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작별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6월27일 방송을 끝으로 <귀엽거나 미치거나>는 종영합니다… 방송사에서 <귀엽거나…>가 투자에 비해 시청률이 기대에 못 미치고(6월6일 방송 저희 TNS 수도권 시청률은 14.9%로 전체 프로그램 5위였는데 시청률 때문에 폐지라니 참 아이러니하긴 하네요…), 시트콤이란 장르가 더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앞으로 당분간 SBS에서 시트콤을 시청하시진 못하실 것 같네요… (중략) 시간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마무리라도 제대로 했을 텐데… 종영을 빨리 시켜야 하는 프로그램은 최소한의 품위를 갖추고 죽을 권리도 없네요… ㅎㅎ.” 지난 6월7일 <귀엽거나…> 게시판에 김병욱 PD가 올린 마지막 인사다.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등 그간 김병욱 PD가 만든 시트콤의 팬이며 한창 <귀엽거나…>에 빠져들던 나로선 충격이다. 김병욱 시트콤을 조기종영시키는 TV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TV인가, 울컥 화가 치밀기도 했다.
물론 프로그램 만들고 폐지하는 거야 방송사 마음대로다. 시청자가 뭐라든 돈이 되는 프로그램은 엿가락 잡아당기듯 늘이고 돈이 안 되는 프로그램은 잽싸게 없애는 게 상업방송의 생리다. 다만 화가 나는건 왜 <귀엽거나…>냐는 거다. 김병욱 시트콤을 몇번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장기는 등장인물들의 인간적 결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희극화시키는 데 있다. <귀엽거나…>도 그렇다. 재벌회장인 김성원, 김수미 부부가 한낮에 소파 한쪽씩 차지하고 코골이 경쟁을 하는 장면을 보다가 으리으리한 저택의 오후 풍경에서 이런 상상을 하다니 ‘역시 김병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귀엽거나…>의 등장인물 가운데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없다. 소유진은 예쁘지만 하는 짓을 보면 좀 덜떨어진 아가씨이고, 미술관 큐레이터라는 근사한 직업을 가진 박경림은 오지랖이 너무 넓어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다. 부자라고 크게 나을 것도 없다. 재벌2세 청년이라고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처럼 근사한 남자는 아니다. 오히려 결혼하자마자 버림받은 남자 류승수가 정상에 가까워 보인다. 김병욱은 이런 인간적 결점이 빚어내는 소동극에서 해학이 넘치는 풍속화를 만들어낸다. 이건 기존 TV드라마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 기능도 하는데 특히 <귀엽거나…>는 <파리의 연인> 같은 신데렐라 드라마에 대한 유쾌한 패러디다. 언뜻 생각해봐도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 김정은보다 <귀엽거나…>의 인물들이 훨씬 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극장전> 속의 인물들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받아들인 ‘이상적인 인간의 행위’에 못 미치는 행동들을 합니다. 관객은 ‘이상적인 인간의 행위’라는 기준을 그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서 오히려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습관화된 이상이 새롭게 인식되는 과정 속에서 관객은 주체적으로 그 이상의 실체와 효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희극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엉뚱하지만 홍상수 감독이 <극장전>에 대해 한 이 말을 <귀엽거나…>에도 적용할 수 있다. 김병욱의 시트콤과 홍상수의 영화는 전혀 다른 뿌리를 갖고 있지만 특정한 대목에선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 결과 영웅과 악당, 왕자와 신데렐라가 사는 세상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희극이 탄생하는 것이다. TV라는 한계 안에서 김병욱이 만든 이런 세계는 작가의 경지다. <귀엽거나…> 조기종영 결정은 그런 걸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얘기 같다. 솔직히 말하면 화를 내기에 앞서 슬펐다. 당분간 김병욱 시트콤을 만날 수 없다니…. SBS가 ‘대땅’ 미치지 않고서야….
PS. ‘전영객잔’ 코너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극장전>에 관한 아주 긴 비평을 실었다. “좀 길게 쓰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예감하긴 했지만 무려 원고지 150매 분량이다. 읽고나니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구나 싶다. 어떤 영화는 아주 깊이 들어가서 길게 써야만 설명할 수 있다. <극장전>은 그런 영화이고, 정성일의 평은 짧은 글에 길들여진 기존 저널리즘의 관습에 대한 의미있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