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또 무슨 장난을 쳐놨을까.”

그가 신작을 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미국의 빌 플림턴(Bill Plympton) 감독 말이다. 한국 나이로 치면 올해가 환갑인데, ‘독립애니메이션계의 악동’, ‘폭력과 섹스의 엽기적 결합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기발한 영상을 내놓으니, 그의 머릿속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4월18일부터 5월12일까지 중앙시네마에서 열리는 ‘애니광 구출! 상영작전’의 제목이 ‘빌 플림턴 단편전’이다. (주)라바메이저(rabamajor.com)와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kiafa.org)가 올해 1월부터 시작한 독립단편애니메이션 정기상영회의 세 번째 코너다. 이번 상영회에서는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플림턴 20년사’를 두루 모아놓았다. 관객의 선택은 두 가지다. 온몸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고 푹 빠져~보시든지 아니면 비위가 약하신 분은 일찌감치 일어나 나가시든지. 그런데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20년간 벌인 ‘족적’은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무일푼 독립작가가 어떻게 (거의 혼자서) 수많은 단편은 물론 장편애니메이션도 4편이나 만들고 세계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휘젓고 다닐 수 있는가. 부글거리는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그에게서 냉큼 따먹어야 할 과실은 무엇일까.

그의 강점은 철저한 ‘독립’작가라는 점이다. 돈이 없다보니 기획, 각본, 스토리보드, 레이아웃, 배경, 채색까지 거의 혼자 힘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빨리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그림이 여백을 강조하는 스케치처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마침 그는 손이 빠르고,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나 즐기는 ‘특이 체질’의 소유자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루 300장 정도 그리니까, 3천장이면 열흘 정도. 짧은 것은 몇달이면 가능하다. 70분짜리 장편도 혼자 1년 반이면 된다.” 실제로 지난 2월 제77회 아카데미 후보로 올랐던 최신작 ‘가드 독’(Guard Dog)의 경우 2003년 12월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자마자 애니메이션 작업을 끝내버리고 2004년 1월에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완료했다. 5분짜리 작품이 불과 두달 반 사이에 ‘뚝딱’ 탄생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한국영화아카데미 워크숍 참석차 내한한 플림턴 감독은 단편의 성공비결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5분 미만으로 짧게 만들어라. 둘째, 싸게 만들어라. 셋째, 웃기게 만들어라. 그래서 전세계 모든 영화제에 보내고 영화제에 찾아가서 배급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하라.”

짧게, 싸게 만든 작품을 들고 그는 영화제를 돌아다녔다. 디즈니와 다른, 철저하게 성인을 위한 발칙한 상상력이 가득 담긴 그의 작품은 영화제에서 단연 돋보이는 대상이었고 그는 곧 ‘요주의 인물’이 됐다. 그렇게 얻은 명성으로 광고 작업을 통해 수입을 얻어가며 다시 단편을 만들었다. 수많은 단편을 통해 다듬어진 내공은 장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장편에 포함될 에피소드를 미리 단편으로 만들어 장편 투자자를 물색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특성이 강한 독립애니메이션을 이용해 상업적 마켓까지 침범한 흔치 않은 사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2000년 히로시마페스티벌에서 그는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이명하 감독에게 ‘독립 감독으로 뜨는 비법’을 들려주었다. 엿들어보니 이랬다. “일단 한 작품만 띄워봐. 전세계를 다 돌아다닐 수 있어. 궤도에 오르면 그런 작품을 계속 만들면 되고, 그럼 매일매일을 휴가처럼 살 수 있어. 독립 감독도 알고보면 괜찮은 직업이라고.”

그의 작품이 뜬 이유는 무엇일까. 물어보나마나 그의 전매특허, 즉 과장된 폭력과 온갖 변태적 섹스와 상상을 초월한 잔혹미에 유머라는 초콜릿 무스를 잔뜩 버무려놓는 그의 수법에 기인한다. 그가 자기 작품을 보여주며 우리 귓가에 속삭이는 말들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사실은 이런 걸 해보고 싶었던 거지?”(소시민은 생각조차 못하고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는 것들. 보기 싫은 놈에게 토사물 먹이기. 그놈 내장으로 줄넘기하기 등)

“극장에서 진짜 보고 싶은 것은 이런 것 아냐?”(마음에 안 든다고 단칼에 사지를 절단내고, 사람 목을 칠면조 몸통에 붙여버리고, 섹스 중에 부인을 수녀로, 로봇으로, 토끼로 마구마구 변신시켜보고)

“이렇게 볼 수도 있잖아!”(음식물이 어떻게 변이되는지 X레이처럼 뱃속에서의 진도를 보여주고, 남녀간의 데이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혀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몰라서 그렇지, 이게 원래 이렇다니까.”(귀엽기 그지없는 애완동물이 천연덕스럽게 극악무도한 짓을 하고 권력을 추종하는 모든 세력의 엉큼한 뒷모습을 까발리고) 그래서 섹시한 매력이 넘치는 여주인공과 남성적 힘으로 가득한 주인공은 물론 점잖은 신사, 귀여운 동물도 그의 작품에서는 관객의 상상을 뒤집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기괴하고 폭력적이지만 반드시 유머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눈길 끄는 영상만 있고 재미가 없으면 관객을 온전히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간파한 덕분이다. 그는 또 “단편은 몇분간 즐길 수 있는 시각적 아이디어가, 장편은 캐릭터와 스토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장편은 제작시간도 많이 걸리고 배급에도 어려움이 많지만 나로서는 즐겁다. 그래서 장편을 만든다”는 것이다. ‘즐거우니까’ 한다는 얘기다.

