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영화의 권태를 돌파하다
세드릭 칸은 별안간 나타난 프랑스의 젊은 감독이다. 영화학교 출신도 아니고, 프랑스영화의 지적 전통 안에 서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정체하고 있는 프랑스영화에서 삐죽 솟은 희망이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권태>(1998)가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하는 것을 계기로 <씨네21>은 공식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미지의 감독에게 질문을 묶어 보냈고, 그는 서면으로 답변을 보내왔다. 그 답변들을 중심으로, 덧붙여 이전의 인터뷰들을 참조하면서 ‘세드릭 칸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기존의 대가들만으로 힘겹게 명맥을 유지해가는 프랑스영화의 위기 속에서 세드릭 칸의 출현은 신선했다. 대개 유명 영화학교 출신의 젊은 감독들이 겉멋과 치기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그의 자리는 더 빛이 났다. 그는 동세대의 다른 프랑스 감독들이 주로 거치는 정식 교육과정을 밟아 영화를 공부한 인물이 아니다. 20대 초입부터 이미 각본과 연출을 독학으로 준비했던 그는 문학전공자로서의 길을 접고, 동시에 2년간의 대학생활도 그만뒀다. 그렇게 영화에 뛰어든 것이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1987)였다. 거기에서 편집 기사 얀 드데의 조수를 했다. 종종 카트린 브레이야의 <36fillets>(1988) 편집 조수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딘 것으로 그의 경력이 소개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작품은 <사탄의 태양 아래> 다음해의 영화이고,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얀 드데의 편집 조수로 일했던 두 번째 작품이다(얀 드데와의 인연은 세드릭 칸의 주요 장편 <권태>(1998), <로베르토 수코>(2001), <레드 라이트>(2004)의 편집을 맡기는 데까지 이어졌다).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 편집 조수로 입문
우선 모리스 피알라와의 작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혹은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가 그의 시작이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세드릭 칸은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들은 내게 영화를 만들 의지를 심어준다”고 답한다. 말하자면 세드릭 칸은 영화의 ‘자연주의자’로 불리는 모리스 피알라에게서 교육적 수혜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화에 등장하여 어쩔줄 몰라하는 인물들의 방황은 운명의 사슬에 얽혀서도 냉정하리만치 삶을 살아가는 모리스 피알라의 그 인물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교체, 관찰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물두살, 1988년에 모리스 피알라 영화의 편집 조수였던 세드릭 칸은 드디어 스물다섯살인 1991년에 첫 장편영화를 완성하게 되는데, “사춘기의 기억과 인상들로 쓰여진” <철로변 술집>이 그것이다. 이후 세드릭 칸은 두 번째 장편 <너무나 행복한>으로 장 비고상을 수상하고, 세 번째 장편 <권태>에 이르러서는 루이 델뤽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영화의 확실한 총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뒤로 <로베르토 수코>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레드 라이트>가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세드릭의 인물들은 자기 바깥의 길로 다시 나아간다
지금까지 완성한 다섯편의 작품 중 세드릭 칸의 대표작은 <권태> <로베르토 수코> <레드 라이트> 세편이다. 그중에서 <로베르토 수코>는 동명 연쇄살인범의 실화에서 소재를 얻었다. 1981년 18살이던 로베르토 수코는 부모를 모두 죽이고 감호소에 들어가지만 탈주하여 연쇄살인 행각을 벌이다가 다시 붙잡혀 1988년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세드릭 칸은 제임스 엘로이의 추리소설을 참조하고, 이전의 연극이 그를 다루었던 방식과 달리 범죄자로서의 고정적 면모를 중층적인 캐릭터로 다각화하면서, 어느 하나의 해석과 맞물리지 않는 다면적인 범죄자 수코의 인간적 구조를 보여주려고 시도하였다. 본능처럼 사람을 죽여나가지만, 한 여자에게만은 순진하게 굴었던 그의 모습을 병렬 배치하면서 영화는 로베르토 수코의 엽기성에 주목하기보다 그 이해 불가능한 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 더 큰 질문을 던진다.
<레드 라이트>는 조르주 시메농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어느 중산층 남자의 하룻밤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신경증 환자에 가까운 남자는 캠핑 간 아이들을 데리러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선다. 그러나 그는 보이는 술집마다 차를 세워 술을 마시고, 평소 불만으로 가득 찼던 아내는 싸움 뒤끝에 결국 기차로 가겠다며 그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자포자기 상태가 된 남자는 이제 완전히 만취에 이르고, 술집에서 만나 동승하게 된 남자가 범죄자인지도 모른 채 취기로 도로를 질주한다. 끝내는 범죄자와의 격투, 아내의 기차 사고 등을 겪으면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에 들어선다. 여기에서도 역시 인물은 자기의식의 통제 권한 바깥의 상황에 의해 무한정 밀려 어디론가 치닫게 된다.
