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데뷔 25년. <해변의 카프카> 이후, 2년 만에 <어둠의 저편>으로 돌아온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제 ‘하루키즘’을 넘어 세계적 작가 운운하는 높은 자리로 올라가버렸다. 그의 소설은 늘 전작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듣지만, 그 반복은 태작으로 치부되기보다 오히려 소설의 매력이 된다. 하루키를 일단 접하면 초고속으로 그의 다음 작품을 읽지 못해 안달 병이 나는가 하면, 몇편만 읽고 나서도 하루키를 다 아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데, 어느덧 우리는 정말로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책을 반복해 읽곤 한다. 혹시 하루키야말로 우리 맘속에 들어와 좀체 나가려고 하지 않는 ‘등에 별 표시가 있는 양’은 아니었을까?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에서 사랑과 죽음, 삶에 관해 나누었던 그 봄빛 같은 대화들. 그리고 랠프 로렌의 하얀 폴로셔츠와 크림색 면바지를 입고 숲속에서 조용히 걸어나올 것 같은 하루키(春樹). 봄날의 나무 같은 그에게서 8가지 청결한 매력을 발견한다.
key1. 밤의 원숭이
하루키는 동물원에 자주 간다. 그래선지 그의 소설에는 새, 일각수, 캥거루, 코끼리, 원숭이 등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가운데는 세계의 태엽을 감는 새나 말하는 고양이, 세계의 끝에 돌아다니는 일각수처럼 환상적인 캐릭터들도 있다. 또한 그는 ‘양 사나이’나 ‘쥐’ 등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호텔(‘돌고래 호텔’), 공장(‘코끼리 공장’) 등 사물에도 동물 이름을 붙이곤 한다. 동물의 탈을 쓴 사람과 사물들은 본래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이탈된다. 예컨대 <양을 쫓는 모험>에는 ‘등에 별 표시가 있는 양’이 나온다. 양은 ‘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을 조종한다. 착한 동물의 대명사인 ‘양’이 그의 소설에서는 오히려 권력과 사악함의 상징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는 ‘캥거루로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란 의문에 <캥거루 통신> 등의 소설을 썼을 정도로, 자주 동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킨다. 동물을 자주 관찰하는 이유는 인간의 심층을 우회적으로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전에 그가 3년간 운영한 <무라카미 아사히도>란 웹사이트에 ‘그렇다, 무라카미씨에게 물어보자’라는 코너가 있었다. 질문들은 주로 ‘오징어에는 팔이 있나요, 다리가 있나요?’ 같은 황당한 것들이지만, 하루키는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오징어에게 장갑 열짝과 양말 열짝을 주고 어느 것을 고르는지 보세요.”
key2. 바람의 노래
<양을 쫓는 모험>에는 귀 모델 여자가 나온다. 귀에 대한 페티시를 갖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루키가 귀에 관한 한 얼마나 민감한 인물인지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장르, 즉 음악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치일 수밖에 없다. 그의 소설을 통틀어 대표하는 곡이라 할 수 있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s)에서 들려오는 인도 악기 시타르의 분위기는 하루키적인 고독함과 맞닿아 전혀 다른 음악적 감흥을 만들어낸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는 상실한 모든 것을 되찾기 바라며 눈을 감고 밥 딜런의 쓸쓸한 음악 <폭풍우>에 빠져든다. 이처럼 그의 소설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상처와 고독을 치유하는 약과 같다. ‘하루키 문학은 언어의 음악’이라고 한 제이 루빈의 말처럼, 하루키의 문장들은 언어의 기호성보다는 음악의 원시성과 더 친근하다. 실제로 그의 음악적 편력은 재즈, 록, 클래식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하루키적인 장르는 역시 재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두권의 재즈 에세이(<재즈 에세이>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를 펴낼 정도로 열렬한 재즈 마니아다. 레이 찰스, 듀크 엘링턴, 빌 에반스, 소니 롤린스 등 미국계 재즈 대부들의 음율이 (생뚱맞게도) 일본 작가의 글 위에서 세련되게 흐를 때면 묘한 기분마저 든다. 하루키는 남의 음악을 제 것으로 만들어 원작 이상의 감상을 이끌어내는 기이한 능력을 지녔다.
