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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열띤 호응 속에 막내린 런던의 한국영화제

한국영화 휘날리며

프린스 찰스 극장 전경.

4년 전인 2001년, <씨네21> 통신원이 되어 처음 쓴 기사는 런던 한국영화제 기사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기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런던은 한국영화의 불모지다.” 그리고 4년이 지난 뒤인 2005년 5월, 런던에서 열린 한국영화제는 그 규모에서나 인지도 면에서 지난 4년간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지도에 어떤 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확연히 보여준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된 장편영화는 17편, 다큐멘터리영화 2편, 단편영화 3편. 영화의 편수도 편수지만 상영되는 영화들의 완성도와 다양성은 한국영화가 얼마나 많은 매력적인 다른 얼굴들을 갖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개막작 <역도산>을 시작으로, 한국의 고전영화에 속하는 <오발탄> <하녀> <마부>를 포함해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귀여워> <거미숲> <마이 제너레이션> <여자, 정혜> <시실리 2km> <가족> <내 머리 속의 지우개> <태극기 휘날리며> 등 각기 다른 취향의 관객을 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풍요로운 식단이다.

런던을 시작으로 셰필드 등 영국의 다른 도시들도 돌게 될 한국영화제는, 이제 영국에서 한국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낯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입증해주었다. 항상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시내 중심의 레스터 스퀘어에서 몇발 떨어지지 않은 극장, 프린스 찰스. 그 앞에는, 지난 5월9일부터 13일까지 저녁 상영 때면 레스터 스퀘어까지 이어지는 긴 줄이 늘어섰다. 입장료가 공짜라는 것도 매력적일 것이고, 표를 받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도 결국 표가 없어서 발길을 돌려야 하더라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생기발랄함과 소중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끼리의 열정이 느껴졌다.

첫날 개막작은 <역도산>.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이 꽉 찬 극장에서 영화상영과 송해성 감독과의 Q & A가 이어졌다. Q & A 시간에는, 요사이 민감한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민족적인 문제들에 대한 격정에 찬 반론과 날카로운 질문들이 오갔다.

다큐멘터리영화 <씻김굿>으로 시작한 둘쨋날 오후에는, 한국 영화산업과 유럽에서의 한국영화 배급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는 작은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번 컨퍼런스는 한국과 영국 양쪽에서 한국영화의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들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패널에는 <필름2.0> 기자 김영진,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 김승범, 쇼이스트 대표 김동주, CJ엔터테인먼트 상무 최평호씨 등이 참석했다. 김영진 기자는 한국영화의 최근 경향들을 짚어가며, 이른바 아트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영화 양쪽을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이 뭔가 한국영화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표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영국에서의 한국영화 배급에 관한 패널에는 영국 신문인 <인디펜던트>의 영화평론가 로저 클라크, 타탄 비디오의 폴 스미스, 소다픽처스의 이브 가베로가 참석했다. 2001년부터 한국영화에 대한 글을 써온 로저 클라크의 표현에 따르면, “계속해서 이곳 평론가들이 한국영화가 뜬다, 이제 한국영화의 시대다, 하는 예측들을 해왔지만, 실제로 영국에 한국영화가 도착한 것은 2004년”이다. 그 근거로 그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개봉하면서, 그 기사가 <히트> <셀레브러티>(영국의 연예잡지들) 등에 실렸고, 그것은 한국영화가 영국의 대중적인 문화의 중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임을 지적했다. 또, 영국에서도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이 한국영화의 어떤 독창적인 면을 보여주면서 주목을 끄는 데 크게 기여한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지난 2년간 ‘아시안 익스트림’이라는 레이블하에 한국영화를 ‘미친 듯이’ 수입·배급해온 영화배급사 타탄의 폴 스미스에 따르면, 그들의 전략- 일본의 공포·폭력영화, 홍콩 액션영화 등과 함께 한국영화들을 묶음으로써 기존의 일본·홍콩영화 팬들의 관심을 끌고, 시내의 극장 한두곳에서 1, 2주 상영 뒤 막을 내리고, 짧은 시간 안에 DVD로 출시하는 방식- 이 주효했다고 한다. 극장 개봉을 하기 때문에 영국의 크리틱들이나 리뷰어들이 어쨌든 영화를 보고 매체에 영화에 대한 글을 지속적으로 실으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도와 접촉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케팅 비용 등이 부담스러운 극장 배급보다는 DVD 시장을 파고든 것이 효과를 보았다고도 한다. 최근에 영국에서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를 극장 개봉한 소다픽처스는 이 영화를 <위험한 관계>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면서, 타탄이 개척해놓은 한국영화의 관객층- 젊은 층의 영화 마니아들- 에서 조금 고급스러운 느낌의 영화를 선호하는 메인스트림의 일반 관객에게로 넓히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둘쨋날 저녁의 <여자, 정혜>는 한 자리도 남는 좌석이 없는 만원사례를 기록했고, 셋쨋날 저녁의 <태극기 휘날리며> 상영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주최쪽에 따르면, 이 영화를 보려고 줄서서 기다렸던 사람 중 700명이 결국 표가 없어 돌아가야만 했다고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상영이 끝난 뒤 연단에 나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주최쪽 대표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던 이유가 <태극기 휘날리며> 때문이었는지, 영화제의 엄청난(!) 성공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영화가 런던에 ‘도착’했다는 데는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주최쪽에서 준비한 CJ 협찬의 공짜 불고기, 갈비 소스를 바쁘게 챙겨가는 이들 관객이 한국영화의 충실한 팬이 되어주리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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