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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전> 안에서 홍상수 쳐다보기 [1]

허문영의 홍상수傳에 대한 정성일의 극장前

…(중략) 오래된 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발견자는 그 책이 사실은 다른 두권의 책이 ‘엉성하게’ 묶인 상태란 걸 알게 됩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발견자는 저자의 의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각 책의 내용은 어차피 독립된 것이고, 묶여진 것에 개의치 말자”, “두 책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묶어놓은 것이므로 읽는 자는 두 책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두 다른 읽기의 태도가 이 영화의 관람 속에서 계속해서 교차되는 그런 관객 경험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라고 홍상수는 그 자신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의 보도자료 안에 그렇게 감독의 의도를 쓰고 있다. 이 영화를 본 다음 이 영화에 대해서 쓰여진 글들을 읽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글이 두 가지 다른 의도 중에서 모두 후자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엉성하게’ 묶인 상태인 두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전적으로 후자의 방법으로만 보려는 것은 홍상수가 의도하는 바의 절반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허문영만이 이 영화가 어떻게 묶여가는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반문을 제기한다(<씨네21> 505호 ‘정교하고 아름다운 합주’). 그는 이 영화의 결말, 이 영화의 결심이란 “텅 빈 이야기의 매듭, 혹은 끝내질(結) 수 없는 이야기의 묶여질(結) 수 없는 매듭”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두가 이 두개의 이야기를 묶으려 들 때 그걸 풀어버리는 글이 하나쯤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은 허문영의 글과 함께 ‘엉성하게’ 묶여져 있는 상태의 두개의 한 글이다. 물론 허문영은 내게 절반을 남기지 않았지만, 나는 그 글의 의도하지 않은 후반부를 쓸 생각이다. 허문영은 홍상수 안에서 <극장전>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 반대로 <극장전> 안에서 홍상수를 쳐다볼 생각이다. 여기서 이 두개의 글의 차이는 생각한다와 쳐다본다에 있다. 홍상수처럼 말하면 허문영의 글은 ‘홍상수傳’이고 나는 ‘홍상수前’을 쓸 생각이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홍상수가 청하는 대로) 두개 사이를 묶어놓은 다음 그 묶여진 매듭만을 다시 한번 풀어버리면 된다.

홍상수의 미학은 의심에서 시작한다

다른 출발점. 나는 <극장전>을 쳐다보기 위해서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을 생각하지 않을 참이다(다만 가끔 참고할 것이다). 그래서 <극장전>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다음 영화라거나 홍상수의 여섯 번째 영화라는 사실, 혹은 같은 배우가 나온 <생활의 발견>을 고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같은 출발점. 허문영은 “<극장전>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구조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그게 소란으로 들린다 해도, 그 소란마저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지속 불가능한 것들을 배열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화 역시 지속 불가능하다. 그게 <극장전>이라는 영화의 운명이다”라고 했다. 운명이라고? 그렇다. 이제 좀더 분명해진 것이지만 홍상수는 영화의 운명을 놓고 우리를 의심의 자리에 초대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운명일까? 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운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해를 간청한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은 오려 붙이고, 나누고, 되살리고, 지우거나 골라 붙이면서, 그것이 의도하는 바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등장인물의 행위가 보여준 논리적 귀결에 대해서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말에 대해서 무언가 대답을 얻어야 한다.

이런 영화들은 보는 사람에게 대답의 깨달음을 원한다. 혹은 퀴즈를 내고 대답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박찬욱의 <올드보이>. 다른 하나는 질문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은 할 수 있는 한 그 어리둥절함 앞에서 망설여야 한다. 당신은 퀴즈와 질문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 안에서 내가 혹시 놓친 것은 없을까, 아니면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닐까, 라고 물어보는 대신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나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를 망설여야 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가장 잘 보는 방법은 망설임이다. 이 앞에서 아는 척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기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답을 하는 순간 이 영화들의 운명은 끝난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가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드는 쪽에서는 질문을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보는 쪽에서는 대답을 찾아서 아는 척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만일 <극장전>을 본 다음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홍상수를 슬프게 만드는 일이다. (만들고 있는) 내가 모르는 것을 (보는)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의심하고 있는데 당신은 안다고 대답한다. 홍상수는 안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해야만 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말이지만 홍상수 영화의 미학은 의심이다. 나는 <극장전>을 의심스럽게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 말은 비유법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는 방법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를 상공 비행하여 내려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어떻게 매듭을 묶었느냐가 아니라 그 매듭이 어떻게 묶여가는가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조를 부정하는 과정, 혹은 되어 있음의 운명이 제시하는 절대적인 비극성에 맞서는 되어가기의 운명이 희롱하는 변덕스러운 희극성. 말하자면 그 변덕의 기기묘묘함.

