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네 신철 대표가 돌아왔다. 그의 뛰어난 기획력과 마케팅 능력이 빛났던 <엽기적인 그녀>가 관객 500만명을 구가하던 2001년, 방랑자처럼 미국으로 떠난 이후 거의 4년 만에 한국에서 장기체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미국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CG 기술을 통해 이소룡을 실사로 ‘부활’시키는 <드래곤 워리어>. 당시 2003년이면 끝날 것이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났건만, 그의 귀환은 계속 늦어져갔다. 초반에는 할리우드에 혈혈단신으로 날아간 이 자그마한 동양인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느라, 지금은 이소룡의 유가족과의 협의 때문에 LA에서 마치 볼모처럼 스스로에게 붙들려 있었던 것이다. 한때 “국제미아가 된 심정”이기도 했다는 그는 이제 <드래곤 워리어>에 대한 조바심을 달래고 할리우드와 한국에서 제작을 병행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과 중국시장에 대한 공략도 시작할 것이다. 4년 동안 공력을 모았던 신씨네의 파괴력이 자못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결혼이야기> <구미호> <은행나무 침대> <편지> <약속>을 기획·제작한 이 ‘기획의 귀재’로부터 <드래곤 워리어>의 진척 정도와 할리우드에서 본 한국 영화계의 모습, 아시아 시장의 전망 등에 관해 들어봤다.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7∼8kg 정도 빠졌다. 미칠 것 같으니까. (웃음) 술도 안 마시니 그런 것 같다.
-우선 <드래곤 워리어>가 궁금하다.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완성됐나.
=원래 시나리오라는 게 찍기 전까지 수정하는 것 아닌가. 지금도 미국쪽 팀과 협의하면서 수정하고 있다. 시나리오의 전 부분을 이소룡의 유가족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어서 현재 조정하고 있다. 딸과 사위가 주로 대화상대로 나서고 있는데 아버지에 대한 꿈이 큰 것 같더라. 올리버 스톤이 <도어즈>를 만들 때도 완전히 내놓은 자식이어서 짐 모리슨의 집안을 설득하는 건 쉬웠는데, 부인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이소룡의 일대기도 아닌데 유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
=초상권 문제가 복잡하다. 미국 어떤 주에서는 그냥 해도 되고 어떤 주에서는 유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작품이니까 이런 문제를 공식적이고 완벽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쟁점이 뭔가.
=크리에이티브의 비전에 대한 거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니 그 명성을 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어떤 예술적인 욕구가 있더라.
-그들은 예술영화를 만들자고 하는 거냐.
=내가 ‘예술영화를 하자는 거냐’고 묻기까지 했다. 될 수 있으면 특A급영화가 됐으면 하는 게 그들의 희망이더라. 물론 가족과의 문제를 푼다고 해도 스튜디오니 캐스팅이니 문제가 첩첩산중이지만. 유가족과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째다. 답답한 게 우리 입장을 정리해서 보내면 4∼5주 정도 있다가 의견이 돌아오고, 또다시 우리쪽 생각을 정리하려면 몇주 걸리고 하니, 의견이 한번 왔다갔다하는 데 2개월씩 든다.
-오히려 CG로 만든 이소룡을 실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적 구현이 어려운 게 아닌가.
=기술적 구현에 관해서는 오히려 걱정하지 않는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도 다음 영화 <배틀 엔젤>에서 여주인공을 디지털 액터, 그러니까 CG로 만든 인물을 쓰겠다고 공언했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이 만들어졌는데, 그 단계까지 갔으니까 인간을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기다. 유가족들에게도 했던 얘기지만, 이렇게 디지털 캐릭터 영화가 쏟아질 텐데 더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불리하다는 생각이다. 디지털 캐릭터로 부활한 배우가 나온 첫 번째 영화가 돼야 집중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미국쪽 스탭들은 어떤 인물들인가.
=시각효과는 호이트 예트만이라고 <어비스> <더 록> <마이티 조 영> 등에서 시각효과 슈퍼바이저를 맡았던 사람이다. 프로듀서는 <쥬만지> <폴라 익스프레스>를 했던 윌리엄 타이틀러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프리프로덕션이나 신씨네 USA는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그동안 우리 마누라에게도 빌리고. (웃음) 지금까지 투자해준 분들도 있다. 신씨네 USA의 직원은 1명밖에 없다. 거기 유지비나 인건비가 엄청나다. 운영경비를 최소화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드래곤 워리어>는 대충 언제쯤 끝낼 것 같나.
