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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6] - 아시아영화 베스트 ①

<7인의 사무라이> <흩어진 구름> <잔국물어>

스크린을 메운 진짜 피와 뼈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2005년의 사람들은 영화를 게임처럼 만든다. 1954년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를 전쟁하듯 만들었다. 구로사와는 스탭과 배우들을 이끌고 이즈의 산속에 지은 오픈 세트장에서 1년 이상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치른 끝에 <7인의 사무라이>를 완성해냈다. 제작과정에서 수많은 사고들이 잇따라 일어나는 가운데 심지어 마지막 빗속 전투장면을 촬영하다 스탭 한명이 사고로 죽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게임을 그만두고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화면 안의 인물들은 아바타가 아니다. 비가 쏟아지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비를 맞아야 한다. 말이 쓰러질 때 그 위에 탄 인물은 정말 쓰러져야 한다. 아무리 연기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육체의 사실주의, 피와 뼈의 리얼리즘, 상처와 먼지의 리얼리티가 있다. 화면에는 늘 눈속임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화살이 날아갈 때 정말 누군가가 다칠까 조마조마해 한다. <7인의 사무라이>는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정말 그러할 때 얻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잡한 게임 스펙터클 영화들이 넘쳐나는 이 순간, 리얼리즘영화의 시대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그런 다음 영화가 지니는 그때 거기 현장에서의 리얼리티를 체험하게 만드는 위대한 타임머신이다.

이건 분명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와는 다른 경험이다. 이 영화의 전투 규모와 화면에서 보이는 전투원들의 숫자는 <7인의 사무라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버추얼 리얼리티의 스펙터클은 눈을 즐겁게 하기는커녕 피곤하게 만든다. 수많은 전투원 하나하나를 각양각색으로 처리하고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은 놀랍지만 화면은 반지르르하면서 깊이가 전혀 없다(<반지의 제왕> 3부작을 보고 나서는 더이상 CG로 떡칠한 영화를 보기가 싫어졌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영화란 결국 무엇일까? 앙드레 바쟁은 ‘미라 콤플렉스’를 이야기한다. 영화를 포함한 조형예술의 기원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로서 시간에 방부처리를 하여 시간을 그 부패로부터 지키려는 욕망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7인의 사무라이>의 인물들은 칼과 죽창을 들고 싸우고 쓰러지고 땅바닥에 나뒹군다. 키쿠치요 역의 도시로 미후네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뛰어다니다 총을 맞고 진흙탕에 쓰러진다. 그는 분명 세상을 떠났지만, 카메라 렌즈에 의해 방부처리 된 그는 그때 그 장소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그들이 비를 맞으며 진흙탕 속에서 헐떡거릴 때 다만 연기를 하는 차원을 넘어선 노고와 고통, 삶의 흔적들이 전해진다. 말이 쓰러질 때조차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안쓰러움을 갖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승리 또는 패배와 관계없이 전쟁 자체가 고통이라는 메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에서는 수십, 수만의 생명체가 스러져가도 그저 그렇다. 그들은 대부분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아니라 단지 화면에 그려진 것들이기에 감정의 교류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은 스펙터클 블록버스터의 유희이며 게임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건 버추얼 리얼리티의 감정이 현실로 넘어올 때이다. 우리가 걸프전 이후의 전쟁을 대하는 태도는 바로 할리우드 스펙터클 영화를 구경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사무라이 네명의 희생 속에서 결국 도적떼는 전멸되고 농민들의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던 늙은 사무라이 캄베이는 살아남은 심복에게 “우리는 또 살아남았지만 패배했다. 농민들이 이긴 것이다”라고 말한다. 농민들은 모내기를 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지만,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에게는 죽은 사무라이들의 무덤만 보인다. 이제 그들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으며 사무라이 정신은 사라져갈 것이다. 구로사와는 그들을 통해 사라져가는 세상을 보려고 하면서 탄식한다. 그럼에도 이제 막 사무라이에 입문한 젊은이를 죽이지 않고 캄베이 곁에 놓아둠으로써,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서 싸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캄베이의 입을 빌린 구로사와의 말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영화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모던한 멜로의 은밀한 매력

