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벌의 원인이다. 벌은 죄의 결과다. 죄지으면 벌로 다스린다는 것. 국가가 개인에게 부과한 도덕률의 제1원칙이다. <프락치>는 이러한 전제의 일방향성을 문제삼는다. 국가의 죄는 어떻게 물을 수 있나. <프락치>는 자신이 정한 도덕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가 죄없는 개인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권력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제의가 필요했고, 얼마나 많은 희생양들이 필요했느냐고, 국가를 추궁한다. 30대 후반의 기관원 권과 20대 초반의 프락치 희철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기거하는 여관방은 또 다른 감옥이다. <프락치>는 뜨거운 여름 푹푹 찌는 여관방을 실험실 삼아 카메라를 장치하고 국가라는 괴물의 흉포함을 고발한다.
<프락치>는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정체가 드러나 도피한 프락치와 그를 감시하는 기관원의 관계는 명확한 드라마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바퀴벌레를 희롱하거나 묵찌빠를 수행하며 매일을 버티던 이 금치산자들은 때론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굴레를 벗어버리기도 한다. “우리도 생산적인 일을 해보는 게 어때?” 여관방에 굴러다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프락치는 자신이 갖고 있던 카메라로 영화화하기로 하고, 기관원은 이에 동조한다. 가짜 빨갱이 조직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용했던 계보도를 소설 속의 복잡한 인물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장면에선 웃음이 터져나온다(누군가를 고발하기 위해 쓰였던 카메라가 어떻게 변용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건 가난한 학생 라스콜리니코프와 창녀 소냐를 뒤집어쓴 두 사람이 자신의 삶을 혐오하고, 상대를 이해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가능한 반응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반은 오래가지 못한다. 옆방에 투숙해 있던 10대 소녀가 이들의 희한한 놀이에 끼어들면서, 세상과 떨어져 단죄와 참회의 연극을 행하던 두 사람은 또 다른 죄를 저지르게 되고, 허구 안에서만 자신들의 참회와 속죄가 가능한 것임을 확인한다. 청년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원하면서 그동안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숨겨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구덩이에 파묻혀 낄낄대는 기관원들을 올려다보는 청년의 낮은 시선은 국가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체념의 표현이다. “신은 내게 정의를 요구할 자격이 없어”라고 중얼거리던 청년은 숨이 끊기면서야 그 말뜻을 진정으로 체감한다. 오랜 산고 끝에(<씨네21> 476호에 지난한 제작과정에 관한 감독의 말이 있다) 이제야 개봉하는 독립장편 <프락치>는 올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