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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3] - 한국영화 베스트 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넘버 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국영화의 희귀한 한순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년 데뷔 이래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에 관한 논의는 넘쳐흐를 만큼 많지만, 그의 영화를 말하는 건 여전히 난감한 일이다. 언어로 그의 영화를 붙잡으려는 순간 그의 영화는 그곳에 없다. 본질적으로는 모든 영화가 그렇긴 하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의미의 생성을 방해함으로써 문자 언어의 구애를 애초에 외면한다. 그의 영화를 말할 때, 자크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의 개념을 동원하려는 빈번한 시도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심지어 “이 시나리오는 라캉과 들뢰즈를 독해하고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같은 놀라운 추론까지 나온다. 물론 그런 논의도 끝에 가면 대개 후기구조주의의 언어만 남고, 영화는 사라진다.

1996년 5월의 어느 날, 지금은 사라진 코아아트홀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만났다. 감독은 생소했고 그런 영화의 시사회가 있다는 사실도 전날 알았으므로, 의무감으로 가긴 했지만 전날 설친 잠이나 보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졸음은커녕 오한이 밀려왔다. 그날 밤, 그 영화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기 위해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들겼다. 두들기면서도 난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화란 말인가. 남자 여자 몇명이 두서없이 서성이다 난데없이 치정살인으로 끝맺는 영화에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 걸까. 원고는 끝없이 지연되고, 또 밤을 새고 말았다.

그때까지 나는, 지혜로운 평자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관성적으로 믿어왔던 것 같다. 깊이와 통찰, 진성성과 비판의식 같은 것이 우리가 좋은 영화라고 말할 때 연상하는 단어들이었다(이들은 지금도 애용된다). 난감하게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럴 때 기댈 수 있는 그 반대편의 장르적 쾌락이란 것도 물론 없었다. 물론 ‘현대인의 공허한 내면과 허위의식’ 같은 단어를 주워섬길 순 있겠지만, 이건 웬만한 TV드라마에도 들이댈 수 있는, 하나마나 한 소리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아무것도 (따로) 의미하지 않는다. 혹은 그것 자체다. 이 영화의 이야기, 이미지, 동작, 대사, 미장센은 무엇을 은유하거나 상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효섭의 술 취한 동창생이 갑자기 바리케이드를 뛰어넘는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유형의 질문이다) 우리는 그 대답을 결코 들을 수 없다. 이 영화는 수잔 손택의 표현을 빌리면 “순수한 직접성”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당한 질문은 이것이다. 저 무의미한 영화에 내가 왜 매혹되는가. 이건 매우 까다로운 질문이긴 하지만, 거칠게 대답하면 이렇다. 그것이 철저히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고, 대답은 질문의 꼬리를 물면서 순환하고 있다. 1996년 5월 노트북 앞에서 내가 그러고 있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있지도 않은 ‘심층의 의미’를 굴착하느라 텍스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그곳을 빠져나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란 영화의 전체 형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누구도 성취못한 불온함의 미학

<넘버.3>

한국 영화사에 벼락처럼 나타난 영화가 <넘버.3>다. 의뭉스런 수식이 아니다.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전범이 될 만한 사례를 찾을 수 없고, 무언가를 굳이 끌어다 비교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비유하여 <넘버.3>는 걸레를 물고 칼을 쥔 채 태어난 과격한 사생아 같았지만, 역으로 그것만큼 더 성스러운 탄생도 본 적이 없다.

