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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이라의 기적, <불안>
홍성남(평론가) 2005-06-07

사람들은 칼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를 ‘드레이어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에 맞먹게 창조적이고 아름답고 사려 깊은 <불안>은 진정 ‘올리베이라의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이란 존재의 가장 중요한 가능성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한 강박 혹은 매혹을 창작의 원천과 동력으로 바꿔낼 줄 아는 노년의 예술가들은 이 명제를 아마도 가장 훌륭하게 입증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현재 100살을 얼마 두지 않고 있는 포르투갈의 시네아스트 마뇰 드 올리베이라도, 그가 만든 영화들로 미루어볼 때, 그런 이들 가운데 당당히 끼워줄 만한 인물이다. <세상의 시초로의 여행>(1997)에서 “장수란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이지만 그것이나 <집으로 돌아가리라>(2001),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2001) 같은 영화들에서 언뜻언뜻 자신을 드러내는 그는 이제 실존의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일종의 위기의식에 맞닥뜨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헛된 회고의 시선을 세상과 삶에 들이대며 이 위기의식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진중한 통찰의 힘을 잃지 않고서 그것을 자기 세계를 구축할 기본 동력으로 활용해낼 줄 알고 또 그렇게 해왔다.

이제야 뒤늦게 우리와 ‘공식적인’ 만남을 청하는 첫 번째 올리베이라 영화인 <불안>은 그런 그의 예술적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올리베이라는 (앞서 인용한 하이데거의 말을 조금 바꾸자면) 죽음이 가장 확실하고 압도적이며 무시무시한 가능성이기에 그런 가능성을 넘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영원히 살고자 하는 부질없는 갈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들, 그래서 불편한 심적 상태에 놓인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60대 아들에게 황당하게도 “죽어버려라!”라고 이야기하는 아버지와 마주한다. 이 아버지의 주장인즉 성공한 의사이자 작가인 아들은 그가 지금 가진 영광이 사라지기 전에 떳떳하게 죽어야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간의 설전이 결국에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면 영화는 이 이야기가 연극이었음을 알려주면서 그 연극을 감상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진로를 바꾼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은 수지라는 이름의 한 아름다운 매춘부를 보고서 사랑에 빠지나 결코 그녀를 소유할 수 없었던 남자의 이야기이다. 결국 남자는 그녀의 영혼을 보존함으로써 죽고 만 그녀를 영생불멸의 존재로 만들려 한다. 남자의 친구가 실의에 빠져 있는 그에게 어떤 전설을 들려주면서 이야기는 또다시 다른 갈래로 접어든다. 그것은 답답한 시골 마을에서 위반의 자유를 얻으려다가 그만 죽지 않고 홀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저주를 받는 소녀 피잘리나의 이야기이다.

