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엔 세 가지 이야기가 포개져 있다. 하나는 매를 맞으며 돈을 버는 퇴물 복서, 다른 하나는 소년원에서 권투로 갱생하는 복서 이야기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둘이 만나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류승완 감독의 체취가 물씬한 것은 당연히 소년원 복서 이야기이다. <주먹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 이은 막장 인생 3부작이라 부를 만하다. 아니 이것은 <죽거나…>의 류상환(<주먹이…>에서도 류상환)의 성장담이다.
<죽거나…>와 <피도 눈물도…>에서 류승완은 이전의 한국영화에 없던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발이 부르터라 뛴 취재기록이거나 직접 살아본 체험이 아니면 건져내기 어려운 막장의 느낌, 그리고 기습적으로 내지르는 펀치 같은 별난 캐릭터들(이를테면 <죽거나…>의 깡패 태훈)은 젊은 작가 류승완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폭력교사를 두들겨패고(<죽거나…>) 폭력남성에게 복수를 가하는(<피도 눈물도…>) 쾌감까지 안겼다. 투견장으로 집약한 개싸움판의 자본주의에 대한 형상화는 박진감이 있었고 박진감을 떠받치는 진한 욕설은 류승완이 자신의 언어를 갖춘 이야기꾼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네가 담임을 때렸니? 가 아니라 네가 담임 씹창냈지? 가 그 어투이다).
<주먹이…>는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깊어진 감동을 전작보다 조금 떨어지는 선도로 보여준다. 훨씬 깊어진 감동이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이제껏 이야기꾼의 개성적인 말솜씨가 두드러졌다면, 그리고 장르적인 장치에 기대어 말했다면, 이번엔 거의 처음으로 배우로 하여금 스스로 얼굴을 들이밀고 이야기하게 한다. 류승범은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에서 설렁설렁한 면을 걷어내고 며칠 밥 굶은 맹수처럼 바싹 독이 오른 눈매를 더하여 보여준다. 변희봉, 천호진, 기주봉, 나문희 등 중견배우들은 주름살과 제때 깎지 않은 수염 그리고 핀이 나간 듯한 눈동자로 자신의 굴곡진 삶과 그 안에 숨겨둔 희망을 드러낸다. 식상할 수도 있는 중견배우들이 자신의 얼굴만으로 낯선 이야기를 건넨다. 특히 류승범과 천호진은, 류승완이 좋은 배우를 고르고 좋은 배우들 속에 숨은 보석을 찾아낼 줄 아는 뛰어난 감독이라는 증거다.
또 한 가지 미덕은 진심을 드러내려 고투한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닥 끝까지 내려간 택시기사 이혜영은 딸을 만나러 온양(감독의 고향이기도 한)에 가겠다고 말한다. 상투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가족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건 사투에 가까운 것이다. 류승완은, 가족끼리의 화해를 일시적 봉합으로 해결하려는 많은 값싼 시도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류승완은 이번엔 더 깊이 들어가 싸운다. 류승범이 감옥으로 면회 온 아버지에게 던지는 “불편해. 오지마”라는 대사는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크다. 버릇없는 아들은 싸가지 없는 대사로 자신의 사랑을 숨겨 아버지에게 보내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시선으로 그 말을 품어안는다. 평생 서로 사랑하지만 평생 서로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는 게 가족이다. 류승완 감독은 가족이 이런 거라 되뇌며 쓸쓸하고 가슴 아프게 한다.
그런데 이런 미덕은 거꾸로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권투로 치자면, 류승완은 알리처럼 15라운드를 다 뛰면서 맞수의 진을 모조리 빼낸 다음 카운터블로를 날리는 복서가 아니다. 그는 짧게 순간적으로 끊어쳐 상대방의 넋을 빼는 유형이다. 큰 장점으로 사소한 단점을 막아야 그의 권투는 빛이 날 것이다. 같은 막장 인생이라 하더라도 최민식쪽 이야기는 조금 섭섭하다. 펀치 드렁크 현상이나, 김광선의 금메달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봤음직한(<바람난 가족>에서 한국 주니어 웰터급 5위를 지냈다는 광국이 이야기. <주먹이…>의 두 선수 체급도 63kg 이하의 주니어 웰터급) 것이고, 최민식을 등쳐먹는 임원희와 오달수의 캐릭터도 솔깃하지는 않다.
최민식의 얼굴을 보며 감동받을 준비를 다 했건만, 우리는 최민식에 대해 그리 많이 알게 되지 못한다. 감독이야 최민식과 류승완의 인생이 얼마든지 교환가능하고 삼투가능한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최민식을 둘러싼 에피소드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최민식의 축이 흔들리면서 임원희와 오달수까지 흔들린다(천호진은 예외적으로 살아남는다). 왜 임원희는 그렇게 변신을 하게 되었을까 또는 최민식과 류승범이 같은 체급이기는 한 걸까 같은 사소한 궁금증이 생기고 그러면서 몰입의 강도가 떨어진다. <피도 눈물도…>에서 칠성이(백일섭)네가 어색한 얼룩으로 남아 자꾸 쓸데없는 궁금증을 자아냈던 것처럼.
류승범과 기주봉이 나눈 애틋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 선수의 모든 가족이(특히 화목하지 않은 태식의 가족이) 권투를 보러 오는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기면서 가족은 이 영화의 미덕이 아니라 강박관념이 된다. 어떻게 다시 조각날지 몰라도 가족의 일시적 봉합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까지야 아니겠지만. 눈물이 펑펑나야 할 마지막 대결에서 우리는 조금 눈물을 아끼게 된다.
두 선수 모델인 하레루야 아키라와 서철
TV 다큐에서 발견한 두 인물
2003년 말, 시오필름 대표 임승용과 류승완 감독은 2000년에 MBC에서 방영한 매를 맞고 돈을 버는 복서 하레루야 아키라(42)의 삶과 2001년 SBS에서 내보낸 서철(24)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두개의 다큐멘터리가 이 영화의 뼈대가 되었다. 서철은 이종격투기의 붐을 주도한 선수 가운데 하나로 팬들이 타이슨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영화는 그가 복역하던 천안소년교도소에서 일부분을 촬영하기도 했다. 서철의 이야기는 영화 속 상환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꽤 많다. 서철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헤비급 선수였다.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 프로로 전향했지만 상대가 많지 않아 2003년 10월부터 이종격투기 선수로 데뷔했다. 일찍 결혼해 아버지가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상환과 다르다.
하레루야 아키라는 스무살에 프로 복서로 데뷔해 은퇴 뒤 전기공사 회사의 사장이 되지만 사업 실패로 1억5천만엔의 빚을 안는다. 빚을 갚기 위해 1998년 12월부터 인간 샌드백의 길을 택했다. 도쿄 롯폰기 공중 화장실 앞, 신주쿠 가부키초의 고마극장 앞 광장 등이 그의 삶의 터전이었다. 하레루야는 인간 샌드백 노릇이 끝나면 고객에게 반드시 감상을 써달라고 하여 노트를 남겼는데 무려 20권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주먹이 운다>라는 책에서 8천명에게 맞았다고 적었다. 8년간 권투를 했다고는 하지만 은퇴한 지 8년이 넘어서 샌드백 일을 했으니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 야쿠자의 훅 세례를 받고 흉골이 골절되는 일 따위는 일상이었다. 남성에게는 1분에 1천엔, 여성에겐 500엔을 받으며 시작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위해 인간 샌드백 장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