나루세 미키오의 <흩어진 구름>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한순간, 만일 1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 주어진다면 영화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좀더 이야기를 좁히기 위하여 고전기 일본영화의 거장에게로 다가가보자. 오즈 야스지로의 ‘가옥’ 안에서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조구치 겐지의 ‘정원’에서는 그 사건이 운명처럼 드리워진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세상’에서는 그 사건이 결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나루세 미키오의 ‘주변’은 그 사건의 이전과 이후를 응시한다. 같은 일본의 하늘 아래 그들의 소우주는 크기를 다르게 설정하면서 깊이도 다르게 파악한다. 그래서 발견의 순서로 회자되는 절대 거장 3인방이라거나 나루세 미키오를 칭하는 네 번째 거장 같은 타이틀은 영화의 위대성을 가름하는 서열이 될 수 없다. 보면 볼수록 비교하고 싶은 충동에 빠져들게 하고 그 직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독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루세 미키오가 평생 동안 포기하지 않았던 멜로드라마의 자장 안에서, 남과 여 단 두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두절미한 상태에서 ‘사건의 삭제’는 매우 특별해진다. 대부분의 나루세 영화에서 캐릭터들이 수많은 곤경을 겪지만 문제점이 축적되는 과정이 없다는 것은, 서구의 멜로드라마들과는 정반대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가장 강력한 사건만 남고 그 속에서 불운한 캐릭터들이 맹목적이고 잔인한 운명의 희생자들로서 연속되는 부침과 타격에 압도당하는 것이 서구의 멜로드라마라면, 나루세 미키오는 오히려 숙명을 거부하며 사람들과 사회에 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루세식 멜로드라마는 매우 차갑거나 혹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멜로드라마가 될 수 없는 경계선에 놓여 있으며, 그 미묘한 경계로 얻어지는 모더니티의 윤곽이 은밀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도호영화사의 35주년 기념작이자 나루세 미키오의 마지막 영화인 <흩어진 구름>은 그의 스타일을 집약한 대표작은 아니다. 게다가 가장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해외 공관 부임을 앞둔 남편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게 되자 임신 상태였던 미망인은 현실의 무게와 남편을 죽게 한 젊은 남자와의 애증을 이중고로 치르게 된다.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미망인 유미코와 가해자인 미시마는 치명적인 사건으로 만났다. 그러나 나루세는 이 사건을 유미코의 형부가 받는 전화 한통으로 생략한다. 그 대신 장례식에서의 조우, 남편이 남긴 연금, 미시마가 지불하는 도의적 보상금의 내역들은 어찌나 시시콜콜한지 저절로 그들의 피로감과 죄책감을 주판알처럼 튕겨댄다.

멜로 안에서 그 대면을 피해가는 방식은 나루세의 엄격한 공간 설정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된다. 소박한 연립주택의 현관 앞에서 출발한 영화는 신혼의 단꿈을 빼앗긴 미망인을 단 한번도 일반적인 가정의 다다미방에 놓아두지 않는다. 유미코가 생전의 남편과 만나는 한번의 장면도 커피숍에서 보여지며, 그 이후에 그녀가 다소곳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전통여관일 뿐이다. 대부분은 그녀가 생계를 위해 고향의 올케가 경영하는 여관에서 일하는 장면이며, 새로운 러브스토리가 시작되고 마감되는 곳도 섹슈얼리티가 차단된 다른 여관방이다(특히 나루세의 대표작 <부운>을 본 사람들이라면 유미코와 미시마가 들어가게 되는 두 여관의 장면이 거의 같은 숏으로 반복되는 것을 주목할 것.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분석처럼 나루세 영화에서 병석에 눕거나 간호하는 남녀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층위로 묶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좀더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다다미방에서 인물의 행위를 포착하는 유연한 나루세 스타일을 목격할 수 있다. 늘 수평적인 시선을 맞추며 앉아 있는 오즈의 가족들과는 달리 나루세의 연인들은 앉거나 서는 순간 정교하게 커팅된 카메라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일본식 좌식생활의 리듬을 시선의 영화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유의 스타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워 놓치기 쉽다는 점이 나루세 미키오의 장점이자 단점이긴 하지만, 그 세계로 진입한 순간 아시아영화의 숨결은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다.