<로베르토 수코>와 <레드 라이트>가 <권태> 이후의 작품들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권태>가 그 요약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세드릭 칸의 말처럼 <권태>는 그가 만든 “단 한편의 섹스영화”일 뿐이지만, 그의 관점이 가장 조화롭게 녹아들어간 영화이기 때문이다. <권태>는 이탈리아의 유명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1960년대 로마를 배경으로 썼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세드릭 칸은 원작의 구조적 몸체는 유지하면서도 시간을 옮기고, 인물들을 변형하고, 권태의 의미 쓰임새를 바꾸면서 육체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갈등하게 되는 사랑의 일반화된 모순 지점으로 영화를 몰고간다.
주인공은 마르땅이라는 철학자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철저하게 삶의 권태에 빠져 있다. 그러다가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은 세실리아라는 17살 여자다. 메이어스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의 모델이자 그의 애인이기도 했던 세실리아는 그를 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녀와의 끝없는 육체 게임으로 메이어스는 소진되어 죽어간 것이다. 처음에는 궁금증으로 세실리아와의 육체 관계를 시작한 마르땅은 어느 순간 자신도 메이어스와 마찬가지로 세실리아의 존재에 매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전화가 오지 않으면 못 참아하고,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낌새가 보이자 두려워하며 갖은 협박과 애원을 해서라도 잡으려고 한다. 언뜻 명확한 주종 관계로 시작하는 듯 보였던 영화 속 육체관계는 한번 전복된 이후 멈출 줄 모르는 이야기를 타고 넘으며 인간 사이의 근본적 권력 관계를 해부해내는 데까지 도달한다.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이 아니다”
세드릭 칸이 <권태>의 원작소설을 만나기 직전까지 구상 중이던 것은 “한 남자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매달리게 만드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였다. 완성된 <권태>의 플롯과 완전히 일치한다. 모라비아의 소설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세드릭 칸은 <권태>와 비슷한 유형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권태>에서 하나의 이미지 혹은 하나의 인물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여주인공 세실리아, 그녀의 존재감이 그것이다. 우연히 캐스팅하게 된 소피 길멩이라는 여배우를 통해 <권태>는 많은 부분을 얻게 되는데, 그녀의 이미지는 마치 이 영화 한편을 위해 지금까지 영화 바깥에서 살며 기다려온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녀의 풍만한 몸, 낮고 나직한 음성, 무표정의 얼굴, 의미없는 말투는 영화의 느낌을 끌고가는 형식 자체가 된다. “외양에 따라 배우들을 고른다”는 세드릭 칸은 “소피 길멩은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의 느낌에 실제로 매우 가깝다. 그녀의 매우 특별한 외양 때문에 좋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인공 세실리아는 여배우 소피 길멩의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비로운 이미지 덕에 눈길을 끌지만, 한편 그녀 캐릭터가 감독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상징의 주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녀는 도덕이 없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없는, 스스로의 존재성에 대한 관점조차 없는 여자다. 그녀는 영생적이며, 영원하다. 세실리아는 도덕 바깥에 있는 영속의 존재다”라고 감독은 말한다. 그것이 철학자이자 주인공인 마르땅이 아무리 그녀를 잡으려고 발버둥쳐도 잡히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세드릭 칸은 그녀를 “자연”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 자연의 인간 상태가 우리를 무엇으로 이끄는가? 세드릭 칸은 <권태>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바를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의 불가능성과 그 소유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유는 우리가 성적 관계를 갖는 한, 그 관계 안에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영속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주제를 만든다”라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는 대사가 영화 속에는 있다. 다른 남자와도 거림낌없이 섹스를 한다는 걸 알게 되어 화를 내는 마르땅과 도대체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세실리아가 주고받는 대화. 아니 실제로 세실리아는 마르땅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 못한다.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다. “넌 둘 다 원하는 군.” “어쩔 수 없어요. 두 사람 다 원해요.” “널 공유하란 말야?” “마찬가지잖아요. 전처럼 만날 텐데.” “두 남자를 사랑할 순 없는거야!” “할 수 있어요!”
