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18일. 다섯명의 젊은이들이 덜컹거리는 밴을 타고 텍사스를 가로질러 콘서트장으로 향한다. <스위트홈 앨라배마>를 흥얼거리던 에린(제시카 비엘)은 대마초를 피우는 남자친구 캠퍼(에릭 벌포)와 다투고, 뒷자리의 모르간(조너선 터커)은 이미 마약에 취했는지 나사가 빠져보이고, 앤디(마이클 보겔)는 히치하이킹으로 이들과 합류한 히피, 페퍼(에리카 리어센)와 화끈한 스킨십에 몰두해 있다. 어두운 세상의 이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일행의 쾌활함은 예정된 지옥과 대비되고, 자욱한 먼지와 작열하는 태양은 이후의 어둠을 예고하는 듯 묘한 한기를 내뿜는다.
에린 일행이 흥겨운 여정 한복판에서 정체불명의 소녀를 발견하고 차를 세우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이들은 넋이 나간 소녀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인근 마을을 향해 방향을 틀고, 이에 미쳐 날뛰던 소녀는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다. 피와 뇌수를 뒤집어쓴 일행이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차 안에 시체가 있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라고 말하는 불친절한 노파, 시체를 랩으로 둘둘 말아 트렁크에 처넣는 보안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지팡이로 구타를 일삼는 괴팍한 노인 등 불길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해도, 이들은 모른다. 달리고 달려서 이 음산한 마을을 벗어나는 것만이 스스로를 살리는 길임을. 이후의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 그대로. 전기톱을 휘두르는 살인마가 나타나, 이들을 절단낼 것이다.
슬래셔 무비의 원조라고 알려진 <할로윈>보다 4년 먼저 만들어진 토브 후퍼의 1974년작 <텍사스 전기톱 학살>은 엽기적인 실화에서 착안한 소재,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강력한 살인마, 잔인한 방법으로 자유의 대가를 치르는 신세대, 끝까지 살아남는 단 한명의 여성 등 슬래셔 무비의 기본 플롯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포영화의 전설. 15만달러의 제작비로 전세계 1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이 영화는 텍사스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소개하는 뉴스릴에서 시작한다. 근방을 지나던 다섯명의 젊은이들이 살인마에게 차례로 희생되고, 끔찍한 살인마는 남성으로만 구성된 음산한 가족 속에서 양육되었음이 밝혀진다. 이 작품에 영감을 준 1950년대의 연쇄살인범 에드 게인은 광신도인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정신병자이며, 이후 <싸이코>와 <캐리> <양들의 침묵> 등 숱한 소설과 영화 속에서 변주된다.
2003년작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은 다섯명으로 구성된 일행, 너덜거리는 가죽을 뒤집어쓰고 전기톱을 사용하는 살인범, 그리고 살인범을 둘러싼 음산한 가족이라는 설정만을 남기고, 원작의 캐릭터와 플롯을 완전히 새로 구성한다.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텍사스의 보수적인 마초들로 읽힐 수 있었던 문제의 일가는 노파와 보안관, 장애노인,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두 여자, 착한 심성을 간직한 남자아이 등 성별과 연령대가 고르게 포진한 가족으로 대체됐다. 자살한 시체를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는 젊은이들에게 “그런 일이나 당해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걸 알지”라고 내뱉는 노파의 독백은 순진무구한 2000년대 젊은이들을 향한 경고처럼 들린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던 과거의 공포영화들을 롤러코스터로 변모시키는 오늘날의 리메이크 광풍 속에서 예전의 급진적 의미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예정된 결말을 변주하는 개별작품의 손맛을 즐기는 공포영화의 팬이라면, 과거의 고전이 새로운 감각과 기술의 힘으로 어떻게 예전의 묘미를 발전시켰는지를 비교하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30년만에 부활한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은 일단 몰라보게 말쑥해진 완성도를 자랑한다. 효과적으로 공포의 전조를 구성한 도입부를 마지막에 소름끼치게 반복하는 것은 매끄러운 각색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지절단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말 그대로의 ‘슬래셔’를 완성한 특수효과는, 신경질적으로 계속되는 비명과 극단적으로 강조·반복된 클로즈업으로 공포를 유발했던 원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격세지감 그 자체. 클라이맥스에 배치된 트레일러신은 숨가쁜 추격 한복판에서 맞닥뜨린 참을 수 없는 평온으로 관객의 숨통을 쥐락펴락하는 제작진의 리듬감이 돋보인다. 여기에 <풀 메탈 자켓>의 하트만 상사로 유명한 R. 리 이메이를 나약한 젊은이들을 패닉상태로 몰아넣는 보안관으로 캐스팅하고, 할리우드 최고의 괴짜 영화광 해리 놀즈를 머리만 남은 시체로 카메오 출연시키는 센스까지!
남자친구의 얼굴가죽을 뒤집어쓴 살인마와 대적해야 했던 슬픈 운명의 여주인공과 함께 손에 땀을 쥐는 모험을 경험한 관객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사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이 영화가 선사하는 안도감은, 보는 이에게 씻을 수 없는 불쾌감을 안겨줬던 원작의 뒤끝과는 확실히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 스며든 습한 공포를 묘사하면서 전세계를 사로잡은 J호러와 다른 것은 물론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엽기행각에 마음껏 소리지르고, 뻔히 보이는 위험을 피해가지 못하는 주인공들을 실컷 비웃은 뒤, 사실적인 영화의 재현에 감탄하면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그것이 바로 2005년 현재, 100분에 가까운 전기톱 살인마의 공포를 견딘 관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고전 호러 리메이크 열풍
호러는 오래 지속된다
정년은퇴한 살인마, 좀비, 유령들이 젊음의 묘약을 마셨나보다. 지금 미국은 고전 호러영화 리메이크 붐에 휩싸여 있다.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과 <하우스 오브 왁스>, 국내 개봉을 앞둔 <아미티빌 호러>의 성공에 고무된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오래된 창고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는 상태. 먼저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리메이크가 2005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프로덕션에 돌입한다는 소식. 조지 로메로의 걸작 <시체들의 새벽>(1978)을 성공적으로 리메이크했던 <새벽의 저주>(2004)의 잭 스나이더가 감독을 맡고, 오리지널 주연인 브루스 캠벨도 카메오로 출연할 계획이다. 조지 로메로의 시체 3부작 중 유일하게 리메이크되지 않은 <죽음의 날>(1985) 역시 2006년 개봉을 목표로 만들어질 예정. 한편, 시체 시리즈의 아버지 조지 로메로가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의 4번째 시체 연작 <시체들의 땅>은 올해 개봉할 예정. 데니스 호퍼, 톰 사비니, 아시아 아르젠토, 존 레기자모가 캐스팅되었으며, 시체 시리즈를 패러디한 영국산 코미디 <숀 오브 더 데드>(2004)의 두 주연배우가 시체 역으로 카메오 출연할 예정이다. 가장 신이 난 건 호러영화 전문 제작사들이다. ‘플래티넘 듄스’를 차려서 <텍사스 전기톱…>과 <아미티빌 호러>로 짭짤한 수익을 챙긴 마이클 베이도 끊임없이 고전 호러 리메이크에 덤벼들고 있다. 첫 번째 대기작은 살인마를 차에 태워줬다가 쫓기는 여자가 주인공인 86년작 컬트영화 <힛처>. 진짜 호러(!)는 두 번째 대기작의 면모다. 얼마 전 마이클 베이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1963)를 리메이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만달레이 스튜디오까지 합세했으니 허풍은 아닌 모양. 이쯤 되면 이건 호러영화 리메이크 ‘광’풍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