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어드>는 장이모의 필모그래피에서 ‘뚱딴지’ 같은 영화이다. 모더니스트다운 형식미의 추구와 리얼리스트다운 현실 탐구에 땀흘렸던 장이모는 <트라이어드>에서 장르 영화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갱스터를 주재료로 삼아 뮤지컬, 누아르의 성분들을 적절히 뒤섞는다. 하지만 장이모는 장르 자체를 집요하게 파고들거나 자의식적으로 장르의 관습을 뒤틀지 않는다. 갈등의 고리를 촘촘하게 맺고 푸는,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미덕도 찾아보기 어렵다. 중반쯤이 돼서야 갈등의 단서가 던져지고 마지막에 가서야 범죄조직 내부의 음모와 다툼이 핵심갈등이었음을 겨우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트라이어드>는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면과 그렇지 않은 장면이 확연하게 갈리는 영화다. 그렇다고 갱스터 장르의 틀을 빌려 중국 근대사를 재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왜 장이모가 느닷없이 장르의 우주로 들어갔는지, <트라이어드>에 담긴 그의 숨은 뜻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트라이어드>가 한편으로 장이모의 연인이었던 공리를 위해 만든 영화라는 건 분명하다. 노래하고 춤추는 공리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거의 넋이 나가 있다. 감독은 소년 슈솅의 눈을 빌려 보배의 주위를 맴돈다. 시골뜨기인 슈솅에게 보배는 근대화된 도시, 그 자체이다. 보배를 지켜보며 슈솅은 근대화의 충격을 체험한다. 슈솅과 보배는 전통과 근대, 순수와 타락, 시골과 도시처럼 상반된 가치들을 갈라가진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대립구도는 그들이 섬으로 도피한 이후 사라져버린다.
이렇듯 <트라이어드>의 시도는 뭣하나 제자리를 못 찾고 주저앉는다. 전액 프랑스자본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은 서구관객의 시선과 엇갈려가지 않으려다 덫에 걸린 것 같다. 동양미인 공리의 육체를 스펙터클화하며 중국의 자연을 아름답게 포장했건만 <트라이어드>의 형식미는 속 빈 강정처럼 공허할 따름이다. 영화 자체는 비판을 면치 못했지만 <트라이어드>가 뉴욕과 LA비평가협회로부터 최우수촬영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장이모의 ‘득과 실’을 잘 보여준다. 결국 <트라이어드> 이후 장이모는 <책상 서랍 속의 동화>에서 지고한 리얼리즘의 세계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