key3. 빵가게 재습격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늘 맥주,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진다. ‘맥주를 마시자’, ‘한병 더 마시겠어?’ 등의 문장은 실로 거대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나’는 포도즈, 오리고기 파이, 섬게 수프 등등을 고른 뒤 ‘반달치 식비가 날아가버릴 판’이라고 말한다. 그건 독자도 마찬가지다. 특히 밤에 그의 소설을 읽기를 반복할 땐, 몸매나 금전 중 하나는 반드시 아작날 각오를 해야 한다. 그의 음식이 주로 정크 푸드이거나 중산층이 즐겨 먹는 고급 서양식이기 때문이다. <댄스 댄스 댄스>의 ‘고기가 연하고 토마토 케첩이 넉넉해서 맛있게 구워지고 실로 엄청난 양파를 곁들인 진짜 햄버거’, <상실의 시대>에서 나와 나오코가 먹던 메밀국수, <해변의 카프카>의 달걀말이, <어둠의 저편>의 계란부침 등은 음식이 아니라 거의 고문 도구에 가깝다. <해변의 카프카>에선 아예 위스키 라벨과 동명인 조니 워커가 활보하고 다닌다. 이쯤되면 어떤 부부처럼 맥도널드 가게를 재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만다(운만 좋다면야, 바그너 클래식 애호가인 빵집 주인을 만나 음악도 듣고 빵도 먹을 수 있으니까). 아무튼 하루키식 레시피의 여파는 놀라울 정도다. 소설 속에서 카프카가 다카마쓰에서 먹은 우동 가게가 어디냐를 놓고 사방에서 자기네 집이라고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안심하며 계속해서 먹을 것이다. ‘다 같이 비슷하게 젊고 아름답고 뚱뚱한 여자라 해도 살이 찐 모습에는 제각기 차이가 있어, 어떤 종류의 살이 찐 모습은 나를 표층적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고 만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key4. 책에서 만나요
하루키는 열두살 때부터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십대 전반을 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그는 로스 맥도널드, 에드 맥베인,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레이먼드 카버 등 미국 작가들의 원서로 독서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래선지 하루키의 작품에는 반드시 ‘책 속의 책’이 등장한다. 특히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가장 미국적인 작가’라고 칭송하며 피츠제럴드를 주제로 한 책을 낸 적도 있다(<더 스콧 피츠제럴드 북>). 또 카버, 카포티, 존 어빙, 샐린저 등의 책은 직접 번역도 했다.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트루먼 카포티의 1947년작 단편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또 도시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양을 쫓는 모험>은 하드보일드의 거장 챈들러의 탐정소설의 영향이 느껴진다. 재수 시절에도 그는 대부분을 시립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와타나베도, 카프카도 늘 수권의 책들을 끼고 산다. 책을 읽지 않으면 여자를 생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실의 시대>의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이상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라고 말한다. 그 탓일까? 국내 스테디셀러 목록에서 <위대한 개츠비>가 종종 목격된다. 언제나 자신의 책에서 <유형지에서> <로드 짐> <상상 동물 이야기> 등 책의 제목이나 내용을 언급하는 모습에선 어쩐지 활자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진다.
key5. 고독한 스포츠
64살이 되면 글쓰기, 음악 듣기, 운동의 세 가지로 삶이 압축될 것이라고 한 하루키. 그는 다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 말을 빌려, 글을 쓰는 일은 ‘눈을 치우는 작업’과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제설 작업의 어려움은 대한민국의 병역필 남성들이라면 일백프로 공감할 것이다). 어쨌든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루키도 수많은 글을 ‘몸’으로 쓴다. 그가 마라톤과 수영으로 꾸준히 몸을 단련하는 이유다. 신기한 것은 <슬픈 외국어>에 나온 그의 ‘마라톤’ 예찬론만 보면, 그것이 인간 한계에 도전 어쩌구 하는 극한 스포츠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실의 시대>에서 돌격대가 아침마다 하는 국민체조만큼이나 쉽고 편안한 운동처럼 여겨진다. 소설 속에 수영장면을 수없이 등장시키는 그에게 있어, 스포츠란 고독한 일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가 주로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핀볼과 산책까지 포함하면 개인 플레이 스포츠는 훨씬 더 늘어난다)만 즐긴다는 점이 그 증거다. <해변의 카프카>의 15살 카프카는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기 위해 윗몸일으키기, 물구나무 서기 등 꾸준히 스트레칭을 한다. 운동은 닥쳐올 미래에 대한 조용한 대비책 같은 역할을 한다. 한편, 단체 경기인 야구마저 그의 눈을 거치면 고독한 스포츠가 되어버린다.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에서 야구를 하는 요시야는 마운드에 설 때마다 신을 찾는다. 그 모습은 1978년 어느 날, 야구 경기를 보다가 미국인 타자 데이브 힐턴이 외야 2루타를 치는 것을 보고 문득 소설을 쓰곤 했다는 하루키를 떠올리게 한다.
