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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 라이언의 영화, <지금은 통화중>
김혜리 2000-04-04

인생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데 꼭 소득분배구조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늘 말씀하는 대로 세상에는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 “왜 하필 나야?” 비명을 지르면서도 노상 치다꺼리를 도맡는 멤버가 가정에나 직장에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머지가 고마움을 아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내 손 안가면 되는 일이 없어”하는 투덜거림에 숨겨진 은밀한 기쁨을 알아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편할 대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형제 많은 집에서 흔히 보듯, <지금은 통화중>에서 이 보람없는 봉사는 둘째 이브의 몫이다. <리어왕>으로 치면 코델리아 역인 이브는 아버지의 끝없는 투정에 파김치가 돼가면서도 아버지가 말을 걸면 언제나 대답해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벨만 울리면 아예 “네, 아빠”하며 수화기를 든다. 노환으로 기억에 구멍이 숭숭 난 아버지도 이브의 전화번호만은 잊지 않는다. 멕 라이언의 이브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샐리의 10년 뒤를 보는 듯하다. 택시기사에게 일일이 경로를 지시하고 샐러드 하나 주문하는 데 여남은 개의 긴 문장을 읊어대는 샐리가 결혼했다면, 무심한 자매와 죽어가는 괴팍한 아버지가 있었다면 꼭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이브는 위기가 닥치면 의기소침하는 대신 더욱 기운을 내 만사를 챙기고 지시를 퍼붓는다. 그리고는, 맥이 탁 풀려 주저앉는다. 씩씩하다고 해서 강하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엄마가 너를 싫어했다는 술취한 아버지의 말에 일격을 당한 이브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으로는 바쁘게 행주질하는 장면은 그녀 성격에 대한 간결한 크로키다.

<지금은 통화중>은 이처럼 가족 안에서 제일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식구들 사이의 긴장을 떠받치는 ‘둘째’의 애환과 심리에 꽤 정통하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을 통해 현대 로맨틱 코미디를 부흥시키고 멕 라이언이란 신데렐라에게 유리 구두를 선사한 요정 대모 애프론 자매는, <지금은 통화중>에서 그들의 재능과 멕 라이언을 가족 멜로드라마의 지붕 밑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유브 갓 메일>의 전자메일 대신 전화를 중요 소도구로 택한 애프론 자매는 역시 장기인 대사의 맛으로 승부를 걸고자 한다. <…통화중>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라이언의 모습도 립스틱을 바르며 수화기에 종알거리는 그녀의 입술이다. 애프론 자매 표 영화답게 의상과 미술도 수준급. 에이드리언 라인의 카메라맨 하워드 애서튼이 촬영한 회갈색과 온화한 크림색 실내공간은 간접 조명이 설계된 아늑한 방에 초대된 기분을 자아낸다.

그러나 <…통화중>은 사랑스런 진부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멕 라이언, 리사 커드로, 다이앤 키튼의 최상급 할리우드 여배우와 전설적인 코미디 노장 월터 매도, 거기에 최고의 작가가 만난 고단위 처방의 산물치고는 평범함이 과하다. 애프론 자매의 각본은 연애의 밀고당김을 묘파한 전작들에 비해 처질 수밖에 없는 탄력을 가족관계의 깊이있는 성찰로 메꾸는 데 실패한다. <마이클>도 그랬지만, 웬일인지 애프론가의 슈크림은 감상으로 미지근해지면 곧바로 식어버린다. 다이앤 키튼의 연출도 엄마의 죽음과 남겨진 아이들의 사연을 그린 그녀의 전작 <언스트렁 히어로>에 비해 진심이 부족해 보인다. 평생의 자매 갈등이 <…통화중>처럼 밀가루 뿌리기 장난으로 녹아버린다면 인생은 오죽이나 간편할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그러안는 것은 명작의 한 조건이지만, 멜로드라마와 코미디 사이에 망설이며 자리잡은 이 영화는 불행히도 그런 케이스에 들지 못한다.

세 자매 이야기의 포장을 입고 있지만 <…통화중>은 멕 라이언의 영화다. 그녀의 이브는, 충분한 설명없이 지독하게 냉정하고 이기적인 성공의 노예로 혹은 철없는 여자로 그려진 엄마와 언니, 동생 캐릭터 사이에서 유일하게 ‘부피감’ 있는 인물이다. 전화거는 연기 하나로 여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귀여운 몸짓을 이만큼 다 보여주는 배우가 달리 있을까 생각하면, 라이언의 캐스팅에 대해 불평하긴 힘들다. 그러나 딱 맞는 소매없는 셔츠 차림으로 콩콩거리는 그녀의 연기는 너무 낯익어 마치 <멕 라이언 연기 편람>에서 ‘3번 미소’와 ‘24-a번 손동작’에 ‘31번 찡그리기’를 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제와 감정의 궤적이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황급히 화기애애한 마침표를 찍는 <…통화중>은 원제처럼 제대로 된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관객에게 건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멕 라이언의 애교어린 메시지만이 텅 빈 수화기 속에 메아리친다. “잘 자, 내 꿈꿔!”

작가 델리아 & 노라 애프론 자매

영화계의 브론테 자매

델리아 에프론

노라 에프론

영문학에 브론테 자매가 있다면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는 애프론 자매가 있다. 노라와 델리아의 부모는 1934년 결혼해 희곡과 시나리오 작가로 함께 활동했던 헨리 애프론과 피비 애프론 부부. 네 자매의 한 사람인 에이미도 영화계 종사자다. <뉴욕 포스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소설가, 에세이스트로 필명을 날리던 노라 애프론은 <실크우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통해 일급 시나리오작가 대열에 들어섰다. 델리아는 노라의 감독 데뷔작인 <이것이 나의 인생>(1992) 각본을 함께 쓴 것을 비롯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마이클>(1996) 등에서 공동 작가로 활약했다. <끄적끄적>이라는 노라 애프론의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커피 테이블 수다의 맛깔스러움과 신랄함을 스크린에 생생히 옮겨 놓는 자매의 필치는 전성기 스크루볼 코미디의 계보를 계승하며 ‘에프로나이즈’(Ephronize)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으며 톰 행크스, 멕 라이언, 스티브 마틴 같은 재능있는 코미디언들에게 안성맞춤의 비히클을 제공해왔다.

신작 <지금은 통화중>은 1995년에 출간된 델리아 애프론의 첫 번째 소설을 자매가 각색하고 제작한 영화. 아버지 헨리가 와병중일 때 혼자 LA에 떨어져 있던 델리아는 당시 언니와 동생에게 쉴새없이 전화를 걸어댄 경험과 “내 삶의 절반은 너희들과 통화한 시간”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 애프론 자매에 의하면 아버지 헨리 애프론은 전화 유전자를 지닌 ‘인간 전화’로서 그 자질을 딸들에게 물려주었다고. 자매끼리 서로에게 전화를 걸며 언니, 동생을 험담하거나 불평하는 장면에는 애프론가 네 자매의 생활이 녹아 들어 있다. <지금은 통화중>은 애초 노라 애프론이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시나리오 초안을 완성한 뒤 노라가 <유브 갓 메일>의 일정에 쫓기게 되면서 출연자로 섭외됐던 다이앤 키튼이 감독 의자까지 넘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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