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분의 드라마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40쪽 분량의 단편소설에서 태어났다. <여자, 정혜>의 98분은 본디 20쪽 남짓한 단편 <정혜>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단편소설을 밑그림으로 삼은 장편영화들에서 우리는 장편소설을 2시간의 필름으로 옮긴 영화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자율성과 여유를 맛보곤 한다. 놀랄 일도 아니다. 장편소설의 영화화가 문장과 에피소드의 숲을 솎아내는 불가피한 선택과 생략, 압축의 공정이라면, 단편소설의 각색은 대개 살을 붙이고 문장 사이에 입김을 불어넣어 공간을 만드는 작업인 까닭이다. 소설가 방현석은 <소설의 길, 영화의 길>에서 소설은 영화에 비해 여섯배에 가까운 서술 단위를 지니고 있기에, 영화에서 서술의 지속성과 빈도는 단편소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쓰기도 했다. 영화로 변모한 단편소설들은 성공한 각색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문학작품을 각색한 시나리오들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가?”라는 힐문에 직면해왔다. 검증된 예술품의 ‘번역물’로서, 한 문장을 하나의 숏으로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시퀀스로 얼마나 적확하게 옮겨냈는지 심판받았다. 반면 단편소설에서 비롯된 장편영화는 교차와 변형의 각색이 갖는 묘미를 보여준다. 이때 각색은 창조적 일탈이며 때로는 원작에 던지는 하나의 코멘트가 되기도 한다. 단편소설과 장편영화는- 지혜로운 각색의 중매로 만날 경우- 기분좋게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의 의지를 겨룬다. “좋은 이야기지만, 단편이라 어떻게 영화로 만들지 막막했다”고 제작자가 말하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어떤 방식으로 독창적인 멜로드라마로 거듭났을까? 정혜 곁을 서성이는 <여자, 정혜>의 카메라를 그처럼 조심스럽게 만든 원작의 시선은 어떤 표정일까? 여기 장편영화로 새로운 몸을 얻은 14편의 짧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영화들의 재해석 전략들을 살폈다. 덧붙여 그들의 단편을 통해 호러와 SF 장르영화의 종묘상 노릇을 하고 있는 작가 스티븐 킹과 필립 K. 딕도 새삼 들여다보았다.
모성애가 돋보이는 슬픈 호러
단편집 <어두컴컴한 물밑에서> 중 <부유하는 물> 스즈키 고지 지음 영화 <검은 물밑에서> 나카다 히데오 감독
나카다 히데오는 다소 차가운 느낌이 있는 스즈키 고지의 소설 <링>에 끈적하게 묻어나는 듯한 어둠을 더해 각색했다. 비디오테이프가 한(恨)을 영사한다는 아이디어가 능숙한 장인의 이미지를 만나 진정한 공포가 되었던 것이다. 감독과 작가의 두 번째 만남인 <검은 물밑에서>는 <링>보다도 각색과 연출의 힘이 한층 돋보이는 영화다. 이 영화의 원작은 스즈키 고지의 단편집 <어두컴컴한 물밑에서> 처음에 수록되어 있는 <부유하는 물>. 나카다 히데오는 짤막하고, 다른 단편에 비해 덜 무서운 편인 <부유하는 물>을, 버림받은 아이의 집착과 애틋한 모정이 차고넘치는 슬픈 호러로 만들었다.
얼마 전에 이혼한 요시미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 이쿠코를 데리고 새집을 구하러 다닌다. 그녀는 집세가 싸고 허름한 아파트를 구하지만, 천장에 얼룩진 물자국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린다. 이쿠코가 주워온 가방도 불길하다. 요시미는 몇번을 버려도 알 수 없이 되돌아오는 가방을 보며 불안해하다가 몇년 전에 위층 아이가 실종됐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어두컴컴한 물밑에서>는 키요라는 여인이 도쿄만에 떠다니는 부유물들을 보며 손녀에게 그 사연을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검은 바다. 그 바다는 목가적인 로맨스 대신 매립지에 갔다가 형상을 얻은 죄의식과 마주치는 남자나 바다 밑바닥에서 징벌당하는 사기꾼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부유하는 물>은 그런 공포를 촉감으로 전해주지만 물탱크에 빠져죽은 아이의 사연이나 딸을 보호하기 위해 썩어가는 시체를 감싸안는 요시미의 마음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검은 물밑에서>는 조그만 단서에서 시작해 과거를 상상하고 감정을 채워 넣는 섬세한 각색이 돋보이는 케이스다. 한을 품은 어린 영혼이 물탱크가 터져나가라 부딪치는 사운드, 엘리베이터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검은 물길과 그 물길을 잠재우는 어머니의 슬픈 희생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영화이기도 하다.
