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8년 만이다. 느물느물한 한량 같은 조지 클루니와 칭얼거리는 크리스 오도넬, 우직한 아놀드 슈워제네거, 차마 보기 민망했던 알리시아 실버스톤과 우마 서먼이라는 스타 군단을 이끌고도 ‘재앙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던 <배트맨 앤 로빈> 이후로 <배트맨> 시리즈는 완전히 끝나버린 줄 알았다. 그러나 워너브러더스는 이 어둡지만 매혹적인 슈퍼히어로를 8년 동안 포기하지 않았고, 무성한 소문을 뒤로 한 채 크리스토퍼 놀란이 메가폰을 잡은 <배트맨 비긴즈>를 야심차게 내놓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팀 버튼이라는 막강한 대선배와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경쟁자를 모두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배트맨 비긴즈>가 무엇보다 리얼리스틱하게 보이길 바랐으며 주인공의 이중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적인 슈퍼히어로를 창조했다고 여러 차례 단언했다. 그 말대로 <배트맨 비긴즈>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코믹북의 판타지적 성격보다는 성장드라마의 어두운 리얼리티와 여름영화로서의 화끈한 엔터테인먼트를 골고루 배합한, 게다가 믿음직한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가 상당히 매끄럽고 솔깃하게 돋보이는 프리퀄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배트맨> 시리즈는 정말로 다시 ‘시작한다’.
어린 시절 박쥐 동굴에 떨어진 적이 있는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은 박쥐에 대한 공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부모와 함께 오페라를 보다가 박쥐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나오자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부모를 졸라 바깥으로 나온다. 그때 극심한 경기 불황에 고통받던 빈민이 우발적으로 브루스의 부모를 살해한다. 공포와 죄책감, 분노에 휩싸인 그는 악을 응징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감옥에서 만난 듀커드(리암 니슨)의 권유에 따라 무술 고수 라스 알굴(와타나베 겐)이 이끄는 ‘어둠의 사도들’ 조직에 합류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자비한 방침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조직을 떠난다. 고향 고담 시로 돌아온 웨인은 계승해야 할 기업 ‘웨인 엔터프라이즈’와 고담시 양쪽 모두 부패와 범죄로 더럽혀져 있음을 깨닫는다.
별 생각없이 팝콘을 씹으면서 관람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배트맨 비긴즈>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이중성이 대두된다. 월간지 <롤링 스톤>의 지적대로, <태양의 제국>과 <아메리칸 싸이코>라는 양극단에 위치한 이미지를 오간 크리스천 베일은 브루스 웨인의 이중적인 면모와 썩 잘 어울린다. 선천적인 재능이거나 우연한 사고로 얻은 초능력이 아닌, 자신의 의지와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인) 재력을 통해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를 스스로 ‘인공적으로’ 창조해냈다는 데 브루스 웨인의 특징이 있다. 창조주이자 동시에 피조물인 존재, 또한 ‘쇼와 속임수도 무기’라며 스스로의 힘뿐 아니라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점점 키워가는 그에 대한 판타지를 제대로 이용하는 철저한 엔터테이너. 그게 배트맨이다.
또한 여기에는 의지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된다. 듀커드는 웨인에게 “사회의 관용이 범죄를 키운다”면서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다. 싸우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남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선 스스로의 두려움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분노를 복수로 이겨낸 사람이다. 이것이 듀커드와 라스 알굴, 그리고 브루스 웨인 사이의 차이점이며, 동시에 니체와 니체를 오독한 나치즘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깨달음을 거친 주체적인 의지를 토대로 한 니체적 초인과 의지의 ‘수행적’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최고의 존재로 향해 나아가기 위한 무조건적인 자기 헌신을 토대로 한 나치즘적 초인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배트맨 비긴즈>는 공포영화의 전통을 끌어옴으로써 여타의 판타스틱 시리즈와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네 안에 있다는 사실, 감히 (너 자신을 바라보는) 심연을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테마다. 그 점은 가면이라는 도구를 통해 여실하게 드러난다. 브루스 웨인이 박쥐를 자신의 아이콘으로 삼은 이유는 “내가 느낀 두려움을 남들에게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지만 동시에 “검은색이 멋지기 때문”이다. 공포와 매혹을, 호기심과 경탄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박쥐 가면의 특징은 배트맨이 악당 팔코니를 조명기에 묶어 허공에 박쥐 그림자를 만드는 장면과 엔딩신에서 고든 경위가 허공에 박쥐 그림자를 만드는 장면의 ‘반복 속 차이’를 통해 시각화된다. 그에 반해 또 다른 악당 크레인의 허수아비 가면은,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지만, 환각에 빠진 상대방의 근원적인 두려움이 다양하게 투영되는 텅 빈 거울 같은 존재로 제시된다. 브루스 웨인의 박쥐 가면과 크레인의 허수아비 가면은 그런 면에서 각자 다른 악몽의 본산지이지만, 본질을 감춘 가면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어떤 효과와 분위기를 창출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선한 가르침과 또 다른 아버지 듀커드의 결벽증적인 분노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어야 했던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결코 자신의 태생적인 이중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웅변하는 예랄까.
알아두거나 말거나 ‘배트맨’ 시리즈 뒷이야기
“다음 속편에는 야한 장면도 좀 넣지?”
원래 5번째 속편 <배트맨:영년>의 감독으로는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예정되어 있었다.
애당초 배트맨의 새로운 속편을 만들 사람으로는 <파이>와 <레퀴엠>의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거론되었다. <씬 시티>의 원작자이자 공동 감독인 프랭크 밀러와 함께 애로노프스키가 준비 중이던 <배트맨> 시리즈의 제목은 <배트맨: 영년>이었다. 애로노프스키는 2001년경 가졌던 인터뷰에서 <배트맨: 영년>이 코믹북 시리즈로 나왔던 <영년>과는 매우 다를 것이고, 어느 정도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에 기반하고 있다며 ‘배트맨에 대해 상상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당장 잊어라! 우리는 정말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는 자신만만한 경고를 내린 바 있다. 그는 가능하다면 <배트맨: 영년>의 배경을 70년대로 배치하여 마치 <프렌치 커넥션> 같은 거친 경찰드라마 분위기로 재창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배트맨: 영년>과 <배트맨: 프라이트닝> <배트맨 비욘드> <배트맨 vs 슈퍼맨> 등의 프로젝트를 놓고 한참 저울질하던 워너가 결국 크리스토퍼 놀란을 새롭게 영입하여 <배트맨 비긴즈>에 먼저 착수함으로써 애로노프스키의 배트맨 버전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더불어 볼프강 페터슨이 연출을 맡고 <쎄븐>과 <슬리피 할로우>의 멋진 각본가 앤드루 케빈 워커가 참여한다고 알려졌던 <배트맨 vs 슈퍼맨> 역시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프로젝트인데, 밝고 선한 슈퍼맨과 폭력적이며 강박적인 배트맨이 처음에는 협력자로 출발하다가 종국에는 서로를 적으로 삼는다는 설정이다.
제이크 질렌홀, 가이 피어스, 조슈아 잭슨(<도슨의 청춘일기>의 조이) 등을 물리치고 새롭게 젊고 섹시한 배트맨 역을 거머쥔 크리스천 베일의 최근 발언 역시 흥미롭다. 이미 다음번 배트맨 영화의 출연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베일은 “<배트맨> 시리즈의 그래픽 노블에는 그의 ‘섹슈얼한’ 사생활 역시 자주 등장한다. 나는 다음번 배트맨 영화가 PG-13등급용과 R등급용으로 나누어서 개봉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배트맨의 R등급적 측면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대담한 제안을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