올리베이라는 우리로 하여금 단막의 연극에서 마치 칼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를 연상케 하는 통절하게 우아한 사랑 ‘영화’로, 그리고 아스라하게 신비한 전설의 세계로 여행하게 하면서 <불안>이란 독특한 영화를 경험하게끔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불안>의 몸체를 구성하는 세개의 파트는 서로 배타적이라고 할 만큼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우선 장르로 보자면, 대충 부조리극, 멜로드라마, 전설적 판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는 그것들은 당연히 그 품고 있는 기본 정조(情調)에서도 확연히 구분이 되는데, 1부에는 엄정함과 경합하는 부조리한 유머가, 2부에는 냉정함 속에 깃든 미묘한 에로티시즘이, 그리고 3부에는 암영(暗影)과 벗삼은 신비로움이 각각의 세계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차례로 활용되는, 연극적 연속성이 두드러지는 틈 없는 방식, 생략을 이용해 결국에는 기억의 영화처럼 보이는 방식, 전통적 모양새의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영화를 구성하는 세개의 파트가 화술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자체의 질서를 갖고 있는 세개의 독자적인 구획을, 올리베이라는 놀랍게도 매끄럽게 연결해내고야 만다. 대부분의 액자구조의 서사물들과는 달리, 이야기하기의 층위에서 가장 바깥에 위치하는 상황이 가운데 부분에 놓여 있어, 그림으로 그리자면, 중간 부분에 봉우리가 솟아 있는 듯한 별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이 영화의 구조는(그래서 이 희한한 구조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만 그 구조의 설계도를 그려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게 한다), 세개의 이야기를 어떤 균열지점 없이 이어놓는다. 무엇보다도 이 구성에 틈이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은 언뜻 보면 별 관련없을 것 같은 각 파트가 서로 주제상으로 공명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원함은 죽음으로부터 유래한다는 1부의 이야기는 2부의 비록 연인의 육체는 죽었어도 영혼을 불멸하게 만들고자 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 2부의, 사람을 이끄는 불가사의한 힘의 이야기는 그 다음 구획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우리는 이 세 구획들에는 모두 실존적 불안에 직면한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음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그 둘 가운데 하나(즉, 60대의 아들, 수지, 피잘리나)는 상대편 인물에게 쉽사리 ‘포획’되지 않는 존재이다. 다소 부박하게 이야기하자면, <불안>은 전자의 어떻게든 불멸성을 얻은 인물들로 인해 홀로 남은 후자의 인물들이 좌절하고 마는 이야기를 그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죽음과 삶을, 소멸의 아름다움과 잔존의 슬픔을, 찰나의 환희와 깊게 쉬는 한숨을 한데 곱고 두텁게 엮어내면서 올리베이라는 스크린 위에 “삶의 미스터리”라는 것, 그것의 슬픈 아름다움을 가득 피워낸다.

<불안>은 형식에 대단히 민감한 영화이고 깊은 성찰의 눈을 가진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선입견과 달리 정서를 무시하는 무딘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예컨대, 2부에서 ‘햇빛’이란 이름의 보트를 탄 남자와 수지의 짧지만 찬란한 행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든가 3부의 피잘리나와 소년이 만났을 때 그들의 운명을 시각적으로 예감하기라도 하듯 그 위로 슬쩍 숨었다 금방 들어오는 햇빛을 보여주는 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에 순간적으로 그러나 깊이 들어온다. 이것은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과 새로움과 통찰력이 관객의 눈과 귀와, 머리, 그리고 가슴에까지 다가오는 영화다. 올리베이라가 90살에 완성한 이 놀라운 영화는 그의 황홀한 우주 속에 놓인 빛나는 보석들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칠 만한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게르트루드>를 만들어냈던 ‘드레이어의 기적’과 맞먹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만날 기회가 왔다.

올리베이라의 영화세계

언어와 연극, 올리베이라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

누군가는 한숏의 지속시간이 담대하게 길어져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또 누군가는 영화란 아무 곳에서 끝나도 상관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영화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흔히 그런 이들이다. 영화 만들기가 제도화하고 관성화한 법칙들과 인식들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이들. 사실 그래서 그들의 영화는 그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영화의 상을 파악하지 못할 때 쉽게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일 경우가 많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영화들 역시 그렇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개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언어와 연극이 중요한 접근로가 아닌가 싶다.

올리베이라의 최근작 <제5제국>(2004)을 본 이들은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말의 홍수에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의 많은 영화들은 언어가 흔히 영화의 주요 요소라고 하는 비주얼만큼이나 그리고 어떤 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1908년생으로 직간접적으로 무성영화를 봐왔던 올리베이라가 영화가 유성영화로의 이행기에 발견한 것은 이미지의 보완물이 아니며 오히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독자적인 요소로서의 언어였다. “언어는 인류의 특권적인 요소이기에 영화의 소중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그는 말 자체가 영화 안에서 행위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걸 실행해왔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연극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인 <아니키 보보>(1942)는 흔히 네오 리얼리즘적인 영화로 간주되지만 더 세심하게 살펴보면 옥외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자주 연극의 상연을 재현하는 것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어려서 그는 세상을 마치 객석에 앉은 관객처럼 보았다고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배우나 무대와 관련되는 작업은, 아무리 촬영 과정이 개입되더라도, 연극의 한 형식이라고까지 본다. 연극이 먼저이고 영화는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그는 “영화는 연극을 포착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올리베이라의 이런 영화론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장 뤽 고다르,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어떻게 만나고 갈라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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