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미쟝센단편영화제 [3] - 공포·판타지
오정연 2005-06-22

공포·판타지 장르 단편영화 본선 진출작

절대악몽

발칙한 공포 혹은 무서운 상상력

실감나는 공포, 일상에 숨어 있는 판타지를 재현해야 하는 이 장르만큼 시각이미지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는 없을 것이다. 올해 절대악몽이라는 이름으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영화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고급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한다. <2km 주유소> <토마토 바이러스> <터치> 등에선 <장화, 홍련>를 능가하는 벽지를 만날 수 있고, 능수능란한 특수효과와 촬영·편집기술로 완성된 <제4종조우> <완벽한 도미요리> <안녕아빠> <HD20948b> 등에는 완벽에 가까운 가상세계가 구현되어 있다. 실험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일부 영화들의 화법 또한 인상적이다.

반전을 기대하신다고요?

<미성년자 관람불가>/ 박신우/ 9분30초/ 2005년

폐쇄된 취조실. 험상궂은 형사와 하얗고 멀끔한 얼굴의 앳된 용의자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끔찍하게 난자당한 여자의 사진을 들이밀며 남자는 묻는다. 네가 엄마를 죽였지, 전 아직 어려서 감옥에 안 가요, 네가 한 거 맞잖아!, 제가 안 그랬다니까요!! 한치의 물러남도 없던 둘의 대결을 중단시킨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전자의 물끓는 소리.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무렵, 숨막히는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얼굴만을 강조하던 카메라가 점점 뒤로 물러난다. 그 이전까지 심상찮은 타이밍에 간간이 끼어들던 일상의 소리들 역시 정체를 드러내고, 단순한 존속살해가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라고 여길 만한 반전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폭발 직전의 갈등상황을 날렵하게 베어내어, 노련한 연출과 촬영의 힘으로 열악한 제작여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영리한 영화의 전형 같다. 그러나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각종 끔찍하고 흉악한 패륜범죄들의 이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미성년자 관람불가>는, 손바닥을 뒤집듯 이루어지는 깜짝 반전을 위한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가장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끔찍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도 ‘뒤통수를 내리칠 만한 엄청난 반전은 필수 아냐?’라며 중얼거리는 관객의 무신경. 그렇게 10분짜리 단편영화는 2시간을 육박하는 장편영화도 담을 수 없는 어떤 진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사실적인 화법에서 가장 멀리, 가장 영화적이며 장르적인 방식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삼신할머니 vs 아기 배달부 황새

<아기나무>/ 이광욱/ 8분40초/ 2005년

세상의 끝인 듯 보이는 절벽 위, 나무 한 그루를 정성껏 보살피는 노파가 있다. 가지마다 달린 열매에는 태아가 들어 있고, 탐욕스런 갈매기와 세찬 폭풍우는 호시탐탐 열매를 노린다. 그러던 어느 날. 노파는 나무에서 떨어질 새 생명을 안전하게 받아내기 위해 포근한 바구니를 준비하지만 마지막까지 기다린 황새는 날렵하게 바구니를 가로채어 날아가버린다. 그러나 노파의 정성을 헛수고로 만든 황새를 지레 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노파의 부엌 한 구석에선 국거리를 기다리는 커다란 들솥에는 홀로 물이 끓고 있고, 얌체 같은 황새는 누군가의 집 창문에 아기바구니를 얌전히 물어다놓고 사라진다. 아기탄생을 둘러싼 동서양의 민화를 효과적으로 결합한 애니메이션. 이야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림체와 음악, 사운드디자인이 돋보인다.

팔 네개 달린 라푼젤 이야기

<어느 네 팔 소녀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 김은주/ 11분30초/ 2004년

남들과 조금 다른 한 소녀가 있다. 좁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평생 단순한 노동을 반복한 그녀는 팔이 네개다. 네개의 팔을 이용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만나는 타인은, 매일 일감을 날라주는 한 청년. 청년이 속한 외부세계를 동경하던 소녀는 자신이 바깥 사람들과 조금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결정을 내린다. 영화의 제목에 드러난 사소함은 오직 타인의 입장일 뿐이다. 콘트라스트가 뚜렷한 정지사진을 스톱모션처럼 연결시킨 듯한 질감의 이 영화는 성에 갇힌 공주의 슬픈 사랑을 미래적 상황에서 재현한다. 내용과 관련없이 반복되는 영어 내레이션, 정체불명의 외국어로 들려오는 주인공의 대사 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려주는 실험적 사운드가 흥미롭다.

종(種)정체성에 대한 공포 혹은 판타지

<호랑이 푸로젝트>/ 이지행/ 25분/ 2004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주인공은, 도무지 하고 싶은 일이 없다. 그에게는 잘 나가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동갑내기 친구 애희가 있는데, 간만에 만난 그는 자신의 몸이 점점 고양이과 동물의 그것처럼 변해간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TV에선 영화배우 문소리, 전직 변호사 등 잘 나가는 호랑이띠 여자들의 실종사건 뉴스가 연일 계속된다. 그러나 같은 호랑이띠이긴 하되, 잘 나가는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주인공은 천하태평. 이듬해 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TV 채널을 돌리며 제야의 종소리를 듣던 주인공은, 형형한 눈빛으로 아프리카의 밀림을 밝히며 자유를 만끽하는 한 무리의 호랑이들을 발견한다. 천편일률적인 일상 안에 스며든 판타지를 크게 힘들이지 않고 표현한 방식, <플란다스의 개>에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나른한 주인공 캐릭터가 친근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