(내 생각에) 홍상수의 새로운 점은 바로 그 변덕, 말하자면 종합의 포기에 있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들지도 않고, 그 안에서 그 어느 것에도 명령의 자리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변덕을 멋대로 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홍상수는 자기 영화의 원칙에 대해서 엄격하다. 심지어 이 원칙에 대한 엄격함은 그 자리에 대한 권리를 그 자신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때로 그 자신의 영화 속의 인물들, 혹은 사건에 대해서조차 애매하게 볼 때가 있다. 이미 던져져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의 자포자기한 세상에 대해 홍상수의 유일하게 반성적인 태도는 그의 직관이다. 그러나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를 직관에 내맡길 때 그는 그 직관이 붙든 것을 분석이 설명하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영화를 흔든다. 그가 영화를 흔드는 방법은 언제나 시간이다. 그 안에서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홍상수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플래시백을 사용한 적이 없다. 후일담이지만 그는 이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극장전>에서 플래시백을 찍어놓은 분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여튼 마지막 편집에서 빼버렸다), 그럼에도 시간은 되돌아오거나 혹은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앞의 시간은 반복으로 보이고, 뒤의 시간은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에서 반복과 차이는 착시이다. 대부분 그의 영화에서 반복과 차이를 말하면서 그것이 착시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 안에서 홍상수는 우리의 기억과 경쟁한다. 그런데 그 기억을 둘러싼 내기는 한 가지 바탕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 질문을 종합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그러니 <극장전>을 그 영화가 주어진 대로 다시 한번 쳐다보아야 한다. 말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의심하며 보되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

그냥 있는 대로 말하면 <극장전>은 1시간38분 상영시간(자막 포함)에 82숏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화 속의 영화, 그러니까 이형수가 찍은 영화까지 49숏이 진행되고, 그런 다음 50숏부터는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의 영화로 다시 돌아간 장면은 단 한숏도 없다(이하 모두 숏으로 셈하고 분류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좀 이상한 대목이 있다. 전부 82숏인데 내가 보기에 그것이 좀 이상하게 되어 있어서 신과 숏이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나누지 않아도 될 대목을 숏으로 나누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를테면 정동극장의 장면은 왜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홍상수는 그렇게 했다. 그건 한신으로 셈할 수 있다. 하지만 상원과 영실이 함께 죽으러 들어간 대흥장 여관방 이후의 장면은 사실 그 전체가 하나의 신인데 신 단위로 숏을 다시 나누었다. 그 안에서 시간의 생략이 있기 때문에 그냥 숏으로 셈하는 쪽이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이것은 홍상수가 영화를 신 단위로 생각하면서 숏을 찍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처음 볼 때 앞부분이 영화 속의 영화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는 49숏까지 진행하면서 어느 대목에서도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영화 속의 영화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홍상수는 구태여 숨길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려줄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49숏까지 그것을 영화 속의 영화라고 알고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혹은 잘못된 선견지명이다.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후일담. 홍상수 말에 의하면 <극장전>은 같은 장소가 되풀이되지만 장소별로 촬영 일정을 몰지 않고, 앞부분의 영화 속의 영화, 그러니까 상원과 영실의 이야기를 모두 찍은 다음, 영화가 끝난 다음의 영화, 동수와 최영실의 이야기를 찍었다(영화 속의 영화에서 엄지원을 말할 때는 영실, 영화가 끝난 다음 여배우 최영실을 말할 때는 최영실로 구분하였다). 홍상수는 현장에서 매번 그 장면의 시나리오를 썼고, 앞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 뒷부분을 찍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앞부분을 뒷부분에 맞춘 것이 아니라 뒷부분을 앞부분에 맞춘 것이다. 이 지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는 경험은 영화의 선형 진행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뒷부분을 놓고 앞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혹은 앞부분을 보면서 뒷부분을 끌어들여 질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여기서 쳐다보는 방법에 원칙을 세웠는데,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거슬러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극장전>이 요구하는 것이다. <극장전>을 질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된다. 만일 질문이 이 영화의 운명이라면 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한가지 더. 전체가 82숏인데 앞부분이 49숏인 것은 그 둘이 정확하게 접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홍상수의 말 그대로 그 엉성하게 묶인 두개의 이야기. 그 엉성함으로 판에 박힌 것들을 물리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주어진 것들에 대한 충실함. 홍상수 그 자신이 그렇게 뒤따르고자 하는(<씨네21> 506호 홍상수 특강 ‘세잔, 오즈, 브뉘엘, 르누아르를 좋아해요’) 예술가 세잔의 유명한 말, “흘러가는 세상의 한 순간에서 자신이 그 순간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상원의 내레이션이 의미하는 것

