.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것으로도 유명한 코엡이 무려 3년 동안을 지지고 볶았을 정도로 애정을 듬뿍 쏟아부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추억의 귓전을 간지럽히는 1970년대의 디스코음악을 배경으로 ‘죽어가는 자의 내레이션’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쌓아올린 음울한 아이러니가 일품이다. <칼리토> 이후의 모든 작품에서 오직 코엡만을 고집하는 것을 보면 브라이언 드 팔마도 어지간히 그에게 매혹되었음에 틀림없다.
코엡은 감독일도 겸한다. 단편 영화 <서스피셔스>(1994)에 이어 <트리거 이펙트>(1996)로 장편 데뷔를 했고 두 번째 연출작이 곧 국내 개봉할 것으로 알려진 <스터 오브 에코>(1999)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평론가 알렌 화이트가 물었다. “당신은 결국 감독을 하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써온 겁니까?” 코엡은 오히려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시나리오를 좀더 잘 쓰기 위해서 감독일을 해보는 겁니다.” 그는 감독일을 해본 다음에야 머리로만 알고 있던 시나리오작법이론을 비로소 체득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영화란 이미지로 짜나가는 스토리입니다. 대사의 의존도가 높아서는 안 되죠. 내가 직접 찍고 편집을 해보니 알겠더라구요.”
유니버설과의 계약에서 풀려난 그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가장 비싸고 바쁜 프리랜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잃어버린 세계>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대단한 흥행성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혹평만을 되돌려받았던 작품들도 많다. 그럴 때마다 상처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호평은 금방 잊어버려요. 하지만 악평들은… 끔찍합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코엡은 이제 고작해야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남은 여백이 너무 많다. 그는 유명한 작가인 동시에 미지의 작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