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고양이를 부탁해>를 생각하면 마음에서는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올라 숨이 턱 막힌다. 다소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건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인 것이다. 회색빛 그림 속, 눈빛 하나만 살아 있는 소녀들이 유령처럼, 바람처럼 스쳐지나가고 휑하니 남은 빈 공간을 바라보는 느낌처럼. 카메라도, 소녀들도, 이야기도 참으로 고요한데 그 정적인 공기에서는 연약하고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는 슬픔이 자꾸 새어나온다. 배를 타고 물처럼 흘러다니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던 소녀의 몽롱한 중얼거림처럼. 그것은 너무나 청명해서 안타까운 물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예민한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을 정말 온 마음을 다해 기다렸다.
<태풍태양>의 유사 아버지들
그러나 <태풍태양>은 달랐다. 소년들의 이야기는 매우 재빠르게 움직인다. 소년들의 발은 쇳소리를 내며 날쌔게 날고 카메라는 정신없이 요동친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들은 길 위, 난관 모서리, 벽 위를 미끄러지며 상처와 고민을 세상으로 미끄러뜨린다. 아픔을 안으로 삭이고 나지막한 이야기로 내뱉던 고양이의 소녀들과 달리, 소년들은 땀냄새를 맡으며 몸으로 논다. 그런데, 이 멋진 몸의 놀이가 왜 이렇게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현란한 카메라와 화려한 몸의 향연 뒤에 그 움직임에 대한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집 밖, 가족 밖의 모든 공간과 몸 하나로 소통할 수 있는 그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소년들의 스케이트 뒤에는 지극히 전형적인 ‘성인으로 진입하는’ 남성 서사가 존재한다. 여기엔 언제나 아버지 혹은 유사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빈자리가 있어야만 한다.
예컨대 소요의 진짜 아버지는 무책임하게 아들을 떠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혈연이 아니라 몸으로 공간을 공유하는, 다시 말해 일시적인 집을 끊임없이 만들어주는 형들이 들어선다. 그중에서도 공동체를 책임지는 남자다운 아버지 갑바와 아버지가 되기 싫은 아버지 모기는 영화의 두축이자, 소요의 성장을 지켜봐주는 유사 아버지들이다. 소요는 그들의 어깨를 보며 뒤따른다. 그래서 소년들의 연대에는 언제나 중심이 있다. 그것이 아버지이건, 책임이건, 의리이건. 한 공동체 속 희생의 의무가 그 자체만으로도 건강했던 소년들의 몸짓에 현실의 의미를 부과했다. 현실이 아니었던 놀이에 때가 타기 시작하자 소년들은 동요한다. 뭉침과 흩어짐, 존재와 사라짐에 소년들은, 소요는 흔들린다. 그러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마녀들의 회의처럼 모였던 소녀들의 만남에서는 그 무엇도 중심이 아니었다. 흩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들의 연대에는 딱히 분열이랄 것도 없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부탁하는 법을 알고 있는 소녀들. 이들은 집단을 형성하지 않고도 타자와 소통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소년들의 사유할 틈은 어디 있을까
<태풍태양> 소년들의 서사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드리워지는 순간, 그들은 아버지를 따르거나 이에 저항하거나 혹은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진부한 이야기 속에 흡수되는 운명에 갇힌다. 이렇게 정해진 노선 위에서는 소년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그들의 아픔이 얼마나 시리건 간에 풍성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갑바가 완벽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군대로 떠나고 모기가 어느 날 갑자기 오아시스로 사라져버려도 슬픔은 겉돈다. 소년들의 언어와 몸짓이 아무리 쿨하게 멋을 내어 요란하게 주변부를 오가도 그들은 여전히 중심의 서사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태풍태양>에는 사랑, 가족, 우정, 청춘, 일탈의 에피소드들이 어그레시브한 소년들의 움직임에 걸맞지 않게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 일탈이 일탈로 이어져버릴 것 같던 그들의 역동적인 날갯짓 속에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년 성장기의 낡은 서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양이 소녀들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부둣가에서, 황량한 도로에서 타자기와 휴대폰과 눈빛과 투명한 음성으로 풀어놓았던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기운에 근접조차 하지 못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일상과 일탈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는 없었다. 그러기에 현실은 이미 비현실이었다. 나는 그것이 슬펐다. 비현실 속 현실의 생명체. 그러나 자신의 표정과 언어에 ‘나 고뇌한다’고 써붙이고서 아버지를 끌고다니는 늙은 사춘기 소년들에게는 먼지가 난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영화 속에서 소년들은 사유할 틈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들의 역동적인 발짓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