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실사를 조종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미키 루크가 빌딩 숲 위를 날아다니고 물속으로 자동차를 몰고 떨어진다 해도, 망사 스타킹과 가죽 브래지어 차림의 여전사들이 악당들을 기관총 세례로 몰살시킨다 해도, 왕년의 명형사 브루스 윌리스가 ‘올드보이’처럼 8년 만에 감옥을 벗어나 여자를 위해 복수를 펼친다 해도 <씬 시티>가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란함이야 3분 이상 지속되면 곧 지루해질 신기루이기 때문이다. 그 휘황한 네온사인 뒤편으로 누가 지금 걸어들어오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 이야기는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담배를 늘 입에서 떼지 않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이 피로에 전 주름살투성이인 채로 자신의 연인을 구하는 로맨틱한 영웅들의 귀환담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컬러 만화용 잉크를 뒤집어쓰고 나온 듯한 이들 면면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많다. 과묵하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좋아하며, 잔인한 복수극을 펼치면서도 굵고 나직한 목소리로 시적인 내레이션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함께 잠자리를 나누었던 여인을 잃은 미키 루크(마브),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우악스럽게 군 마초를 혼내려는 클라이브 오언(드와이트),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소녀를 구하려는 브루스 윌리스(존 하티건)는 세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며, 같은 영혼을 나누어 가진 영혼의 쌍둥이다. 이들의 유전자는 줄기차게 트렌치코트만을 고집하며 남성적이고 고독한 멋에 빠지는 걸 좋아하며(마브는 다른 이들이 자기가 입은 것보다 더 멋진 코트를 입고 있는 걸 참지 못한다) 평범하고 닳아빠진 대사는 절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여자를 건드린 악당은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말없이 실천에 옮긴다.
이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코트를 휘날리며 상상도 하기 힘든 고난도 액션을 고독한 표정으로 해치우느라, 죄악의 도시에 서식하는 수컷들 대부분은 우스꽝스럽고 더럽고 잔인하고 치졸한 역할만을 강요받는다. 특히 기성질서에 기생하는 권력자들의 흉악은 더 기형적으로 강조된다. 경찰이 지키는 것은 사회의 공공선이 아니라 권력자의 안위이며, 성직자가 지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창녀는 죽어야 된다’ 따위의 터무니없는 사적 복수의 원칙이다. <씬 시티>에서 그리는 죄악의 도시는 정교일치의 이슬람 문명권을 상기시킨다. 정치인과 성직자는 도시의 구석구석에 골고루 부패의 씨앗을 뿌린다. 다른 무엇보다 이들의 최대 악덕은, 여성을 폭력적으로 건드린다는 것이다. 로맨틱한 영웅들과 이들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정말 피할 수 없는 건, 매력은커녕 추악하게 생긴 악당들이 타살되는 끔찍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도대체 악과 선을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누구이며, 사적인 복수는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씬 시티>에서는 사회적인 정의가 파탄나 있다. 그렇다면, 여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로맨티스트들이 정의의 담지자인가? 이들 로맨티스트는 자신이 직권으로 판결을 내리고 직접 형을 집행한다. 고환을 손으로 잡아서 뜯어내고, 굶주린 개로 하여금 살을 뜯게 하고, 주먹을 휘둘러 얼굴을 박살낸다. 철저히 장르 안에서 휘두르고 있는 폭력은 유희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잔인한 폭행 과정에서 꽤 시간을 지체하느라 장르적 즐거움은 피곤함으로 바뀐다. 그래서 그것은 로맨틱한 복수도 되지 못하고, 정의로운 심판이 되지도 않는다. 액션에서 오는 쾌감이 줄어들고, 로맨티스트들에 대한 공감도 작아진다. 악역들에게 권세는 주었으되, 매력은 주지 않았으니 그들이 죽는다고 어떤 대단한 만족이 오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들의 승리, 또는 죽음은 그래서 장엄해야 할 때 조금 사소해지거나 구차해질 때가 있다.
