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뮤지컬 전성 시대가 온 것일까? 한때는 브로드웨이에 가야만 뮤지컬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학로에서 골라가며 뮤지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해외 프랜차이즈 뮤지컬 뿐만 아니라 순수 창작 뮤지컬의 폭발적인 급성장은 새로운 뮤지컬 스타들의 탄생을 가져왔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이 3박자가 다 맞아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뮤지컬계의 진리.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김선영, <지킬 앤 하이드>의 민영기, <갓스펠>의 배우 쏘냐, <헤드윅>의 오만석 등 무대에서 가능성을 검증받은 젊은 뮤지컬 배우 4인을 만났다.
꼬질하고 풋풋한 뮤지컬은 어때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김선영
한발한발 관객의 환호와 호감을 체감해가면서도 배우 김선영은 이 만찬에 안위하고만 있지 않다. 그에게 배우란 판타지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존재라기보다, 일상인으로서 무대 위 자신을 확장하고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른바, 배우로서의 성숙은 더 나은 인간 됨됨이를 지상 과제로 둔다는 것인데….
“안녕하세요, 뮤지컬 배우 김선영이에요. 이게 어색해요. 내가 그 정도로 잘하는 배우인가 하는 생각이 들죠. 해야 할 게 더 많아요. 그때, ‘배우예요’ 하고 싶지 지금은, 아직은 배우가 되고 싶을 뿐이죠.” 97년 신인상을 안겨줬던 그의 첫 뮤지컬 <페임> 오디션장. 연습복 개념조차 없어 두툼한 폴라티에 청바지를 입고 오디션에 응했던 그는, 타이츠를 입고 찢고 돌리는 단련된 몸들 틈에서 턴을 돌다가 바지를 밟아 넘어지기 일쑤였다. 이때만 해도 뮤지컬은 그에게 막연한 꿈이었고 막연한 것은 열기로 그를 달궜다. 하지만, 지금은 뮤지컬이라는 울타리를 곰곰이 쓰다듬으며 여기는 또 어디인가, 생각에 잠긴다.
“잔 하나를 들어올려도 저는 평소 하듯이 들고 싶은데 꼭 이렇게 추켜올려야 하죠. 제가 하고 싶은 역할도 창녀, 바보같이 강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주위에서 누굴 만나듯이 처음엔 누군지도 모르게 평범하다가 어느 순간 슥 스며들더니 그 인물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이 끌리는 그런 인물이에요. 하지만, 아직 뮤지컬에선 그런 작품을 찾기가 힘들죠.”
이러한 발견은 영화를 뮤지컬화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접하면서 얻게 된 것일 수 있다. 주인공 인희 역을 하면서 평범한 한 여자의 여고생 시절과 아줌마 역할을 두루 섭렵해야 했고, 그만큼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도 소화해야 했다. 팝과 록, 뮤지컬 창작곡에 뽕짝까지, 삶의 평범함이 이런저런 유행가 가락에도 묵묵히 흘러가듯이 그렇게 노래들을 불렀다. 창작 뮤지컬인데다 영화를 뮤지컬로 올리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초연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지만, 그는 아직도 초연 때의 “추레하고 풋풋한” 맛이 더 좋단다. 풋풋한 것들은 아직 자리를 잡기 전 갈등 상황에 있다. 어설프거나 어수룩해 보인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능숙한 것들한테는 없는 무엇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마리아가 부르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이에요.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죠. <마리아 마리아>를 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마리아는 예수를 단순히 남자로 좋아하거나, 단순히 고마워하고 있다기보다 자신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으로 대해준 한 사람을 향해, 그 마음이 신성에 대한 경배인지 남성에 대한 사랑인지,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는 거죠. 이런 게 좋아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좋고, 연기나 노래도 이렇게 안에서 격렬한 게 좋고.”
이제 서른 즈음에 진입하고보니, 예전에 할 줄 몰랐던 것들에 능숙해졌다. 그중 하나가 아무것도 안 하고 몇날 며칠 쉴 수 있는 것. 예전에는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것 같고, 무언가를 봐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쫓겼다. 하지만, “쫓기면서 약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절친한 친구가 그래요. ‘네가 나이 마흔에 진정한 스타가 됐으면 좋겠다’고. 유예시간을 둘 때 진정한 무엇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시간도 많고, 갈 길도 멀고.”
제6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자신인상 수상·뮤지컬 <페임> <렌트> <오! 해피데이> <태풍> <로미오와 줄리엣> <토요일밤의 열기> <마리아 마리아> <행진! 와이키키 브라더스> <지킬 앤 하이드>
말하듯 노래하라
<로미오 앤 줄리엣>의 민영기
10대 중반까지 노래라고는 접해본 적 없던 한 음치 소년은, 지금 촉망받는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중3 때 친구따라 강남 가듯 따라 들어간 교회에서 그는 세상에 이런 것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는 듯 넋을 잃었다. 어린 민영기에게 그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처럼 탐나는 것이었다.