key6. 상실의 시대
하루키에게 붙는 수식 중 재밌는 것은 ‘프루스트 라이트’(LIGHT)란 것이다. 오늘날의 신세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명작이란 것을 인정하지만, 기회비용을 따졌을 때 <상실의 시대>가 더 낫다고 판단한다. 상실과 사랑, 삶과 죽음, 방황 등 비슷한 주제를 이왕이면 지루하지 않고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뜻이다.
어쨌든 <댄스 댄스 댄스>의 키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시마모토, <태엽 감는 새>의 구미코와 고양이,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스미레 등 많은 인물들이 그의 소설에서 실종됐다. 실종은 ‘잃는다’ 즉, 상실과 관련이 깊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를 쓸 때 ‘굶주린 사람이 뼈다귀를 핥아먹는’ 필사적인 기세로 써나갔다고 한다. 그 이유가 재밌다. 기억나는 대로 글을 쓰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을까봐 두려워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인물묘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새끼손가락이 없는 여자나, <태엽 감는 새>의 얼굴에 반점이 생긴 남자 등 인물들은 어딘가 결함이 있다. 결함과 상실에 무의식적으로 동감하는 이런 경향은 전공투 세대였던 그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전공투란 1967년 정부에 항거한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약칭이다. 결코 운동과 사회에 대해 방관하지 않았던 그는 학생운동이 막을 내린 뒤, 인간관계에 대한 상실과 허무감에 빠져들었다. 바깥 세계는 폭력과 싸움으로 아우성인데 주인공은 스파게티를 삶고 여자아이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이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리는 와타나베의 독백이 그의 심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key7. 세계의 저편
하루키는 ‘폭력은 일본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며, ‘일본인에게 내린 저주에서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해왔다. 특히 <태엽 감는 새> 3권에서 폭력은 효과를 발휘한다. 마미야가 들려주는 ‘사람 가죽 벗기는 보리스’ 이야기는 ‘따뜻한 하루키’만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이쪽과 저쪽’이라는 이원론적 세계를 통해 폭력의 근원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작가다. 이쪽이 현실, 물질, 삶이라면, 저쪽은 환상, 정신, 죽음이다. 그는 늘 이런 두 세계를 병렬 연결하는 버릇이 있다. <어둠의 저편>의 다카하시처럼 두 세계가 높은 벽에 의해 분리되어 있지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끝…>에서 그림자를 버리면 마음을 잃게 된다는 문 안의 규칙 역시 정신과 물질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루키의 분신들은 아내가 실종되거나, 열다섯살이 된 것을 계기로 현실을 빠져나와, 루이스 캐럴이나 미야자키 하야오를 연상시키는 ‘저쪽 세계’로 간다. 그 통로가 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우물’이다. 우물은 <1973년의 핀볼>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우물이 여러 개 파여 있다’고 한 것을 시작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거쳐, 드디어 <태엽 감는 새>에 실질적인 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나’는 고독과 성찰의 장소인 우물 속에 들어갔다가 벽 너머의 세계로 가게 된다. 그곳은 권력자인 ‘와타야 노보루’가 지배하는 세계로, <세계의 끝…>에서 빛의 세계를 증오하는 야미쿠로의 지하 세계처럼 어두운 곳이다. <세계의 끝…>에서 ‘이쪽’에 남지 않고 ‘저쪽’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하루키. 그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숲에 들어간 카프카가 사에키에 대한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숲을 빠져나오게 함으로써, 희망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key8. 화요일의 여자들
일본에서 2권으로 출간된 <노르웨이의 숲>(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더 잘 알려진)은 각각 초록색과 빨간색의 커버로 싸여져 있다. 숲을 연상시키는 초록은 삶의 생동감을, 피를 연상시키는 빨강은 죽음의 어두움을 상징한다.