오히려 더욱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클라이브 오언과 함께 베니치오 델 토로 일당에 맞서는 로자리오 도슨, 제이미 킹, 데본 아오키 등 거리의 여자들이다. 망사 스타킹과 가죽 미니스커트 차림에 기관총과 칼을 들고 남자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장면은 뼈가 얼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정작 이 영화의 무의식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여성을 지키려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남성을 거세하려는 여성들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닐까. 심장 질환을 앓는 브루스 윌리스가 쉰 목소리로 애타게 사랑을 지켜내려는 장면이 사무치는 감동을 안기지만, 그리고 상처와 주름을 얼굴에 가득 새긴 채 씬 시티의 뒷골목을 걷는 미키 루크의 뒷모습이 쓸쓸함을 안기지만, 이상하게 그런 감동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한다. 장르 안에서 허용된 펄프적인 잡동사니들은 모두 극단만을 향해 치닫는다. 뜨겁게 고조시켰다가도 차갑게 냉각시킬 줄 아는 리듬감각이 없는 것이다. 로맨티스트들보다는, 칼을 차 지붕을 뚫고 남자의 머리를 쪼개는 여전사 데본 아오키나 자신의 살을 개가 파먹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엘리야 우드 같은 기괴한 캐릭터만 잔상에 남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불만들이 적지 않지만, 미키 루크의 얼굴만으로도 이 작품은 볼만하다. 세월은 그의 얼굴을 부수어놓았지만, 그의 얼굴은 상처와 굴곡을 새겨넣으며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하게 되었다. 퇴장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매우 수컷다운 체취를 스크린 곳곳에 남긴다. 마브의 캐릭터는 이제는 멸종의 운명에 처한 마초들을 위한 판타지이자 장송곡이다.
문학 작품 못지않은 명대사들
<씬 시티>의 대사엔 ‘클래스’가 있다
<씬 시티>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열렬한 애독자이자 감독인 프랭크 밀러의 입김 덕분인지 로맨틱한 대사로 넘실댄다. 대구법을 많이 써 리듬감이 넘치고, 직유법을 많이 써서 화려한 대사들은 웬만한 문학 작품 못지않은 여운을 준다. 미키 루크와 브루스 윌리스의 저음은 이들 대사를 음미하는 데 제격이다. 만화 특유의 과장된 캐릭터와 깊이없는 줄거리라고 깔보지 말라. 이 작품의 대사엔 ‘클래스’가 있다.
잭 래퍼티: 이봐, 이거 큰 실수하는 거야, 진짜 큰 실수라고. 드와이트: 진짜 큰 실수를 한 건 당신이야. 물을 안 내렸잖아. (드와이트는 재키보이의 머리를 변기통에 처넣는다.)
마브: 나는 살인청부업자가 좋아. 어떻게 죽여도 죄의식이 남질 않거든.
존 하티건: 늙은 남자는 죽는다. 젊은 소녀는 산다. 공정한 거래군. 사랑한다, 낸시. 추기경: 그깟 창녀 시체 하나에 목숨을 걸 이유가 있나. 마브: 죽을 이유. 죽일 이유(사제를 쏜다). 지옥에 갈 이유(한방 더 쏜다). 아멘.
존 하티건: 열아홉 먹은 여자애를 안심시켜야 할 때, 나는 파이프 렌치로 뇌수술을 하는 중풍환자 못지않게 전문가가 된다.
(하티건이 밥의 얼굴을 주먹으로 날린다.) 존 하티건: 동료와 끝장을 내는 방법. 지랄맞게 은퇴를 시작하는 방법.
세일즈맨: 바람이 전율을 일으킨다. 여자는 나긋하고 따뜻하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여자의 향수는 달콤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다고, 당신을 데리고 멀리멀리 가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소음기를 단 총소리) 권총 소리는 속삭임처럼 들린다. 여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꽉 부둥켜안았다. 여자는 어디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여자의 수표를 내일 아침 현금으로 바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