=이 프로젝트를 처음 떠올린 게 1996년인데 당시엔 10년 안에 끝낼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그 기대는 변치 않았다. 올해 안에는 들어갔으면 좋겠다. 프리프로덕션도 빨리 들어가면 3개월이면 되고, CG기술도 발전해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에 1년 정도 걸렸으니까 올해 안에 시작만 한다면 2006년에 끝내는 것도 가능하다.
-스튜디오와는 접촉하고 있나.
=간접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미리 접촉해서 도움을 받는 길도 있지만, 이 경우엔 스튜디오가 ‘우리가 할 테니까 저 아시아 애는 빼자’, 이런 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작비는 어느 정도를 예상하나.
=일단 8천만달러에서 1억달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캐스팅이나 영화 규모를 잡는 데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 CG 비용은 2천만달러 정도로 생각한다. CG 가격도 점점 내려가는 추세니까 더 내려갈 수도 있을 거다.
-왜 하필 이소룡이었나.
=예전부터 4500만명이란 작은 시장을 갖고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제작비라는 게 뻔하지 않냐는 고민을 했다. <은행나무 침대>를 만들 때도 한국시장에서는 무리라는 제작비를 썼는데 그것으로도 원하는 퀄리티가 안 나오더라. 결국 세계시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려면 세계인들에게 먹히는 프로젝트가 돼야 하는데 이소룡이 떠올랐다. 이소룡은 현재까지도 미국시장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아시아 배우 아닌가.
-미국에 혼자 있으면 외롭진 않나.
=말이라고 하나. 그래도 가족이 같이 있으면 가족을 돌봐야 하니 일을 못한다. 어쩔 수가 없다. 말 안 통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밥을 먹는데 매일 체했다. 대화가 안 되니까. 통역을 쓰려고 해도, 시나리오를 놓고 말하는데 정서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통역으론 안 되더라. 처음에는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것 같더라. 나중엔 배짱이 생기긴 하더라. 그런 훈련을 한 게 여러 가지로 크게 도움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지금 나는 유학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유학을 하고 있다. 아니면 지옥훈련이거나. 영어 공부도 많이 했다. 좀 늘었지만, 미국 애들이 그런다. 당신 영어는 쇼핑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프로듀서를 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오랜만에 한국에서 장기체류 중인데.
=미국쪽 일이 시간을 너무 끌고 있으니까 여기에 밀려 있는 프로젝트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동안 돈을 한푼도 안 벌었으니까. 그리고 한류열풍으로 아시아에서는 막 난리가 나 있고.
-본격적으로 한국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이야기인가.
=몇 가지 죽 준비하던 게 있었는데 그동안 실행을 못해 마무리할 참이다. 박건섭 이사도 미국에 같이 있다가 들어왔다. 빨리 한국 것을 정리해서 준비하자는 거다. 그리고 그쪽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도 몇개 있으니까 섞어서 할 방침이다.
-어떤 프로젝트들이 있나.
=대개 몇년째 준비하고 있는데 마무리가 안 된 것들이다.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있고, <해피 다이>라는 SF도 있다. 아주 독특한 영화인데 뒷부분을 손보고 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는 <로보트 태권 브이>가 있고, 한국 뮤지컬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온 김수진 PD의 영화사 비단길의 <음란서생>에도 도움을 줄 거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관련 프로젝트도 있다.
-<로보트 태권 브이>도 오래 준비한다.
=이 만화가 70년대 만들어진 것이어서 판권문제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의류사업권은 딴 데 있고 뭐 그런 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다, 저기서 한다 말도 많았고, 어떤 영화가 그 제목을 쓴다고 하기도 했다. 이제 거의 정리가 끝나가고 있다. 시나리오는 아직 최종정리되진 않았지만 어떤 내용으로 갈지는 정해졌다. 2D가 될지 3D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우리가 3D로 갈 수 있는 공력이 되냐는 말도 있다. 하려면 최소한 <인크레더블> 정도는 돼야 높아진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 텐데. 김청기 감독님은 총감독으로 역할을 해줄 거다.
-일본, 중국 프로젝트라면.