시체를 둘러싼 진실의 정체는?
단편집 <라쇼몽> <덤불 속>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영화 <라쇼몽>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자살로 생을 멈추어세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어찌보면 라쇼몽(羅生門) 같은 존재였다. 공들여 단청을 칠한 대문이지만 연고없는 시체들의 안치소가 되었다는 이 커다란 교토의 남문처럼, 아쿠타가와는 시대를 거스르는 벚꽃 같은 소설들을 쓰다가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는 그 비애의 흔적이 많지 않다. 어둠 속에 잠기는 그의 소설 <덤불 속>과 달리 <라쇼몽>은 거리낌없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로 끝을 맺는다. <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라쇼몽>과 <덤불 속>을 각색한 소설이지만 내러티브를 떠받치는 단편은 제목을 차지하지 못한 <덤불 속>이다.
<덤불 속>은 숲속에서 발견된 무사 다케히로의 시체를 둘러싸고 엇갈린 증언이 나열되는 소설이다. 증인은 모두 일곱명. 이중에서 다케히로의 장모를 제외하면 모두 영화 속에서 소설과 똑같은 형식으로 독백이라 할 만한 증언을 들려준다.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숲길을 따라 와카사로 가던 무사가 도둑 다조마루를 만났고 가슴에 칼자국이 난 시체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 죽었는가. 다조마루는 강간당한 여인이 애원해서 두 남자가 결투를 벌였다고 하지만, 여인은 밧줄에 묶인 채 강간을 지켜본 남편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죽이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무당의 몸을 빌려 나타난 무사는 부정한 아내가 남편을 죽여달라 사주했고 환멸에 차서 자결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그들 자신에게만은.
여기에 쇠락한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라쇼몽>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기근과 재해로 황폐해진 교토의 현실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라쇼몽 아래로 증인이었던 나무꾼과 승려를 불러모은다. 원작 <라쇼몽>은 쫓겨난 하인이 비를 피하다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모아 가발 재료로 파는 노파를 만나는 이야기다. 죽음, 비루한 삶, 추한 얼굴, 축축한 빗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참한 시대가 <라쇼몽>에 배어 있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 소설을 제목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화자를 향한 천연덕스런 냉소
단편집 <홀림> 중 <소설 쓰는 인간> 성석제 지음 영화 <바람의 전설> 박정우 감독
성석제의 단편 <소설 쓰는 인간>에 달리 제목을 붙인다면 “왕제비전(傳)”쯤이 합당하겠다. 회고담을 펼치는 ‘나’는, 춤방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회한에 젖어 “원고지 앞에 돌아와 알몸으로 앉아 있는” 사내다. 그는 세상에는 소설처럼 사는 인간도 있고 소설을 써야 먹고사는 인간도 있지만 자신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장탄식한다. 이리하여, 첫장을 넘기기도 전에 독자는 제목의 ‘소설’이, 허풍 내지 장광설이라는 의미로 쓰는 ‘소설’임을 깨닫는다.
‘나’는 통신판매 대리점 총무를 때려치우고 춤 세계에 입문한 사연부터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고수들에게 무도(舞蹈)를 수업한 내력을 풀어놓는다. 근본이 건전한 사교댄스가 <자유부인> 같은 소설 탓에 음습한 길을 걷게 된 우리네 현실을 개탄하지만 그는 갈데없는 제비다. 첫 춤을 마치고 애프터 커피를 마시고 식사에서 술까지 춤 파트너에게 최선을 다한다. 데이트 비용이 떨어질 무렵 사업이 궁지에 빠졌다며 여자에게 연락을 끊는다. 그의 사업이란 것이 여자를 만나 돈을 쓰는 일이니 거짓은 아니다. 여자들의 성금으로 아파트 다섯채를 샀다는 주인공은 “여기에 무슨 협박이 필요하며 감금, 폭행, 사기, 공갈, 성폭행, 혼인빙자간음은 또 무슨 말인가”라고 안타까워한다. 흔히 1인칭 주인공 시점 소설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와 더불어 화자의 태도, 그가 감추거나 과장하려는 것을 읽어내기를 요구한다. <소설 쓰는 인간>에서 ‘나’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척 조롱하는 것은 때로 페이지 반 이상을 잡아먹는 각주들이다. 계간 <제비집 요리> 창간호, 사단법인 ‘경기댄스 협의회 경기도 지부’ 창립 취지문처럼 정체모를 문건에서 발췌한 주석이 점잔을 빼는가 하면 아는 사람 다 아는 <삼국지>의 삼고초려 고사까지 14줄이나 바쳐 설명한다.
