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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5월31일 탄생 60주년을 맞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뉴저먼 시네마의 심장이 멈춘 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뉴저먼 시네마의 전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1982년 37살 젊은 나이로 치열했던 생을 마감했다. 살아 있었다면 지난 5월31일 환갑을 맞았을 것이다. 생전 성향으로 미루어 환갑잔치야 절대 열 리 없었겠지만, 영화인생 13년 동안 41편의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워커홀릭의 저력으로 자신이 넘어야 할 산이라던 마이클 커티즈 감독(100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의 기록도 앞질렀을 것이다.

1945년 5월31일생인 파스빈더는 68혁명의 정신적 세례를 받은 좌파임을 자처했지만, 그의 삶과 사유는 좌파라는 틀에 갇히기에 너무 자유롭고 급진적이었다. 그는 삶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영화”라는 작업에 몰두할 수만 있다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뉴저먼 시네마의 다른 기수들처럼 아버지의 영화적 전통을 부정하지도, 새로운 독일영화를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었다.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 만큼, 내 관점으로 독일 역사를 관통할 때까지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겠다”던 말 그대로 독창적 시대의식과 주관적 성찰로 제국시대(<에피 브리스트>)에서 3월 혁명(<브레멘의 자유>), 바이마르 공화국(<알렉산더광장>), 나치(<릴리 마를렌>)를 거쳐, 동시대인 라인강의 기적(<마리아 브라운의 결혼>)과 적군파 테러(<가을의 독일>)를 다뤘고, 미래까지(<제3세대>, 월드 온 어 와이어) 점치고자 했다. 그의 영화는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개관할 수 있는 자료로 독일문화원 영화프로그램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사회·정치적 관점과는 달리 파스빈더는 삶과 사회, 그리고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반항아였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그는 자신의 천재성이 불우한 어린 시절 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위해 동료들의 에너지와 사랑,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착취했다. 매체를 가리지 않고 배우와 감독으로 일했던 그는 사흘씩 밤을 새며 일에 매달렸고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코카인을 상용했다.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이 눈물로 회상하는 일화 하나. 1969년 슐뢴도르프는 TV영화 <바알>의 주인공으로 파스빈더를 낙점했으나 캐스팅을 위해서는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의무사항이 있었다. 당시 24살이었던 파스빈더의 심장을 진찰한 의사는 그의 보험가입을 거부했다. 언제 멈출지 알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작 강박증에 대해 “특이한 정신질환이자 천재성”이라고 답했던 파스빈더의 망가진 심장은 영화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23년 전 6월10일 새벽 영원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신작 <로자 룩셈부르크> 시나리오에 머리를 박은 채 생명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주인공 역을 수락하겠다는 제인 폰다의 반가운 전화를 받은 지 사흘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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