만약 <넘버.3>가 두 시간 내내 육두문자만 늘어놓으며 모종의 시위를 이끌었다면, 그건 불평을 큰소리로 공식화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넘버.3>는 자족적인 직설화법이 빠질 수 있는 강도의 함정에서 적절히 벗어나면서 영화의 장치와 양식적 기품을 도입하는 데 성공한 예가 된다. 대표적으로 캐릭터영화의 전범으로서 <넘버.3>가 이후의 영화들에 끼친 영향은 반드시 재고찰돼야만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화한 배우들에게도 전환의 계기였음이 분명하다. 한석규는 처음으로 그에게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캐릭터로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이 영화 전까지 최민식은 그가 지닌 괴력의 에너지를 충분히 발휘할 만한 역을 영화에서 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처럼 송강호가 함께 등장했다. 근본적인 순수성의 이미지로 일관하던 한석규는 생양아치의 표정을 득도하듯 씹어댔고, 깡패인지 검사인지 알 길 없는 최민식은 시대의 적들을 향해 머리통으로 수화기를 부숴버리려는 분노를 보여줬다. 말할 것도 없이 송강호는 <넘버.3> 이후 걸어다니는 하나의 단독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이 세 배우를 빼고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자리매김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넘버.3>의 자리도 재평가받아야 한다. <넘버.3>는 영화가 양산한 유행어보다 캐릭터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누구보다 능숙한 시나리오 작가로 이미 경력을 쌓았던 송능한은 이 캐릭터들에게 촌철살인의 대사를 부여한다. 그 대사들은 단지 찌르기 위한 목적이기보다 끊임없이 영화 속 조폭사회의 구조와 우리가 서 있는 사회의 큰 구조들이 서로 맞닿을 수 있도록 하는 연상의 작용을 맡는다. 그러므로 다시 그들은 역전된 모델이다. 인물들이 어디선가 주워들은 덕담과 교훈의 에피소드는 싸구려 클리셰로 바뀌거나 오인되어 그들 사이에서 대사로 이리저리 흘러다닌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면 먹고 뛰어서 금메달을 딴 육상선수 현정화다. 여기서 핵심은 누가 말하느냐는 것이다. 두목이 현정화라면 현정화인 거다. 여기는 현실사회의 축소판이지만, 역전된 모델들의 집이고, 인식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호명을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것은 그에 대한 부가적인 장치다. 랭보는 람보로 불리고, 조필이는 좆삐리처럼 들리고, 서태주는 (잠결에) 서태지라고 우긴다. 누가 넘버.1이고 누가 넘버.3인지 알 수 없고, 1류와 3류의 차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고, 수면 위의 백조와 수면 아래 백조의 몸뚱이 중 어느 것이 더 진짜인지 헷갈리는 20세기의 마지막을 영화는 ‘카오스’라고 제목 붙여놓는다.

<넘버.3>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끝났다면 보통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송능한은 모든 걸 한번 끝내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한다. 과잉의 양식들을 통해 전하고 싶은 전언이 있고, 그것이 목표한 어떤 자들의 귀에 날아가 박히기를 원한다. 포장마차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욕을 던지는 서태주(한석규)의 시선에 응해야 하는 것은, 그 순간에 호명된 실제 그자들이다. 사회가 바뀌고, 좋은 미래가 왔으면 좋겠다는 보통의 믿음이 없다면 <넘버.3>는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이 영화의 형식은 그 보통의 희망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이해할 때만 다시 의미가 있다.

모사를 업으로 삼던 코미디언과 그들이 주도하여 이뤄지는 코미디 프로, 혹은 일반의 어느 모임 자리에서도 영화 속 조필이(송강호)를 흉내내는 것이 한때 유행이었다. 풍자적인 하위의 용어가 영화 한편을 벗어나 생활 문화의 체계 안으로 은연중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어쩌면 즐거운 목격이다. 그건 마치 <넘버.3>의 태생적 자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넘버.3>는 대한민국의 정서로만 이해 가능한 영화다. 대한민국이라는 불온한 텃밭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영화다. 그러나 그 부당한 사회 속에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불운이지만, 쌍욕도 미학이 될 수 있는 <넘버.3>의 독특한 자리는 오직 그 불온함 속에서만 다시 가능한 일이었다. <넘버.3>는 바로 그 역설 속에서 어떤 영화도 성취하지 못한 봉우리에 등극해 있다.