영화의 첫 장면은 남산 타워가 보이는 종로 거리에서 시작한다. 거기서 줌아웃하면 한 남자가 걸어온다. 누구나 이 남자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영화를 보는 우리의 습관이다. 그렇지만 바로 다음 숏에서 우리는 따돌림당한다. 종로 악기점 앞에서 그 남자, 그러니까 형은 동생에게 20만원을 준 다음 영화에서 빠져나간다(그런 다음 그 형을 다시 보려면 46숏, 상원의 집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둘의 대사는 좀 이상한데 형 말에 의하면 시험도 끝나고, 그래서 대학 입학시험을 치른 것 같은데 “인제 일년 동안 또 고생해야겠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라면 상원은 대학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재수를 해야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 형은 상원과 한집에 살지 않는지 등산을 같이 다니자고 하자 상원은 “그럼 다음에 형이 연락해”라고 한다. 그러자 형은 돈을 준 다음 “일요일날 엄마 집에서 보자”고 말한다. 형이 동생을 일요일에 보는데 집에서 보자고 말하는 대신 “엄마 집에서 보자”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반문. 그렇다면 아버지 집은 따로 있는가? 동생 상원은 엄마의 집과 아버지 집에서 번갈아 사는데 이번 일요일에는 엄마 집에 오는가? 하지만 <극장전>은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집은 이상한 집이다. 그 가족관계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서로 흩어진 형과 동생, 혹은 형과 어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이 질문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제 이 질문은 뒤에서 점점 더 수상해진다.

그런 다음 맥도날드 앞을 서성거리면서 그 돈을 쓸 생각을 상원은 “그 돈을 막 쓸 생각”이라고 마음먹는다. 이것이 <극장전>의 첫 번째 (보이스-오버-)내레이션이다. 그런 다음 내레이션은 49신까지 모두 20번이 나온다(이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레이션이 숏과 숏 사이에 걸친 대목도 있고, 반대로 27숏 지하철에서처럼 나누어서 말한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내레이션들은 매번 그 기능이 다르다. 이 말이 숏의 내용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찍지 않은 숏을 보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숏3의 내레이션, “형 때문에 인사동으로 들어가 다시 종각쪽으로 돌아나왔다(중략)”는 없어도 상관이 없다. 여기서 내레이션은 어떤 정보를 주거나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우리가 마치 상원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어떤 투명성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상원의 내레이션은 있지만 영실의 내레이션은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 속 영화는 일인칭 영화의 느낌을 준다. 혹은 상원을 따라가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동수와 최영실의 이야기에서는 82숏의 마지막 대목에서 동수가 한 말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내레이션이 없다.

숏13부터 숏16까지의 미스터리

인사동에서 종각쪽으로 돌아나와서 종로에서 청계천쪽으로 걸어가다가 광신안경점에서 일하는 영실을 만난다. 먼저 알아본 사람은 상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가던 상원이 멈춰 서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상원은 안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영실 때문이 아니라면 안경점 안을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은 2년 만에 만났으며, 영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큰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저녁 일곱시까지 기다리기 위해 상원은 연극을 본다. 이윤택씨가 쓰고 연출한 <어머니>를 손숙씨가 연기하고 있다. 입구 포스터에 의하면 이 연극은 2001년 12월14일에서 24일까지 공연한다. <극장전>의 영화 속의 영화 이야기는 그중 하루일 것이다(그러므로 영화 속의 영화가 끝난 다음은 3년 뒤인 셈이다). 상원과 영실이 종로 거리를 돌아다닐 때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이 영화에 더이상의 흔적은 없다. 그때 상원은 “영실이 나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대신에 호프집에 가기로 했다. 괜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담배 한갑을 샀다”라고 한다. 이 말을 기억해둘 것.

(숏8) 둘은 만나서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신다. 둘 다 모두 좀 취했다. 상원은 “영실이 먼저 남자친구가 내 친구라 만나는 걸 결국 포기했었다”고 내레이션 한다. 그런데 그때 상원이 “이러다 우리 사고 내겠다”라고 말하자 영실은 “내가 너 첩 해줄까?”라고 묻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말을 처음에 못 알아들었다. 상원이 “참, 너 진짜 웃긴다”라고 하자 “웃지마, 정말로 웃지마, 상원아 내가 진짜 너 첩 해줄까?”라고 묻는다. 첩이라는 말은 요즘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이 영화는 사극이 아니다. 그런데 영실은 그 단어를 사용한다. 영실은 애인이 아니라 첩을 되기를 간청한다. 상원은 유부남이 아니며, 영실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첩은 아내가 아니며 애인이 아니다. 혹은 정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첩이 되기를 원하는 것. 그 말을 끝내고 나면 숏10 노래방으로 이어진다. 영실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두손으로 잡고 애원하듯이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을 부른다. “많은 시간이 흘러 서로 잊고 지내도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때도 이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에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하지만 상원의 노래(의 숏)는 없다. 혹은 상원은 첩의 노래를 듣는다.