“노래가 좋았던 건, 말을 하는 입에서 음정이 나는 것도 희한한데 그게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니, 더 신기한 거예요. 그래도 막연하게 부럽기만 했지 내가 그걸 하리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그게 신기했던 소년은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다. 한데 이상하게도 자기가 들어가면 ‘화음’에 이상한 소리가 섞였다. 음치였다. 교회에서 불사르는 불협화음에도 부족함을 느낀 민영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학교 합창단 오디션에 응모한다. 20명의 응시자 중 19명이 붙었고 한 사람이 떨어졌다. 그였다. 고등학교 CA 합창단에 2차례나 응모해 붙고 나서 1년 뒤, 그는 합창단 정기 연주회에서 5명의 솔로 중 한명에 뽑혀 있었다.
“많이 고민하고 많이 생각했어요. 듣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의 이 ‘많이’ 훈련법은 결국 음악도가 되겠다는 과단을 내리도록 도왔다. 공대에 입학했지만 대학을 쉰 채 그는 **전자에서 변압기 만드는 단순노동일을 시작했다. 고액이라는 성악 레슨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싶었죠. 그래도 젊어서 이 짓 안 하고 지나가면 나중에 땅을 칠 것 같더라고요.”
남들은 대학 준비를 위해 2∼3년 준비하는데 민영기는 반년을 했다. 그렇게 한양대 성악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에서도 이 시간차를 따라잡는 데 역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듯이 노래하라’는 미션의 실현. ‘엄마 밥 주세요’를 한 음정으로 노래하듯 말하고 말하듯 노래하기에 얼마나 열심이었던가. 여기까지는 제1막, <음치 소년 노래를 만나다>쯤으로 마무리할 수 있겠다. 그리고 2막에서는 <오페라 학도 뮤지컬로 방향을 틀다>로 이어진다. 오페라로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뮤지컬을 하게 된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무대 위의 배우들을 보조해주는 역할이었다. 노래에 가슴 떨던 전력의 음치소년은 또다시 가슴에서 파장을 느낀다. 오페라처럼 노래와 드라마가 무대 위에 있는데 관객은 훨씬 열렬히 호응하고 배우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것은 오페라의 것과 많이 달랐다. 그는 지금도 손짓 하나에 관객의 눈길이 따라오는 걸 느낀다. 그가 몰입되어 있을 때면 관객 역시 <지킬박사 앤 하이드>에서 지킬 박사를 안스러워하고 하이드를 째려보며,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가 약 먹을 때 훌쩍인다.
“제 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지점을 찾아가야 해요. 노래가 말하듯이 불렸을 때처럼 제 안의 무엇이 호흡하듯이 우러나올 때 다양한 것들이 열리더라고요. 노래 시작한 지 이제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노래 연습량을 줄이거나 쉴 수 없는 이유예요.”
지금은 앳되고 혈기왕성한 로미오와 지킬 박사로 관객을 만나고 있지만, 그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로, 돈키호테로, 모세로, 늙고 꼬부라져가면서도 무대를 지키는 게 더없는 소원이다.
한양대 성악과 졸업·제9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자 신인상 수상·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고려의 아침> <태풍> <시집가는 날> <지킬 앤 하이드>
오늘도 무사히 노래를 살았습니다
<갓스펠>의 쏘냐
“이번엔 일용엄니 됐어요. 솔직히 처음엔 걱정되더라고요. 얘가 상 받더니 어떻게 됐나, 그런 소리 들으면 어쩌나 하고 말이죠. 한데, 마음을 비우니까 재밌어지더라고요.”
쏘냐는 지난 2004년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역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여자 신인상을 받았고, 지금은 <갓스펠>을 공연 중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7일간의 에피소드를 엮은 이 작품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 변화하는 제자 역과 함께 예수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재현하기 위해 몸을 던져 망가졌다.
“무대 위에서 최고의 순간이요? 저는 커튼콜할 때 느껴요. 두 시간 동안 말도 못하게 긴장하고 있다가 관객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오늘도 해냈구나. 살았다’ 싶죠.”
처음 <페임>을 공연할 때만 해도 실수가 많았다. 대사를 안 해서 선생님뻘 되는 동료들 네 사람의 대사가 한꺼번에 날아가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 지키고 서 있어야 할 자기 구역을 벗어나는 바람에 내려와있는 막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아 주저앉기도 했으며, 랩스커트를 못 찾아 빨간 수영복 뒤편에 뭉툭한 와이어리스를 꽂고 그냥 나간 적도 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지킬 앤 하이드>를 하면서는 무대 위에서 다른 이들의 실수로 깨진 약병을 베이든 말든 쓸어담아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점차 무대를 제식으로 누비기 시작하면서도 가수로서, 뮤지컬 배우로서 ‘노래하는 쏘냐’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것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 <지킬 앤 하이드>에서 조승우를 만나면서였다. 쏘냐는 그를 통해서 자기 분야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연기라는 걸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고. 연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의 문제보다는 같이 하는 작업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닮고 싶은 단서를 발견했다.