이명세표 스타일의 경이로운 성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대한 비판은 메시지의 허약성 정도였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감독들이 같은 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놓았던 장선우의 <거짓말>이나 박광수의 <이재수의 난>에 비하면 틀린 말 같진 않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2천년대로 넘어가는 마지막 해에 나왔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90년대는 총체성보다 개별성을, 정신보다 육체를, 이성보다 감성을 재발견하는 시대였다. 그 90년대 마지막 해에 이명세는 스스로 되돌아가곤 했던 예쁜 멜로가 아닌 몸이 한껏 부대끼는 형사물에서 스타일의 최적화를 이뤄냈다. 단 한컷도 게을리 처리하지 않은 집요함으로 현실의 미세한 홈과 때를 재구성해냈고 그 인공적인 스타일이 인물과 상황의 사실성을 더욱 긴장감 있게 만들어내는 역설적 성과를 낳았다. 이명세표 스타일이 다른 장르를 만나 이런 효과를 낼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40계단 살인신은 이 영화의 출발점이자 동력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지닌 공공성은 <살인의 추억>이나 <공공의 적>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미약하다. 불특정 약자에 대한 연쇄살인을 즐기거나 혈육을 난자해 이권을 챙기려는 비도덕성의 극치가 아니라 다만 조직간의 이권다툼에서 비롯한 대담한 살해극일 뿐이다. 40계단 살인사건은 형사라는 직업군과 칼잡이를 중심으로 한 조직범죄군의 대결이라는, 꾼들의 승부를 위한 유인책이지 관객의 공분을 요구하는 고리가 아니다. 칼잡이 장성민(안성기)을 증오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냥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고문하는 형사들도 마찬가지다. <박하사탕>처럼 고문하는 형사에게 시대의 얼굴을 새기지 않았고, <살인의 추억>처럼 고문하던 형사의 다리를 잘라내는 단죄를 가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에 비해 용의자에게 가해지는 린치의 강도가 특별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형사들은 그냥 ‘자기 일’에 열중할 뿐이다(강간 용의자인 소년을 홀딱 벗겨 수치심의 응징을 가할 땐 관객의 동참을 요구하고, 우 형사가 짱구를 통닭구이시키며 심문할 때는 즐기는 듯한 태도가 엿보이긴 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가치의 향방이나 크기를 따지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과제를 수행하며 그 자체에서 쾌감을 얻는 세대 풍경을 반영하고 있다.

그 하이라이트는 우 형사(박중훈)다. 그는 느끼하지 않게 유들유들하지만 뼛속 깊이 추적자의 근성을 갖고 있다. 우 형사의 외피가 갖는 질감과 내부에 도사린 근성은 영화 자체의 외피와 그 안에 담긴 쿨한 무게와 대칭돼 보일 정도다. 다른 형사물들과 달리 우 형사가 어떤 목적으로 그런 근성을 발휘하는지, 잠복과 격투와 고문에 왜 그렇게 중독돼 있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판단은 판사가, 변명은 변호사가,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라거나 “껄렁껄렁하니 깡패되기 십상이라고 경찰이나 하라고 아버지가 그랬다”는 대목에서 짐작해볼 따름이다. 형사가 아니었다면 장성민이 됐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장성민의 애인 김주연(최지우)도 그냥 연인이라는 ‘자기 일’에 열중한다. 형사의 닦달에 비명을 지르지만 진짜로 겁먹지도 않고, 애인의 범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행위를 특별히 나쁘게 보지도 않는다. 라스트신에서 당차게 걸어가는 김주연을 향해서 우 형사가 ‘신호’를 보낸다. 둘도 없는 파트너의 배에 구멍을 뚫어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 적의 애인에게 뻐꾸기 날리는 인물, 그리고 아마도 이들은 연애를 했을 것 같은데 바로 이런 것들이 이 영화가 당대의 실존법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어쨌든 이런 구도는 이명세 스타일의 총화를 빛내는 보론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약효가 센, 이 유례없는 추적극을 즐기면 된다. 6개의 잠복신, 4개의 추적신, 10개의 체포신(격투신), 6개의 취조신(고문신)이 겹치지 않고 각자 개성 넘치는 스타일로 숨막히게 이어간다. 그 밀도와 현란함은 확실히 경이에 가까운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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