그런 다음 둘은 종로의 밤거리를 함께 걷는다. 상원이 “어디 갈까, 집에 갈까”라고 말하자 영실은 배가 아프다고 거리에 주저앉는다. 골목에서 둘이 안는 장면은 미도 여관 안에 누워 있는 영실의 젖가슴으로 이어진다. 그 젖가슴에서 줌아웃하면 영실은 “아퍼”라고 말하고, 상원은 섹스가 되지 않아서 “미안, 미안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영실은 “안 된다고 하면서 왜 자꾸 할려구 그래”라고 말한다. 상원은 섹스를 포기하고, 영실과 눕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상원은 영실에게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묻는다. 영실은 “담임이 미친놈이라서, 자꾸 만지니까”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상원의 대답은 “그 나쁜 놈”이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음, 그랬구나”이다. 그런 다음 상원은 꿈을 꾼다. “화장실 문이라고 열었는데 복도가 나왔다.” 그러면 거기 금발 백인 여자가 반쯤 벗은 차림으로 상원에서 사과를 권하면서 한국말로 “사과 하나 드실래요”한다. 홍상수 자신의 말에 의하면 (<필름2.0> 231호 ‘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촌스럽게 이야기하자면 그 여자가 백인 여자이고, 몸을 많이 노출하고 있고, 사과를 먹고 있다는 데에서 아담과 이브, 순결, 이런 이미지를 막연히 의식한 것이다. 사실 처음에 떠오른 이미지는 60살 정도 먹은 거구의 아르헨티나 남자 혼자 자두인지 복숭아인지를 먹는 거였다. 그건 진짜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꿈장면인 숏14와 15는 상원의 마음, 혹은 무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숏13의 섹스장면을 두번 반복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그게 백인 여자이건 아르헨티나 남자이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사과를 먹건 복숭아를 먹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숏16은 숏13을 마치 다시 시작하듯이 똑같이 (영실의 젖가슴에서 줌아웃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두번 다 섹스에 실패한다. 그런데 숏13과 숏16은 그것이 하고자 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숏13은 미도 여관에서 나온 이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숏13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여기 두개의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는 숏13에서 이어지는 영실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숏16에서 이어지는 상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영실의 이야기를 먼저 들은 다음 그걸 중단시킨다. 그런데 그걸 중단시키는 방법은 상원의 꿈이다. 그러니까 이 꿈장면은 그 꿈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꿈이라는 그 형식이 영화에 중요해진 것이다(홍상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제목을 루이 아라공의 시 구절에서 빌려왔다. 내 생각에 이 제목은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목 자체의 선언적 성격에 방점이 있다. 그는 흔히 말하는 일상생활의 탐구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난 다음 마치 숏13이 없었다는 듯이 숏16이 진행된다. 영실이 학교를 그만두게 만든 담임은 그 다음 영화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없으며, 일본에 가고 싶다는 영실의 소망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만일 꿈을 사이에 두고 숏16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숏13이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 그대로 숏13은 중단되고(꿈을 꾼 다음, 좀 정확하게 마치 꿈처럼 중단되고) 숏16에서 상원은 영실이 “왜 자꾸 (안 되는 섹스를) 할려구 그래?”라고 묻자 갑자기 “나 죽고 싶은데, 깨끗하게 여기서 끝내고 싶어, 죽으며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한 다음 여기서부터 다시 진행된다. 이 말은 영실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기억해둘 것!). 영실이 “왜 죽고 싶은데?”라고 묻자 상원은 “몰라, 그냥 죽고 싶어, 너무너무 죽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갑자기 죽고 싶다는 것이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이 우연히 만난 경찰은 모텔에서 갑자기 자살하려고 베란다 난간에 매달렸다가 다시 기어올라온다. 혹은 실제로 죽여버리기도 한다. 그의 첫 번째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과 민재. 죽음은 홍상수 영화에 아주 가까이 있다. 그걸 밀쳐내고 싶은데 자꾸만 그의 등장인물들은 갑자기 죽고 싶어한다. 이 말의 방점은 갑자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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