하루키의 여성관에도 ‘두개의 세계’라는 뼈대는 그대로 적용된다. 즉, 초록과 빨강의 여자들로 나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 레이코가 초록이라면, 나오코, 하쓰미,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의 사에키는 빨강의 여자들이다. 초록의 여성들은 활기있고 대화와 섹스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특히 와타나베와 섹스를 하던 미도리가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에 든다고 하는 장면처럼 섹스에 관한 캐주얼한 묘사는 몇몇 독자에게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새벽 다섯시에 애인의 집으로 뛰어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일본 여성도 있다고 한다.) 한편, 빨강의 여자들, 특히 쌍둥이처럼 닮은 나오코와 사에키는 둘 다 연인이 죽었던 스무살 즈음에 시계를 멈춘 채 살아가는 수동적이고 내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와타나베와 카프카에게 ‘나를 기억해줘’란 애잔한 말을 남기고 죽어간다.
신기한 것은 이 여자들과 대부분 관계를 갖는 ‘나’라는 존재다. 하루키의 어떤 소설에서건 볼 수 있는 그 남자-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재즈와 록을 좋아하며 섹스와 여자에 관심이 있지만 바람둥이는 아닌- 는 ‘평범하고 머리가 별로 좋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들은 그와 대화만 하면 금방 경계심을 풀어버린다. <댄스 댄스 댄스>의 유키, <태엽 감는 새>의 메이 등의 ‘롤리타’들은 ‘나’로부터 구원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대학 시절 친구가 딱 두명이었는데 둘 다 여자였다고 한다(그중 한명인 요코와 결혼한 것이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가끔 그의 문장들을 보면 여자를 너무 잘 안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어쩌면 그는 구조적으로 여성과 더 쉽게 소통하도록 만들어진 변형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손은 편의점에도 있다
신작 <어둠의 저편>은 어떤 책?
2003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 취재차 아일랜드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처럼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을 다룬 <어둠의 저편>을 들고 우리 곁에 왔다. 이것은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 두 자매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쓴 것이다. 밤이 되면 시간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리는 탓일까? 하룻밤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느슨하고 관념적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열아홉살 마리는 미모의 언니 에리에게 외모 콤플렉스를 느낀다. 그런데 에리는 2달 전 ‘지금부터 한동안 잠을 자겠어’라고 선언한 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들어 있다. 한편, 마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밤새 책을 읽고 있다가 우연히 언니의 친구 다카하시를 만난다. 2년 만에 만난 다카하시는 러브호텔 ‘알파빌’에 손님에게 폭행당한 중국인 매춘부가 쓰러져 있다며 마리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외국어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그녀는 알파빌로 가서 카오루, 고무기, 고오로기 등 호텔 사람들을 만난다. 고오로기와의 대화에서 마리는 언니의 기묘한 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고오로기는 ‘누군가 입을 맞추면 확 하고 눈을 뜨지 않을까?’라고 대답해준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과 엘리베이터의 기억을 떠올린 마리는 언니와의 어떤 일체감을 얻은 뒤, 잠자는 에리에게 입맞춘다.
하루키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마리와 에리의 입장에서 세계를 양분한다.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마리, ‘내부에 저쪽 세계가 몰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 빠진 에리,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쫓겨다니는 고오로기, 폭력에 전 매춘부, 폭력에 무감각한 시라가와. 양쪽을 막론하고 인물들은 각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코 도망칠 수 없는’ 현대 문명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모순도, 감정도 없는 호텔 알파빌은 바로 이 두 세계를 잇는 상징적 장소다. 그곳에서 폭력을 행사한 30대 중반의 남자를 방범 카메라로 쫓는 모습이 에리를 집요하게 비추는 카메라의 폭력적인 느낌과 닮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하루키는 패밀리 레스토랑, 편의점, 호텔 등 평범한 공간에서도 누군가는 우리 감각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묻고 있다. 그리고 답변은 희망적이다. 마리가 에리에게 키스함으로써 서로 잘 모르는 두 세계가 만나고 소통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약간의 변신을 보여준 하루키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좀 미흡한 면이 있다. 어쩌면 그동안 우물이나 도서관 속에 처박힌 하루키의 분신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열광할지도. 하지만 그가 등단한 지 4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와 20대적 감수성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은 동시대의 젊은 독자들로선 분명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