“무한성의 종국이 어디인지를 궁금해했다”
‘당신의 흥미를 끄는 이 세계의 주제나 현상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세드릭 칸은 단박에 “무한성”이라고 답해왔다.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그것의 종국이 어디인지를 궁금해했다”고 덧붙였다. 이 언급을 영화와 연관하여 세드릭 칸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추측해보는 것도 유용한 소개가 될 것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남)주인공들은 주체가 아니다. 그들을 휘어잡는 것은 ‘자연’과 같은 여체이거나, 그와 유사한 정도의 도저한 상황들이다. <권태>에서 사랑에 미친 마르땅과 <로베르토 수코>에서 살인에 미친 수코, <레드 라이트>에서 술에 미친 안소니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은 ‘광증’ 정도가 될 텐데, 그들이 광기를 일으키고 광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 상황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났다는 걸 인정하는 또는 알아가는 전제이거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세 영화 모두에 공통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 가령 자동차를 죽음에 가까이 갈 만한 속도로 몰아대는 질주나, 그러면서 죽일 만큼 몰아붙이는 서로의 대화들이나, 상대를 찾아 전화기에 죽도록 매달리는 장면 등은 그에 대한 다급한 반응으로 설정된 연기들이다. 그러면서 ‘권태’라는 미명하에 섹스는 중독된 사랑을 소유하기 위한 열정으로 이어지고, 범죄자의 잔인함과 순진함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다각적인 성격으로 드러나고, 인생의 불빛이 붉은지 푸른지 혼란스럽게 깨달아가는 과정으로 거쳐가게 된다.
그 과정은 자기 바깥의 길로 다시 나아간다. 이 세 영화의 끝이 그렇듯, 인물들은 처음 시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전환점을 통과하거나 어딘가에 임시 도착하게 된다. 그래서 세드릭 칸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무한성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까지는 ‘비정박성’, 혹은 ‘유동성’으로 표현될 만한 것들이다. 거기에서 형식의 매너리즘적 조짐도 보이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아직까지는 세드릭 칸 영화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세드릭 칸은 현재 후반작업 중인 그의 차기작에 대해 “다시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라고 모호한 여운의 설명을 남긴다. 쉽게 잡히지는 않는다. 여하간 무언가 갖지 못하고, 분명치는 않아도, 찾으려고 애쓰고, 그러다가 이르는 어떤 전환에 관한 영화가 나올 것 같다.
<권태> 원작과 영화의 차이
정치적 권태감에서 보편적 감정으로
영화 <권태>는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1960년에 발표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 세드릭 칸은 이 원작에서 어떤 것을 유용하고, 또 어떤 것을 교체했는가? 우선 영화의 주인공 마르땅이 철학자인 것에 비해, 원작에서의 주인공 디노는 화가다. 마르땅이 실패한 것이 결혼생활이라면, 디노가 실패한 것은 삶의 즐거움 자체다. 영화에는 마르땅의 전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역할은 원작에서 디노와 어머니가 맡았던 에피소드를 교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원작은 주인공 디노와 어머니의 에피소드로 시작하고, 영화는 주인공 마르땅과 전 부인 소피의 신으로 시작한다. 세드릭 칸은 주인공 마르땅의 생각을 설명하는 캐릭터가 필요해서 전 부인을 만들어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그들’을 끌고가는 여주인공 체칠리아와 세실리아도 역시 모양새가 조금 다르다. 대사들은 유사하지만, 원작의 체칠리아가 더 당당하고 의지적인 것에 비해 영화의 세실리아는 무정형에 가까우며 더 기괴하다. ‘그녀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인데, 원작에서 체칠리아는 따라잡기 힘들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1960년대 동시대 현실 그 자체의 알레고리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세실리아는 어떤 알레고리라기보다는, 소유의 욕망에 붙잡히지 않고 원래 그대로 머무르는 무표정한 자연에 더 가깝게 묘사된다. 아마도 그 차이는 원작소설과 영화에서 권태의 의미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원작에서 화가 디노는 그가 생각하는 ‘권태’를 “권태의 감정은 현실의 부조리함에 의해 나의 내부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현실은 자신의 실제적인 존재를 내게 확신시키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권태는 소통 부재,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함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원작에서 권태라는 낱말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세계가 빠르게 채워가고 있는 재물의 권력, 정치적 권력을 조롱하는 말이며, 그것들과의 소통 부재이고, 혹은 거기에서 오는 권태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권력관계는 그리고 권태는 정치적 뉘앙스가 배제된 일반화된 감정이다. 육체를 통해 사랑의 권력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세드릭 칸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60년대 이탈리아에서 느꼈던 정치적 권태감을 <권태>라는 제목하에 보편적 인간 감정 사이의 ‘소유욕’으로 각색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