=몇 가지 있다. 미국에서 하다보니까 백인사회에서 그 사람들의 정서를 꿰뚫는 영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어차피 나야 한국인이고 아시아 사람이니까, 거기서 어렸을 때부터 산 것도 아니고 말이다. 미국 시나리오 작가와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이런 것 아니냐고 물으면 그런다. 아니, 미국에서는 안 그런다고. 그 다음에는 할말이 없는 것 아니냐. 이게 엄청난 벽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시아 시장으로 돌아와야 하는 게 내 운명 같다. <드래곤 워리어>의 투자자 중에는 일본쪽도 있고 해서 파악을 해봤는데, 일본시장은 애니메이션을 빼면 한국 영화시장의 10년 전 정도, 중국시장은 15년 전 정도가 되는 분위기다. 이렇다면 양쪽 시장 다 국내시장으로 보고 예전에 우리가 지방장사를 할 때처럼 접근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한국영화가 아시아 시장에서는 리더니까.
-구체적인 것은 어떤 게 있는지.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다. 현재 일본쪽이나 중국쪽이나 프로덕션을 추리고 있는 작품도 있긴 하다. 그래도 일본과 중국과 작업하는 것은 좋더라. 백인들과 달리 차별도 없지, 말도 그럭저럭 통하는 편이지. 그래서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공부해야 한다. (웃음) 어차피 우리 영화가 잘되더라도 서양에서는 예술영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아시아권에서는 안 그렇지 않나. 미국이 세계시장을 갖고 해온 것을 배워 아시아 시장에 접목하는 게 순서라고 본다. 백인들 상대하다보니 아시아 사람들은 다 동생 같고 형 같다. 훨씬 쉽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유학의 성과라면 성과 아닐까. (웃음)
-미국에 있는 동안 한류열풍이 일어났다.
=한류스타들에게도 문제가 많은 것 같다.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영화의 해외시장 중 70∼80%가 일본시장인데, 한류스타들이 과연 일본시장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니까 일본시장을 정확히 겨냥해서 성공한 거냐, 뒷걸음질치다 성공한 거냐 이 말이다. 결과가 같을지 몰라도 큰 차이를 빚을 것이다. 때문에 한류스타에 의존하는 기획으로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시작하면 1년이나 1년 반 뒤 개봉할 텐데 그때도 그런 인기가 유지될지 모르니까 문제가 아닌가.
-한류가 아니더라도 한국을 비웠던 3년 동안은 영화산업의 격변기였다. 돌아와보니 느낌이 많이 다를 듯하다.
=영화계 전체 구조가 변화되는 과도기에 있는 듯하다. 자본파워와 스타파워가 두드러지고, 이합집산이 벌어지며, DMB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있다. 마치 예전에 비디오 시장이 형성될 때 대기업들이 뛰어들던 당시와 상당히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 같다. 다 정리가 되겠지만, 결국 제작사의 노선은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다. 한국영화가 뭐 세계 배급라인을 구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후배들 같은 경우에야 큰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은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이다. 영화를 열심히 만드는 것, 그게 제일 나은 거 아닌가.
-그렇다면 신씨네는 계속 제작만을 고수한다는 이야기인가.
=사실, 요즘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긴 한다. 배급구조라든가 스타파워라든가 자본의 구조라든가 전체 시장의 밸런스가 무너졌는데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합종연횡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고, 해외시장과의 관계가 큰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프로젝트를 펼치면 할리우드쪽은 어떡하나.
=그동안은 2∼3달 만에 한번씩 왔다갔다했다. 그나마 한국에는 오래 못 있었다. 이번에는 한국영화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하니 자주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다. 피곤하더라도 10일에서 보름마다 한번씩 왔다갔다할 거다.
-그래도 할리우드의 경험이 이후에 도움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실제로 부산물도 많이 있는데, 그것을 좋은 과실로 삼아서 딴 것을 해나가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스튜디오에서도 이런저런 제안이 있다. 미국에서 돌아다니는 한국 놈이 저놈밖에 없는 것도 같으니까 그런 건지. 또 이렇게 만들어진 커넥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도 생각하고 있다.
-말을 나누다보니 마음을 비운 듯한 인상이 강하다. 도인이 다 된 것 같다.
=한 프로젝트를 몇년씩 끌다보니 될 때가 되면 되겠지 하고 있다. 사실 못하면 쪽팔리잖나. (웃음) 칼을 뽑았으면 해야 하는데, 칼을 휘두른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에서 선택권이 내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러니 순리대로 풀리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다. 이소룡이 ‘너 정도, 이 정도 노력 갖고는 안 돼’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소룡은 가끔 꿈에도 나온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