“나도 그래야겠는데 워낙 푼수데기 아줌마식이라서요.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무대 밖에서 배우로 서는 법을 많이 배웠지요. 선배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며, 말다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며…. 혼자 방송활동하고 좌충우돌하느라고 미처 배울 새가 없었던 거예요.”
사실, 같은 노래이긴 해도 무대 위에서와 음반 작업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뮤지컬에서 새롭게 찾은 발성이 음반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낮에 뮤지컬 연습실에서 또박또박 노래 연습을 하고 나서 저녁 녹음실에 들어가면 음반 작업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큰 무대에서 관객에게 드라마를 전달하다보니 자연스레 강해지는 발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낮과 밤을 다투고 때론 헷갈리고 때론 시너지를 일으키며 작업한 5집 앨범이 오는 7월 발매 예정이다.
“운이 좋아서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들을 두루 불러볼 수 있었지요. 기회가 닿는다면 <미스 사이공>에서 미군 병사와 사랑에 빠지는 베트남 여인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전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 크고 감정이 풍부하죠. 무엇보다 그 작품 하고 나면 저희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떻게 사랑했을까, 하는 것들.”
노래는 그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었지만, 아마 더 많은 것을 주게 될 것 같다.
제10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자 신인상 수상·1집 <All Best>, 2집 <충전>, 3집 <N.A.Y.A>, 4집 <그림>·뮤지컬 <페임> <렌트> <지킬 앤 하이드> <갓스펠>
노래는 노력입니다
<헤드윅> 공동주연 오만석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어쩐지 나는 배우가 될 것 같아’ 하고 예감했어요.”
한 소년이 있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그 소년은 우연히 학교 연극반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고, 그때 배우가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대학입시와 함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즈음,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예술전문기관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냥 한번 보러가지 뭐,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험을 치러 갔는데 붙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연극원이라는 터전 위에서 소년은 신나게 ‘연기의 기술’을 연마하고 남자가 되었다. 현재 그의 장점으로 알려진 정확한 발성과 노래, 마임, 무용 실력, 전통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쌓인 기본기는 연극원에 빚진 것이다. 오만석은 연극원 출신 각본가가 극본을 쓴 연극 <이>에서 연산군의 사랑을 받는 동성애 상대인 광대 공길로 분해, 2000년 한국연극협회 남자 신인연기자상을 수상했다. 그뒤 뮤지컬 <그리스>에서 주인공 대니의 친구 두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번민하는 청년 트페플레프, 뮤지컬 <달고나>에서 담뱃가게 총각, 도사, 짱가, 권투선수 등 1인다역,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동현, 영화 <라이어>에서 게이청년 알렉스, 거기에 한·일합작 무용극 <갑판 위의 새들>까지, 그가 섭렵해온 작품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이>의 공길 이후, 그는 ‘내가 게이배우로 각인되는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하기도 했었다고. 그래서 <헤드윅>을 맡게 되었을 때 갈등이 전혀 없진 않았다.
“<헤드윅>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받았던 매력이 상당히 컸어요. 제대로 된 록음악으로 만든 뮤지컬이었죠. 그리고 이 뮤지컬은 거의 모노드라마인데, 배우로서는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원톱 주연은 <헤드윅>이 처음입니다.”
그가 부른 주제곡 <디 오리진 오브 러브>는 다른 3명의 헤드윅을 제치고, 뮤지컬 <헤드윅> O.S.T에 수록되었다. 단지 음악감독의 선별일 뿐라고 말하지만, <디 오리진 오브 러브>는 뮤지컬 <헤드윅>의 정수를 표현한 곡이기에 그의 곡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제가 정식 훈련을 안 받았는데도 노래를 잘한다고요? 절대음감을 타고났다고요? 천만에요. 저는 절대음치에 가깝습니다. 다 노력과 눈물 때문이죠.”
그는 선배 배우가 들려준 “아직 젊을 때는 이것저것 재지 말고 많이 경험해보라”는 말을 계속 되새기며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저는 그냥 배우입니다. 앞으로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배우로 남고 싶어요. 나중에 나이 60, 70살이 되어서도 부름받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그의 올해 일정은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꽉 차 있다. 그때까진 단 하루도 쉴 수 없고, 곧 내년 봄까지의 스케줄도 정해질 예정이라고. 갓 서른을 넘긴 오만석의 행보는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졸업·2000년 한국연극협회 남자 신인연기자상·연극 <이> <갈매기> <보이체크>·뮤지컬 <록키 호러 픽쳐 쇼> <그리스> <달고나> <사랑은 비를 타고>·영화 <라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