그런데 <소설 쓰는 인간>을 132분으로 각색한 <바람의 전설>은 원작의 천연덕스런 냉소에 흔쾌히 따라 웃지 못하고 내내 망설인다. 주인공 박풍식을 수사하는 여형사의 시점으로 원작에 또 하나의 액자를 덧씌우고 끝내 그녀의 눈을 통해 주인공을 불우한 마이너 예술가로 승인해버린다. 그래서 <바람의 전설>의 각색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원작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모건 프리먼의 등장으로 무엇을 얻었나?
단편집 <불타는 로프: 링 위의 이야기> 중 F. X. 툴 지음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에게 스포일러로 간주될 내용이 있습니다.
책을 열면, 스피드백을 두들기는 듯한 짧고 빠른 문장이 달려든다. 누구한테도 존중받지 못한 여자 매기가 권투를 통해 자존을 찾고 고독한 트레이너 프랭키가 매기에게서 가족을 찾을 때 독자의 냉정은 서서히 무너진다. 작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일부 평자는 프로권투계의 컷맨(부상을 응급 처치해 경기를 지속시키는 사람)과 매니저로서 링 코너에서 보낸 세월을 69살에 이르러 소설로 옮긴 작가 F. X. 툴(본명 제리 보이드)을 헤밍웨이에 견주기도 했다. 하지만 생의 체험과 저작을 번갈아 두텁게 쌓아올렸던 문호와 달리 늦깎이 작가 보이드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수록된 단편집을 내고 2년 뒤 타계했다.
처음 프랭키는 선수로 키워달라는 매기를 거절한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무뚝뚝한 사내의 속내를 소설은 들려준다. “그는 무엇보다 여자들이 맞는 것을 보기 싫었다. (중략) 거기에는 실질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생리를 피해 게임을 잡아야 한다. (중략) 게다가 임신을 했다가 게임 때문에 유산을 한다면? 그리고 욕도 할 수 없다. 특별히 욕을 많이 해서가 아니다. 이따금 욕설은 어떤 말을 하는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매기는 소원해진 프랭키의 딸을 닮은 눈을 가졌다. 다른 코치는 싫다는 그녀의 미소는 프랭키의 가슴을 거의 찢어놓는다. 매기의 반복되는 “I do”로 맺어지는 둘의 ‘계약’은 흡사 혼인서약이다. 소설과 영화의 완급은 일치한다. 두 사람이 한팀이 되기까지 느리게 흐르던 시간은, 성공의 클라이맥스에서 숨차게 압축되고 내리막길에 접어들면 다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각색자 폴 해기스의 중요한 선택은, 원작에 없는 프랭키의 동료 스크랩을 창조해 관찰하는 내레이터로 이용한 것이다(스크랩의 실명한 한쪽 눈은 원작에서는 프랭키의 것이다). 스크랩의 존재로 인해 영화는 프랭키의 딸에게 쓰는 한통의 쓸쓸한 편지가 된다. 한편 모건 프리먼의 캐스팅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쇼생크 탈출>의 구조를 정확히 겹쳐놓는다.
제리 보이드의 글이 중계하는 링은 너무 생생해 고통의 순간에는 귀를 막고 싶어질 지경이다. “프랭키는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었다. 계속해서 깜박이는 속눈썹의 떨림이 느껴졌다.” 손바닥 밑에서 집요하게 파닥이는 속눈썹의 갈망, 그것은 영화가 훔칠 수 없는 소설만의 촉각이다.