지난번 내한 당시 그는 한국의 애니메이터에게 이런 부탁을 남겼다. “많은 작품을 보고 최대한 많이 그려라. 그리고 메모장을 만들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그때 적어서 참고하라. 무엇보다 항상 삶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길 바란다.” 환갑줄에 들어섰지만 항상 “뭐 새로운 거 없수” 하고 눈과 귀를 쫑긋거리는 빌 플림턴. 온갖 사회적 인식의 제약과 거대한 자본의 굴레에서 진정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독립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작품소개>

<Boomtown> 전형적인 1950년대 미국의 글래머 미인 두명이 나와 즐겁게 춤을 춘다. 이어 등장한 독수리 머리를 가진 근육맨은 걸어다니는 ‘낫과 망치’를 응징한다. 공장에서는 폭탄에서 자동차까지 안 나오는 물건이 없고 그런 공장 주위에서 사람들은 신나게 노래한다. 한 마을을 배경으로 냉전시대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모순을 경쾌한 화면으로 풍자해냈다.

<Your Face> 음산한 분위기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성 보컬리스트 모렌 맥엘허론의 노래를 녹음한 뒤 남성 가수를 캐스팅할 제작비가 없어 모렌의 노래를 느리게 재생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노래하는 대로 얼굴은 뒤틀리기 시작한다. 눈이 튀어나오고 코가 삐뚤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1988년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작.

<25 Ways to Quit Smoking> 담배를 끊기가 힘든다고? 그럼 이 작품을 보시라. 25가지나 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독은 끔찍할 정도로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입에 하나 가득 담배를 물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 나온 방법 그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플림턴 감독에게 연락해보시길.

<How to Kiss> 사실 누가 가르쳐준 적이 있었던가. 어떻게 하면 키스를 잘했다고 소문이 나는지를. 설왕설래가 난무하는 ‘프렌치 키스’를 비롯해 얼굴이 풍선만해지는 키스, 상대를 잡아먹어버리는 키스까지 ‘사랑의 고수’ 플림턴이 보여주는 키스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짜릿한 키스는 첫 키스가 아닐는지. 남자의 입술을 요리 빼고 조리 빼는 여자의 표정이 압권이다.

<32 Flash Animations>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아 컴퓨터를 멀리하고 있다는 플림턴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나보다. 그의 플래시 작품들은 직접 만든 것은 아니고 감독을 따로 두고 자신은 기획에 나선 작품들이다. 그의 그림체가 살아 있기는 하지만 특유의 어수선한 맛은 없는 편.

<Eat> 한 식당에 남자 손님 하나와 커플 손님, 가족 손님이 들어온다. 혼자 온 남자는 주문한 스파게티를 어떤 여인으로 상상한다.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식물 파편을 웨이터는 삭삭 긁어 접시에 담는다. 또 아이들은 햄버거 탱크로 포격을 하고 피자 비행기로 기관총을 난사한다. 이제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Guard Dog>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사실 기괴하고 흉측한 것이라면? 그는 어느 날 한 공원에서 이 작품의 소재를 얻었다고 한다.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개 한 마리를 본 것. 그는 ‘왜 개가 비둘기를 무서워할까’ 하고 생각했고 아이디어는 바로 작품이 됐다. 주인공 퍼그는 비둘기와 다람쥐를 향해 마냥 짖어댄다. 작고 약한 비둘기와 다람쥐가 사실은 주인을 해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작.

빌 플림턴은 누구?

1946년 4월30일 미국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비가 많이 내리는 오리건주 특성상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일과 상상하는 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스물두살 때 만화를 그리기 위해 뉴욕으로 옮겨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 입학했다. 이후 <뉴욕타임스> <보그>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롤링 스톤> 등에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서른한살 때 첫 애니메이션 <Lucas the Ear of Corn>(1977)을 만들었고 1985년 공식적인 첫 단편 <Boomtown>을 발표했다. 87년 <Your Face>가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후보에 올랐다. 이어 92년에는 최초의 장편 <The Tune>을 만들었고 98년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2000년 <뮤턴트 에일리언>에 이어 지난해 장편 <Hair High>를 발표하면서 전세계에 적지 않은 고정팬층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