미조구치적 우주의 원형

미조구치 겐지의 <잔국물어>

1930년대 후반 일본군국주의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던 가운데, 미조구치 겐지는 당대의 민감한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해 이른바 ‘예도물’(藝道物)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잔국물어>는 그 가운데 발표 시기에서나 예술적 성취에서나 첫머리에 놓이는 작품이다. 도쿄 가부키 명문가의 양자이지만 예술적 재능의 부족으로 고심하던 기쿠는 어느 날 집안의 하녀 오토쿠의 솔직한 충고를 듣게 된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그는 급기야 그녀와 함께 오사카로 도피하기에 이른다. 이후 기쿠는 유랑가부키극단의 배우로까지 전락하지만 오토쿠의 헌신적인 희생에 힘입어 마침내 예술가로 대성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오토쿠는 그만 병상에서 죽고 만다. 거의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집요한 롱테이크, 인물들의 행위를 멀찍이서 응시하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롱숏, 가혹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힘, 가부장적 사회제도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인의 삶과 예술적 완성을 위해 고민하는 예인(藝人)의 삶의 교차, 이러한 것들은 흔히 ‘미조구치적인 것’이라 일컬어지는 한 특별하고 견고한 소우주의 질서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로 간주되며, 그런 만큼 <잔국물어>라는 걸출한 작품을 설명하는 데 빠짐없이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잔국물어>가 미조구치의 작품들 가운데서 특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앞서 언급한 ‘미조구치적 우주’, 무엇보다 <서학일대녀>나 <산쇼다유> 등의 시대극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뚜렷이 각인된 그 매혹적이고 잔인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제시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잔국물어>는 미조구치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일종의 ‘메타-영화’에 속하는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조구치가 이후에 내놓은 작품들은 여러 형태로 조건을 바꾸어가며 여기서 발견한 법칙을 적용해본 사례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조구치는 적어도 영화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혹은 그 시대의 여성들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불편함은 작품에 내적긴장을 부여하면서 성공적인 결과(<오사카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를 가져오기도 했고 때로는 미조구치 자신을 불확실하고 모호한 실험(<적선지대>)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특히 당대 여성들의 욕망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그가 그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었다고 말하기는 사실 좀 힘들다(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조구치의 영화들이 가지는 수많은 한계들을 떠올려보라).

대신 그는 시선을 과거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우주에 부합하는 여성적 위치를 좀더 뚜렷이 드러내고 시대물이라는 안전한 외양을 빌려 스스로의 불편함을 감출 수 있었다. 이때 여성은 남성의 죄의식의 잔여이거나, (흔히들 떠올리듯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이 외화(外化)된 비인간적인 대상의 역할을 떠맡는다. 여기서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그녀들이 잔인하거나 냉정하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적인 희로애락과 동떨어져 있는 듯 초월적으로 혹은 사물적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미조구치적 우주’ 자체의 비인간성이다. 이곳은 모든 인간사에 무심한 세계이며, 영원히 침묵하고 있는 무한한 공간(파스칼)이고, “우리의 죄의식을 저장하는 금고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중단한”(옥타비오 파스) 냉담한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미조구치의 비인간적인 여성들이 그 비인간적인 우주 안에 놓여질 때 지극히 인간적인 파토스가 생성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미조구치의 영화들이 간직하고 있는 강렬한 잔혹성의 비밀이 숨어 있다. 때로 그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부드러운 잔혹성을 능가한다. 그것은 단지 여성의 희생이라고 하는 멜로드라마적 장치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잔국물어>는 이와 같은 잔혹성의 체험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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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연호/ 전 <키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